난 퇴직이라는 옷을 벗어버리기로 했다

차의 센팅과정에서 생긴 블랙박스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들

오늘 아침,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바보가 되어버린 건가?'


차 선팅을 한 후 블랙박스가 작동하지 않는 문제가 생겼다. 운행을 멈추면 블랙박스도 함께 꺼지는 현상. 당연히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선팅을 해준 가게를 찾아갔다. 그러나 사장님의 대답은 의외였다.


"아, 그건 배터리가 많이 소모되니까 운행 안 할 때는 꺼두는 경우도 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아, 그렇군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차가 세워져 있는 동안에도 블랙박스는 작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파트 지하주차장이라 하더라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가 바보가 되어버린 걸까? 왜 그 자리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못 했지?'



퇴직 전의 나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일이다. 의문이 있으면 끝까지 물어보고, 납득할 만한 답변을 얻어내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상대의 말에 쉽게 끌려가고 있었다. 내일 다시 가야 할 것 같은데, 이런 내가 싫기도 하고 자꾸 작아지는 기분이다.


퇴직이라는 선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달라진 걸까? 회사에서의 위치와 역할이 사라지자 내 자신감도 함께 증발한 것 같다. 더 이상 '부장님'이 아닌, 그저 '아줌마' 혹은 '아저씨'로 불리는 익명의 고객이 되어버렸다.


30년 넘게 회사에서 일하며 쌓아온 전문성과 권위는 퇴직증서와 함께 반납한 듯했다. 매일 아침 정장을 입고 출근하던 나는 이제 편한 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하루를 시작한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옷도 벗어버린 것 같았다. 결정권자에서 결정을 따르는 사람으로, 질문을 받는 사람에서 질문을 하는 사람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퇴직자라는 꼬리표가 나를 주눅 들게 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필요 없는 사람이 된 걸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우울한 마음으로 책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자신감을 잃은 건 사회적 지위를 잃어서가 아니라, 지식과 사고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서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는 매일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훈련을 했다. 그런데 퇴직 후에는 그런 훈련의 기회가 줄어들었다.


회사에서는 내 의견이 중요했고, 내 판단이 존중받았다. 하지만 퇴직 후의 사회는 나를 그저 '나이 든 사람' 정도로만 취급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블랙박스 문제로 겪은 일은 어쩌면 내가 스스로에게 씌운 '퇴직자'라는 옷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옷은 나를 위축시키고, 내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결론은 독서다. 그래, 다시 책을 읽어야겠다. 내 머리를 새로운 지식으로, 내 마음을 다양한 관점으로 채워야겠다. 독서를 통해 다시 나를 무장해야 한다. 비판적 사고와 판단력을 키우고, 다시 당당한 나로 서기 위해.


하지만 단순히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이라는 옷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한다. '퇴직자'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가 퇴직 전에 가졌던 자신감과 판단력은 직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던 것이다. 그것을 다시 찾아내야 한다. 퇴직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내일은 블랙박스 문제로 다시 그 가게를 찾아갈 것이다. 이번에는 '퇴직자'라는 옷을 벗고, 그저 '나'로서 당당하게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블랙박스는 주차 중에도 작동해야 한다는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내 경험과 지식이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기 위해.



어쩌면 퇴직 후의 시간은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서의 역할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여정의 첫 걸음은, 오늘 저녁 책 한 권을 펼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퇴직이라는 옷을 벗어버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퇴직자'가 아니다. 그저 새로운 길을 걷고 있는 '나'일 뿐이다. 그 길에서 내가 쌓아온 경험과 지혜는 여전히 빛을 발할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이제 온전히 내 선택에 달려있다.


퇴직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 제약에서 벗어나,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내가 정말 되고 싶은 사람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온전한 '나'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 나는 퇴직이라는 옷을 벗어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새롭게 찾은 나의 모습으로, 내일의 태양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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