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시로에게 약 먹이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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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광염 때문에 고생하고 있던 시로의 상태를 체크하러 병원에 데리고 다녀왔다. 하지만 어디선 다쳤는지 다리 한쪽이 뼈가 보일 정도로 깊게 다친 시로. 급하게 24시간 병원을 찾아서 수술을 시키고 돌아왔다. 수술 부위를 핥지 못하게 넥카라를 씌우고 적응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약이었다.
가루약의 추억
어릴 적 가장 싫어하던 약은 가루약이었다. 80년대 중반만 해도 캡슐 알약은 없었고 종이봉투를 열면 기침이 날 정도로 가루가 날리던 가루약이 말 그대로 '대세'였다. 이 약이 지독하게 써서 엄마는 언제는 구슬처럼 생긴 여러 색의 사탕을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내 입에 넣어주었다. 이게 잘 안 되는 날엔 숟가락에 물을 따르고 거기에 약을 개어서 먹여주기도 했다. 어떻게 먹어도 약이 너무 싫어서 괴로웠다. 조금 크다 보니 어느새 가루약은 사라지고 캡슐약으로 바뀌어서 기억 속에서 지워졌었는데, 시로에게 약을 먹이느라 그 기억들이 떠오르고 말았다.
분명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시범을 보일 때는 쉬워 보였다. 의사 선생님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능숙하게 시로의 양 입가를 눌러 입을 살짝 벌리고 손가락으로 약을 쑥 집어넣었다. 놀란 시로가 발버둥치자 기계처럼 입을 틀어막고 목을 살살 쓰다듬어 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도록 했다.
이 과정이 밥 아저씨의 그림처럼 너무 쉬워 보여서(알겠지만 밥 아저씨는 함정이다.) 할 수 있겠냐는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 대신 미소와 끄덕임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병원에서 그렇게 약을 잘 먹는 것처럼 보였던 시로였는데 입 벌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분명 한 번에 입을 쩍 벌리게 했었는데 앙다문 시로의 입은 도저히 벌려지지가 않았다. 특히 한 손으로 입을 잡으면 시로의 양발이 올라와 필사적으로 손을 밀어냈다. 4kg 밖에 안 되는 작은 고양이의 앞발이 왜 그렇게 힘이 좋은지 도무지 쉽게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지를 못했다. 가까스로 어금니 쪽에 작은 구멍을 만들고 약을 밀어 넣었다.
"퉤"
바로 약이 튀어나왔다. 마치 칼을 꽂다 보면 해적 인형이 튀어 오르는 게임처럼 순식간이었다. 어이없어하는 틈을 타고 시로는 이미 구석으로 달아난 후였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첫 번째 방법은 캡슐을 열고 내용물을 밥에 감추는 것이었다. 밥 구석구석에 약을 섞었다. 밥에 섞인 약을 반절쯤 먹은 시로는 더 이상 약 뭍은 밥을 먹지 않았다. 그다음엔 의심이 많아졌다. 약이 있든 없든 냄새를 맡아보기 시작했고 다음 약을 뿌렸을 때는 대놓고 무시했다.
두 번째 방법은 밥이 아니라 간식에 섞는 것이었다. 밥보다 기호도 냄새도 훨씬 강한 캔과 츄르에 섞어줘 봤다.
그때 어릴 때 약 먹던 시절이 떠올랐다. 가루약의 쓴맛은 밥 따위로 감춰질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겪어놓고도 경험적 학습 결과를 무시했다. 약을 까면 안 된다. 어떻게든 의사 선생님처럼 입안에 밀어 넣어야 한다.
결국 편법이 아니라 정석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 약 먹을 때마다 시로와 전쟁이 펼쳐졌다. 안 먹일 수는 없으니 결국 완력이 동원됐다. 나는 입을 벌리고 아내는 약을 밀어 넣고 시로의 입을 강하게 닫았다. 시로는 한참을 발버둥 치다가 억지로 약을 삼켰다. 내 다음 임무는 당황한 시로에게 간식을 주는 것이었다. 약을 삼킨 시로에게 재빠르게 츄르를 먹였다. 화가 나서 도망가려던 시로를 츄르 냄새를 맡고는 얼른 달려와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 바로 화를 풀고 기분이 좋아져서 다리에 몸을 감았다. 밀물과 썰물처럼 매일 약 먹을 때마다 시로와 사이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반복했다. 약을 먹일 때마다 우리와 이대로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매번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고양이는 쿨했고 늘 사랑과 용서로 우리를 대했다.
이 녀석이 기술을 익혔네?
한 3일 정도 완력으로 약을 먹이는 것이 익숙해졌다 싶었을 때였다. 분명히 시로 뱃속에 들어가 있어야 할 약이 구겨진 형태로 방에 굴러다녔다. 처음엔 실수로 흘린 약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랬다면 약이 깨끗해야 했다. 이 약은 분명 이에 한번 씹혔고 침이 닿은 약이었다.
시로에게 약을 먹이고 잠시 관찰했다.
그랬더니 이 녀석이 글쎄... 약을 먹은 척을 하고 돌아서서 "퉤" 하고 뱉어냈다. 어이없게도 혀 뒤에 약을 감추고 있다가 우리가 놔주면 약을 뱉고 있었던 거다!
너 정말 귀엽고 영악하구나! 감탄하면서 난감했다.
그리고 좀 더 확실하게 입을 조이고 목구멍을 쓰다듬어 삼키는 걸 확인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약 한 번 먹이고 나면 아내도 나도 시로도 마음과 몸이 함께 지쳤다. 시로가 츄르를 소비하는 속도도 매우 빨라졌다. 우린 아직 시로에게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다.
결국 다음 검진 때 다시 한번 약 먹이는 방법을 강습받았는데 그러면서 도구 하나를 구할 수가 있었다. 약 주사기였다. 목구멍 깊이 약을 쏠 수 있는 신문물! 가지고 와서 써보니 엄청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약을 도로 뱉는 횟수를 줄일 수는 있었다. (지금도 잘 쓰고 있다.)
결국 약 먹이는 기술은 하나다. 애초에 물 없이 먹는 약이 괴롭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 최대한 짧게 괴롭게 하기 위해 마음 단단히 먹고 입을 벌리고 약을 최대한 목구멍 깊은 곳까지 쑥 밀어 넣고 목을 쓰다듬어야 한다. 이 과정이 집사, 엄마, 아빠 입장에선 너무 괴로운데 빠르게 하는 게 가장 안 괴로운 일이다. 애매한 감정으로 약을 넣다가 터지면 고양이 입장에선... 생각조차 하기 싫다.
사실 3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시로에게 약을 먹이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기술은 늘었지만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겪어보니 시로가 유독 약 먹이기 어려운 아이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릴 적 나처럼 싫은 건 싫은 건데, 사람이라서 설명해 줄 수도 없고 최대한 덜 괴롭히면서 약을 먹이는 수밖에.
그렇게 2주일을 약 먹이는 고통을 함께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시로는 후유증 없이 수술과 방광염 모두 회복이 됐다. 건강해진 시로는 컨디션이 좋아져서 매우 행복해졌고 우리와도 빠르게 한 가족이 됐다. 모든 게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가까워졌나?
다음 문제가 생겼다. 시로가 침실 문을 긁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