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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명작에서 '수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황제의 딸>, <진정령>에서 발견한 김용 소설의 흔적

by 블루곽

※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에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평가는 개인의 경험과 해석에 기반하며, 특정 작품이나 작가를 폄하하려는 목적이 없습니다.


오랜 기간 팬으로서 좋아했던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 다른 하나는 <진정령>이다. 먼저 <황제의 딸> 이야기부터 해보겠다.


1. <황제의 딸(환주격격)>과 <녹정기>의 유사성


어느 날 갑자기 무협에 흥미가 생겨 김용 작가의 사조삼부곡을 포함한 6대 소설을 읽었다. 왜 무협 골수팬들이 김용 노사를 '신필'이라 칭송하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왜 이제야 이분의 작품을 접했을까 싶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라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천룡팔부, 소오강호, 녹정기를 완독하고 나니 더 볼 것이 없어 허전했다. 김용 월드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무협에 빠져 다른 장르를 잘 안 보던 요즘, 마지막으로 본 <녹정기>를 곱씹다가 불쾌감이 밀려왔다. 위소보의 부도덕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라는 기시감이 자꾸 떠올랐다. 내 인생 명작 중 하나이자 10년 넘게 해마다 다시 본 <황제의 딸>에서 수없이 봤던 장면들이 <녹정기>와 겹쳤던 것이다. '표절'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녹정기 1998> 위소보 / <황제의 딸> 제비. 사진출처=홍콩 TVB, 대만 CTV, 후난 TV

엄밀한 기준으로 보면 표절이라 할 수는 없지만, 굵직하게만 따져도 열 가지 유사점이 보였다. 연재 시기를 보면 경요 작가가 김용 작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김용의 <녹정기>는 1969~1972년, 경요의 <황제의 딸>은 1997년에 집필됐다.


내가 찾아낸 유사성은 다음과 같다.


천한 신분의 주인공이 청나라 황제와 친분을 맺어 승승장구한다

위소보: 늙은 창기의 아들이 황궁에서 소년 강희제의 고민을 해결해 주고 친구가 됨

제비: 길거리 고아가 우연히 공주의 증표를 가지고 있어 건륭제의 딸이 됨


주인공은 생존을 위한 거짓말과 임기응변에 능하다

위소보: 기루에서 자라 눈치가 빠르고 거짓말에 능함

제비: 천덕꾸러기로 자라 눈치가 빠르고 잔머리를 굴림


무공은 못하지만 무공 욕심이 많아 고수를 사부로 모신다

위소보: 진근남, 구난사태를 사부로 모심

제비: 몽단, 소검을 사부로 모심


문맹이라 그림편지를 받는다

위소보: 강희제가 배려해 그림편지를 보냄

제비: 자미가 배려해 그림편지를 보냄

<황제의 딸> 자미공주와 제비공주 / 사진 출처=대만CTV, 후난 TV
황궁 탈출을 위해 여인을 내시로 변장시킨다

위소보: 방이와 목검병을 내시로 변장시켜 탈출시킴

제비·자미: 향비를 내시로 변장시켜 탈출시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가짜 공주’가 주인공이다

건녕공주: 가짜 황태후의 딸, 성격 포악, 사고를 많이 치지만 메인 히로인

제비: 가짜 공주, 주인공으로서 의협심은 넘치나 앞뒤를 안 보고 나서서 주변인이 뒷수습함


주인공은 도박과 내기를 좋아한다

위소보: 도박, 마작, 내기에 환장, 돈 밝힘.

제비: 도박, 투계, 내기에 환장.


궁중 최고 신분 여성이 빌런이다

위소보: 가짜 태후(신룡교 모동주 = 건녕공주 친모)

제비: 황후(건륭제 부인), 부처님(건륭제 모친)


반청복명·문자옥(명사집략)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다

위소보: 천지회와 강희제 사이에서 이중생활하고 둘 사이에서 고민, 명사집략 관련 가문을 도움

제비: 문자옥 사건으로 가문 멸족당함, 원수인 양아버지 건륭제와 남편 오왕자에게 복수하려 했음


주인공이 떠난 뒤 그를 그리워한 황제는 잠행을 나가 주인공이 있을만한 곳을 방문한다

위소보: 강희제는 녹정산 사건 이후 사라진 위소보의 흔적을 좇아 잠행을 나감, 새로 개업한 기루가 있으면 그곳에 방문해 위소보를 찾으려 함

제비: 건륭제는 향비 사건 이후 도망친 제비 일행에게 사형 내림,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을 용서하고 잠행을 나가 찾으려 함

<녹정기 1998> 위소보와 일곱 부인들 / 사진출처=홍콩 TVB



2. <진정령(마도조사)>과 <소오강호>의 유사성


중국 사극을 찾다가 <진정령> 리뷰를 읽었다. 가독성은 좋지 않았지만 '선협', '피폐', '현생 망치는'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팬들의 현생을 망칠 정도라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지 궁금해 보기 시작했다.


<진정령> 남망기와 위무선 / 사진출처=텐센트 비디오

결과는 사실이었다. 후유증이 오래가는 작품이었다. 두세 번 반복해서 보면 감흥이 옅어지지만, 첫 감상 당시에는 나도 <진정령>에 미쳤다. 주인공의 처절한 운명에 한참 몰입했고, 그의 행복을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그게 깊은 덕질의 계기였다. 결말 해석을 찾아보고 팬 커뮤니티와 원작까지 섭렵하면서 <진정령>에 깊이 매료됐다. 그러다 무협을 읽으면서, 이 작품에서도 수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소오강호 1996> 임영영과 영호충 / 사진출처=홍콩 TVB

김용의 <소오강호>는 1967~1969년 연재했으며 묵향동후의 <마도조사=진정령>은 2015~2016년 연재했다. 내가 발견한 유사성은 두 작품의 주인공 캐릭터 자체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었다. <마도조사>의 위무선과 <소오강호>의 영호충은 거의 판박이다.


유사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둘 다 고아이자 천재다
자유분방하며 하기 싫은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는다
의협심이 강하고,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한다
대사형이다
사저·사매·사제들과 사이가 좋다
술을 좋아한다
사부·사모에게 양아들처럼 길러졌다
그를 끝까지 지지하는 인물이 있었다(사모 영중칙 / 사저 강염리)
목숨을 걸고 끝까지 지킨 무리가 있다(항산파 / 온씨 방계 가문)
믿었던 사부에게 배신당한다(악불군 / 강풍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문파(사문)에서 쫓겨난다
공공의 적이 된 뒤 귀인에게 구원받고 사랑에 빠지며, 결국 부부가 된다(임영영 / 남망기)
평생의 배필은 부자이고 고수이며, 미인(미남)에 흰옷을 입는다. 그리고 악기를 다룬다
배우자와 함께 금, 피리로 합주한다
배우자와 금, 피리 합주를 하며 유유자적한다


<진정령> 위무선 / 사진출처=텐센트 비디오
<소오강호 2001> 영호충 / 사진출처=CCTV

내가 오래도록 인생 명작이라 생각했던 작품들이 사실은 김용 세계관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셈이다. 물론 이런 유사성이 곧 표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감탄했던 장면과 캐릭터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완성된 이야기의 변주였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인생 명작에서 다른 작품의 익숙함을 발견한 건 꽤 씁쓸하다. 그 '다른 작품' 역시 내가 인생 명작으로 꼽을 작품이다. 좋아하는 작품끼리 기시감을 준 건... 역시 달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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