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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미식기행-3

레온의 맛, 소고기

by 조승연 PD

스페인이 연상되는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 대문호 헤밍웨이가 스페인 투우의 열광적인 지지자였음은 유명한 사실이다. 뜨거운 태양, 원형 경기장, 죽음을 사이에 둔 투우사와 소의 팽팽한 긴장감.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성은 투우 찬성론자에겐 열정이고 반대론자에겐 광기일 것이다.


스페인 미식기행 세 번째 주제가 투우는 아니다. 소다. 스페인 최대 크기의 자치주인 카스티야 이 레온(이하 레온)에서 맛본 멋진 소고기 이야기를 지금부터 하려고 한다. 시간과 숙성의 힘으로 끌어낸 진짜 고기의 맛이 레온의 들판과 산에 있었다. 레온의 소고기 덕분에 중년인 난 새로운 힘을 얻었다. 어설픈 보양식에선 취할 수 없는 깊고 진한 기운을.

스크린샷 2025-10-16 오후 9.43.57.png 보데가 엘 카프리초

레온 시에서 차로 1시간 정도를 달리면 인구 약 1,500명 정도의 시골 마을 히메네스 데 하무스가 나온다. 이 작은 마을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테이크 하우스가 있다. 보데가 엘 카프리초(Bodega El Capricho)다. 예약제로 운영되며 몇 년 전 서울대에서 개최한 소고기 관련 학회에 이곳의 대표가 초청강사로 방문했을 정도의 유명식당이다. 혹자는 지구상 최고의 스테이크 하우스라고 평가를 한다. 아쉽게도 지구상 최고 반열의 스테이크들을 접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판단 불가다. 비교 대상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그저 유명세의 또 다른 표현 정도로만 이해할 수밖에.

스크린샷 2025-10-16 오후 9.41.09.png 엘 카프리초 농장

엘 카프리초는 기존 스테이크 하우스의 상식을 깨는 곳이다. 평범함이 단 하나도 없다. 예약 후 이곳을 방문하면 식당 입장 전에 차량에 올라탄다. 농장 투어를 위해서다. 레온의 광활한 초지에 자리한 엘 카프리초의 농장은 TV 속 '초원의 집' 이미지 그대로다. 맑은 공기, 푸르른 초원, 나무 펜스와 푸른 하늘까지. 차이가 있다면 소들의 외모다. 공격적이고 우아한 뿔이 난 엘 카프리초 농장의 소들은 옥스(Ox), 거세 수소들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거세 수소들의 평균 크기는 약 2m. 몸무게는 1.4톤에 달한다. 우람하다. 10년 이상을 공들여 키운 녀석들이다. 거대한 소들이지만 초원에서 자란 탓인지 온순하기 이를 데 없다. 사람이 다가가면 슬금슬금 내빼기 바쁘다. 이 녀석들을 유인하려면 도토리 나뭇잎을 준비해야 한다. 농장 곳곳에 있는 도토리나무 줄기를 따 소들에게 흔들면 눈치만 보던 녀석들이 천천히 다가온다. 이베리코 돼지들처럼 레온의 소들도 도토리를 좋아한다.

스크린샷 2025-10-16 오후 9.31.18.png 옥스

구름도, 매연도, 미세먼지도, 인공사료도 없는 넓고 푸른 청정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지내는 소들에게 스트레스가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이 녀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엘 카프리초 식당 예약자들이다.'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 평화로운 소들을 먹게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죽음을 사이엔 둔 인간과 소의 긴장감은 투우장에만 있는 건 아니다. 엘 카프리초 농장 투어는 훌륭한 마케팅 아이디어다. 이곳처럼 완벽한 소 사육 환경을 보면 소고기에 대한 신뢰 이전에 내가 먼저 힐링이 된다.


청정한 농장 환경과 무관하게 한 가지 의구심은 생긴다. 10살이 넘은 거세 수소가 맛이 있을까? 질기거나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소고기는 어릴수록 맛있는 거 아닌가? 결론은 물론 '아니다'. 기껏해야 48개월 정도 생육된 어린 소들의 과하게 지방 낀 근육에선 맛볼 수 없는 깊고 진한 '고기'가 10살이 넘은 거세 수소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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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카프리초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숙성은 기본이다. 부위별로 3개월에서 6개월 정도의 드라이 에이징 시간을 가진 후 스테이크로 제공이 된다. 이곳에서 추천하는 굽기 정도는 레어로 심부 온도를 45도 정도에 맞춘다.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생고기 그대로라고 보면 된다. 고기를 바싹 익혀 먹는 사람들에겐 못 먹을 정도이겠지만, 육회 애호가인 나에게는 최상의 굽기 정도이다. 도르래가 설치된 숯불 화구에서 심부 온도를 수시로 체크하며 스테이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굽는다. 이 방식이 정답이다. 고기를 몇 번 뒤집냐가 아니라 불의 세기를 높낮이로 조정하며 굽는 방식이 가장 맛있게 조리하는 방식이다.


이제는 먹을 차례. 시식 장소는 지하다. 엘 카프리초가 있는 작은 시골 마을 히메네스 데 하무스는 언덕을 파고 만든 전통 와인 저장고(Bodega)로 유명한 곳이다. 얕은 언덕 곳곳에 작은 돌집이나 문을 만들고 지하에 와인 저장고를 만들었다. 엘 카프리초의 풀 네임이 '보데가 엘 카프리초'인 이유이다. 지금도 와인 저장고가 있는 지하 공간에 스테이크 식당을 만들었다. 지역의 문화와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활용한 것이다. 어두운 지하 공간의 특별함은 고기 맛 이전에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경험을 선사한다. 인위적으로 조성한 공간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지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샷 2025-10-16 오후 9.41.49.png 히메네스 데 하무스의 전통적 와인 저장고

메인 셰프이자 대표가 직접 서브한 고기를 맛본다. 토마호크로 정형된 스테이크이니 등심, 새우살, 갈빗살이 혼재된 스테이크다. 10년 이상 청정 지역에서 자란 거세 수소. 누린내는 없다. 육즙이 가볍다. 지방은 단맛보다 단백질의 구수함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심부 온도 45도에서 멈춘 레어 형태의 스테이크 속살은 생고기라고 보면 된다. 쫄깃하다. 씹는 맛이 있다. 입에서 살살 녹는 야들야들함이 10살 넘은 수소에 있을 리 없다. 인위적으로 근지방을 만들지 않고, 인공 사료도 주지 않은 '청정우'다. 천천히 음미한다. 맑고 깊고 농밀하다. 근육 내에 과도한 지방이 없으니 맛이 맑다. 자연 속에서 성장하고, 시간 속에서 숙성된 고기의 육즙은 풍미가 깊다. 스테이크 선홍빛 심부는 생고기에 가깝다. 탱글한 생고기의 식감과 맛이 농밀하다. 완전히 익혀진 지방을 조금 썰어 살코기와 곁들이면 고소한 단맛이 더해진다. 지구상 최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에서나 흔하게 먹을 수 있는 고기가 아님은 확실하다. 48개월 지방이 그물처럼 촘촘히 박힌 야들야들한 고기가 넘볼 수 없는 깊은 맛의 힘이 있다. 스페인의 자연과 시간이 협력하여 선사한 멋진 풍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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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카프리초의 멋진 소고기는 다음같이 표현할 수 있다. 꾸밈없는 청정 자연, 수 백 년의 시간을 버틴 지하 공간, 10살이 넘은 거세된 수소. 덕분에 젊고 싱싱하고, 빠르고 세련됨은 절대 넘볼 수 없는 숙성된 맛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오로지 시간만이 풀 수 있는 맛의 방정식이 엘 카프리초에서 명쾌히 증명된 것이다.


소의 수명은 대략 20년 정도라고 한다. 엘 카프리초의 소고기들은 10살이 넘은 중년의 나이에 조리되기에 그토록 깊은 맛을 내는 것이리라. 나도 중년이다. 충분히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나이. 지나온 세월을 경험이라, 숙성의 시간이라 생각하니 기운이 돋는다. 스페인 엘 카프리초의 진짜 고기가 알려준 또 다른 맛이다. 그렇다고 거세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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