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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젤리피시 Jun 05. 2020

2.전원생활 판타지 척살기_그놈 목소리

고라니에 관한 소고 


못 먹어도 고라니.     

뒤꼍 언덕을 정리하다가 풀숲에 큰 짐승이 죽어있는 걸 발견했다. 낮이었지만 가슴이 철렁해 다가가 살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죽은 개를 내다 버렸거니, 생각하자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골이 나 두툼해진 입으로 마을 이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장님. 좀 와보셔야겠어요! 누가 죽은 개를 버린 것 같아요.”

“지금 외부에 나와 있는데 들어가는 대로 확인해볼게요.”

“아니, 남의 집 뒤꼍에 이런 걸 내다 버리다니요!”    


다음 날 이장님이 오셨다.    


“개가 아니고 고라니였네. 농작물에 피해를 주니까 누가 약을 놓았나 봐.”    


옆집 아저씨가 거들었다.     


“요 아래 0 씨가 약 놓은 걸 거야. 고라니가 뭐 관절염에 좋대나 뭐래나.”

“아니, 그런 약 막 놓고 그러면 불법 아닌가요?”

“농작물 피해를 많이 줘서 잡긴 잡아야지...”    


비명횡사하신 그 고라니의 행방은 이후 불명되었고, 다시 2주가 지났다.

뒤꼍 언덕을 정리하다가 풀숲에 큰 짐승이 또 죽어있는 걸 발견했다. 낮이었지만 가슴이 철렁해 다가가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또 약을 놓아 고라니를 죽였나 보다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장님은 무슨 죄인가.    


“이장님. 좀 와보셔야겠어요! 누가 또 고라니를 죽여 놓았어요.”

“지금 외부에 나와 있는데 들어가는 대로 확인해볼게요." 

“아니, 남의 집 뒤꼍이 도축장도 아니고 번번이 너무 하네요.”    


다음 날 이장님이 오셨다.     


“약이 아니고 올무를 놓았네. 농작물에 피해를 주니까 누가 올무를 놓았나 봐.”   

 

옆집 아저씨가 거들었다.     


“요 아래 0 씨가 올무를 놓은 걸 거야. 고라니가 뭐 관절염에 좋대나 뭐래나.”

“아니, 그런 올무 막 놓고 그러면 불법 아닌가요?”

“농작물 피해를 많이 줘서 잡긴 잡아야지. 잡았으면 얼른 가져가 고아 먹던지...”

       

고라니 <water deer 보노루, 복작 노루> 

사슴과 중 몸집이 가장 작은 포유동물  

몸길이 110∼120㎝, 황갈색 털에 뿔 없이

    견치(犬齒: 송곳니)가 길게 자라난다.

‘흡혈귀 사슴(vampire deer)’으로도 불린다. 

원산지: 대한민국, 중국 등 

세계 자연보전연맹(IUCN) 지정 취약(VU, Vulnerable) 등급의 멸종 위기 동물

전 세계 고라니의 60%가 한국에 거주     


예전에 흔치 않던 고라니가 어느새 인간의 삶 깊숙이 파고들어왔다. 농촌에서는 작물에 피해를 준다며 마음 놓고 처치 가능한 ‘유해조수’로 낙인찍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도로에 뛰어들어 운전자들도 마주치길 꺼린다. 

내가 살고 있는 시골집 주변에도 밤낮없이 발정 난 고라니 울음이 진동한다. 짝을 찾다 허기가 지면 텃밭에 내려와 고구마 잎과 줄기를 예초기로 훑듯 모조리 뜯어먹고 간다. 농사를 주업으로 삼지 않으니 분하다는 기분까지는 들지 않는데, 농부들은 이를 빠득 갈며 잡아 없애야 할 불구대천 취급이다.     


그놈 목소리

믿기 어렵겠지만. 고라니는 중국과 한국 일대에만 서식하는 희귀종인 데다, 중국에서는 멸종 위기 종으로 분류되고 있다. 우리나라만 개체수가 늘어 마치 지구 전역에 못된 고라니가 창궐하고 있다는 착시가 생겼다.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에 들어가 살기로 한 첫날 밤. 열에 아홉은 태생 처음 들어보는 고라니 울음에 간담이 서늘해지기 마련이다. 울음소리는 뭐랄까. 절박하고, 처연하고, 신경을 긁어대는 기분 나쁜 냄새를 풍긴다.  

고양이가 ‘야옹’하고, 개가 ‘멍멍’하고, 소가 ‘음메’하고, 까마귀가 ‘까악’하고, 참새가 ‘짹짹’하는 공식에 대입해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표현하자면, 가래 끓는 강렬한 악센트로 ‘하-악’, ‘케-악’, ‘허-억’ 정도 될까? 인기를 끌던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저그 유닛 ‘뮤탈리스크’가 사령관의 호출을 받거나 적을 무찌를 때 내는 소리를 닮았다. 어쩌면 기침, 가래, 해소, 천식에 시달리는 팔순 노인이 꿀떡을 먹다가 목에 걸려서 기진맥진 용을 쓰는 소리 같기도 하다.  내가 고라니 울음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 쓴 일기는 다음과 같다.    

<고라니 목소리 청취기>
싸늘하다. 가슴에 소름이 날아와 박힌다. 단말마(斷末摩)의 날카로운 비명이 눅눅한 밤공기를 단숨에 찢으며 공명한다. 어둠 속에 웅크린 괴기는 음전하던 대기에 파동을 일으켜 골짜기 너머까지 두려움을 흩뿌린다. 엄습한 긴장감이 채 가시기도 전, 고요를 뚫고 맞은편 골짜기에서 또 다른 비명이 터진다.
밑장 빼기를 하다 아귀의 독사 눈에 얻어걸렸을 때나 솟을 법한 섬뜩함이다. 지금까지 이런 소리는 없었다. 이것은 울음인가, 비명인가, 악다구니인가. 이 소리를 표현할 합의된 공식 의성어는 보고되지 않았다. 누군가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글씨로 만들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면 국어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될 것이다. 다시 한번, 싸늘하다. 그의 저주받은 성대가 가슴에 소름으로 날아와 꽂힌다. 


  ‘고라니’의 기원은 몽골? 

울음소리는 진상이어도 실제 고라니를 만나면 덩치도 크지 않고, 꽃사슴처럼 검고 큰 눈망울은 촉촉하고, 빤히 보다가 순식간에 달아나 귀엽다는 생각마저 든다. <고라니 목소리 청취기>를 쓰고 나서 나는 이 동물을 왜 ‘고라니’라고 불렀을지 궁금했다. 여기저기 뒤적여도 명쾌하게 밝혀놓은 곳이 없다. 그중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설명은 몽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국어사전에서 '고라(또는 고라말)'를 검색하면 '등에 검은 털이 난 누런 말'이라는 뜻이 나온다. 고라는 몽골어로 누런색을 뜻하는 쿠라(또는 쿨라 kula)에서 유래했다. 즉, 고라니의 누런 털색을 부르던 몽골말 ‘쿠라’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고라니로 변형되었다는 추측이다. 나는 '고라 + 니'의 '니'는 송곳니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한동안 억지 상상을 해봤지만 뚜렷한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고라니는 잘 놀라지도 않고, 귀소본능이 있다고 한다. 밤마실은 다닐망정 처음 머물던 장소에서 멀리 떠나지 않고 맴돈다는 의미다. 내 시골집 부근에 서식하고 있는 꽤 많은 수의 고라니들은 아랫집 0 씨의 올무나 약에 얻어걸려 유명을 달리하지 않는 한 계속 나와 공간을 공유하며 자손을 퍼트릴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고라니의 자취방을 찾아 뒷산에 올라갔다. 억센 가시덤불 가운데 누가 봐도 고라니 쉼터인 공간을 중심으로 8방 도주로가 마련돼 있었다. 어디에서 천적이 들이닥쳐도 긴 송곳니가 덤불에 걸려 허둥거리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잽싸게 내 튈 수 있는 합리적인 시스템이었다. 자못 놀라웠다. 이렇게 도주로가 분명하면 역으로 인간이 올무나 덫을 놓기 딱 좋을 텐데. 


“오늘 밤 10시부터 마을 주변에서 엽사들이 유해조수인 고라니와 멧돼지 포획 작업을 할 예정입니다. 돌아다니지 마시고, 총소리가 나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언젠가 마을 이장님이 날린 단체 문자 내용이다. 누군가 정성을 다해 세어보았더니 고라니는 우리나라에 최소 10만 ~ 75만 마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마릿수를 예측하는데 10만 ~ 75만 사이라니 얼마나 무책임한 통계치인가! 이 가운데 연간 10만 마리가 유해조수로 사냥되고, 6만 마리는 로드 킬로 죽는다. 밀렵까지 감안하면 한 해 20만 마리가 죽는다는 산수가 나온다. 우리나라의 고라니 총량은 늘고 있는 중인가? 줄고 있는 중인가? 아니면 오늘 당신이 잡은 고라니가 지구에 존재하던 마지막 고라니일 가능성은 없는가? 


태어난 죄뿐인 고라니는 엽사들을 동원해 잡아야 하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지구적인 시각에서 보면 멸종위기 동물이라는 데 당장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누구도 동정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생각하면 본래 고라니의 터전에 들어가 마을과 농지를 만든 것은 인간이었다. 고라니가 인간에게 유해조수라면 인간은 고라니에게 무엇인가?


고라니의 영어 이름이 ‘water deer’ 일만큼 물을 좋아하고 수영도 잘한다지만, 아직까지 고라니가 수영하는 모습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오늘 밤도 비련의 고라니 울음이 골짜기에 스치운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모든 고라니를 애도해야지. 그리고 고라니처럼 마음껏 울어봐아겠다. 케-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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