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무지개
청춘. 푸를 청(靑), 봄 춘(春).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을 청춘이라 부른다더라.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지만 정작 내가 그 시간을 살고 있을 때에는 도무지 푸른 봄에 살고 있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과연 내 인생은 언제쯤 피어날까, 앞으로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야 할까. 와 같은 걱정과 조급함 속에서 나는 오히려 내가 겨울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다지 아프진 않았어도, 참으로 서늘하고도 낯선 겨울임은 분명하다고.
그러나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것은 여름이었다. 웃고 떠들며 순간을 태워버리는 뜨거운 바다. 금세 스러지고 다시금 타오르던 밤의 불꽃들. 망가졌으면 망가진 대로 웃을 수 있는 파편들. 모두 우리를 지칭하는 말들이었다. 불행은 늘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웠지만, 행복은 반딧불처럼 잠깐 빛나고 마는 것들이었다. 친구와 기울이는 술잔 따위의 사소한 것들. 그 반딧불 같은 순간들이 모여 내 여름의 밤을 밝혀주고 있었다. 여러 계절을 돌고 돌아 그 반딧불들이 실은 불타오르는 여름의 한복판에 있었음을 깨달은 순간은, 내가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닿아있을 때였다.
그래서 난 내 청춘을 뜨거워서 녹아내리는 얼음덩어리라고 부르기로 했다. 형체는 사라진다 해도 그 물은 내 발목을 적시고 사라진다. 그렇다면 남은 건 뭘까. 얼음은 녹고, 물은 증발한다. 남는 건 흔적뿐. 하지만 그 흔적마저도 기억해 주는 이 하나 없이 외롭다. 그것이 홀로 남은 내 청춘이자, 그리움의 뒷모습이리라.
나는 흔적을 잇기 위해 애써 닮은 조각들을 찾아 꿰매어 붙였다. 그 어설픈 바느질 위로 피어오른 건 같아 보이지만 결국 다른 별. 갓 태어난 어른의 손에서 탄생한 덜 익은 별들은 언제나 황급히 밤하늘로 떠밀리듯 밀려 나온다. 전부 충분히 빛을 내고 있으나 궤도를 찾지 못한 채 헤매는 모습은 길을 잃은 어린아이와도 같아 보인다. 불빛 속으로 밀려 나온 밤의 그림자는 이미 어른이었지만 말이다.
그림자는 평면적이지만, 별들은 모두 입체적이다. 글 속에 드러난 나와 친구들 앞의 나, 연인 앞에서의 나, 가족과 함께 있는 나, 스쳐가는 인연 속의 나. 그 모든 나는 전부 다르나, 또 전부 나이기도 하다. 그게 때로는 그렇게도 혼란스러웠지만, 신기했던 건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이 모여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들고 있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일까. 다들 자기만의 색이 있다고 하는데 정작 나는 내 색을 알지 못한다. 색을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 하지만 지금껏 수많은 여름을 지나오며, 어쩌면 나는 애초에 하나의 색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은 단 하나의 파장만으로 또렷이 직선으로 뻗어나가는 빛도 있고, 태양처럼 수많은 파장을 뒤섞어 품은 채 흩어지는 빛도 있다. 인공적으로 만든 레이저는 언제나 단 하나의 색으로 존재하지만, 자연의 빛은 애초부터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프리즘을 통과하면 갈라져 나오는 무지개처럼, 한 빛 속에는 사실 모든 색이 함께 살아 있다.
그래서 청춘의 계절은 선명한 여름이 분명하다. 그 계절 한낮의 태양처럼 가장 눈부신 순간은 결국 흩어져 무지개가 된다. 그동안 내가 누군지 몰랐던 것은 나를 억지로 하나의 색으로만 칠하려 애썼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색깔이 없다는 건 곧 언제든 새롭게 스펙트럼을 펼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단일한 빛이기를 포기하고, 무지개로 흩어지기를 선택했다.
우리의 청춘은 갈라져 흩어지며 겹쳐지는 무지개. 도화지 위에 수많은 색을 쏟아내고, 무겁고 가벼운 색채들을 마음껏 낭비하자. 그것들이 뒤엉켜 결국 하나의 무지개가 되어 한 계절 속 하늘에 걸릴 테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 기억하지 않기 위해 기록하려 한다. 다가올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의 한여름 밤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