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녀'
10년 전 한 시설에서 소녀가 탈출한다. 그곳의 관계자들이 총출동해 소녀를 잡으려 하지만, 오히려 큰 피해만 보고 소녀를 놓치고 만다.
탈출 후 기억을 잃고 쓰러진 소녀는 한 노부부에게 발견되고 자윤이라는 이름으로 새 삶을 시작하게 된다. 노부부의 보살핌으로 씩씩하고 밝은 여고생으로 자라난 자윤. 하지만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어머니에, 소값 폭락으로 사룟값조차 밀릴 만큼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고, 친구의 권유로 상금을 벌고자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다.
방송이 나간 이후, ‘귀공자’를 비롯한 의문의 인물들이 자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총으로 무장한 채 집으로 찾아와 그들과 동행할 것을 요구한다. 과연 자윤은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과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2018년 개봉한 영화 ‘마녀’의 줄거리다. ‘신세계’의 박훈정 감독이 연출한 시리즈물의 첫 작품으로, 지난해 2편이 개봉하며 다음 편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초능력자들이 등장하는 SF 액션물이다. 그것도 김다미라는 당시로서는 신인 여배우를 원톱으로 내세운 다소 모험적인 영화다. 그리고 결과는 300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흥행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장르물의 성공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웹툰 등에서는 유사한 장르, 설정의 작품들이 자주 등장하고 인기를 얻고 있지만, 스크린에서 보기는 힘들다. 비현실적인 파괴력이 동반된 액션을 그리기 위해 고난도의 특수효과가 필요하고, 자칫 작위적인 설정이나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액션이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인기를 얻은 웹툰들도 실사화에 대한 언급이 있을 때마다 오리지널 팬들로부터 큰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는 많은 관객들이 다음을 기다리게 하는 매력적인 작품으로 완성되고 인정 받았다.
마녀의 액션 장면은 초능력자들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줄 만큼 화려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완성도 높은 특수효과로 파괴력 있는 타격감과 속도감을 구현해 낸다. 일반 액션 영화에서 주로 활용되는 손과 발, 그리고 몸을 이용한 화려한 동작 대신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볼거리를 제공한다. 완성도 높은 액션은 혹시 모를 유치함이라는 우려를 가볍게 지워내고 보는 동안 그 매력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점은 액션이 다가 아니다. 주인공 자윤이라는 캐릭터가 곧 이 영화를 존재하게 하고 매력적인 서사가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초능력을 지닌 주인공 소녀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는 일당을 만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싸운다는 기본 스토리상 주인공 캐릭터의 중요성은 당연한 것일 테다. 그리고 영화는 주인공에게 절대적인 능력과 이에 기반한 반전 서사를 부여하며 이 지점을 극대화한다. 말 그대로 ‘마녀’ 구자윤의 온전한 원톱 영화로 탄생한 것이다.
무적의 캐릭터, 그럼에도 싱겁지 않고 흥미진진하다
친구와 가족이 다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은 접어두세요
구자윤은 먼치킨 캐릭터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일종의 ‘사기캐’인 셈이다. 본격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기 전부터 자윤은 해외 의학 논문을 뒤지고 전국 수준의 석차를 유지하며 그림, 노래 등 예체능까지 못하는 게 없는 천재 여고생으로 그려진다.
이미 시설을 탈출할 때 누구도 건들 수조차 없는 압도적인 아이였음을 밝힌 바 있으니 관객들은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언젠가 당연히 자윤의 폭발적인 능력을 보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수준, 그리고 진짜 능력을 보여주게 되는 시점이다.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다수의 악당들과 싸워야 하는 자윤의 능력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자윤은 각성하게 될까.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특정한 계기로 기억을 되찾고 서서히 능력을 각성해가며 악의 무리와 싸우는 이야기는 사실 흔한 스토리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기에 변주를 더한다. 그리고 그 게 이야기의 핵심이 된다.
악당들은 TV에 등장한 자윤을 보고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연구소로 그녀를 데려간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다(지금부터 스포 주의)
그녀가 가진 특별한 능력은 뇌의 손상을 동반한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뇌가 파괴될 정도로 치명적인 부작용이다.
자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생존을 위해 최대한 능력을 자제하며 10년을 버텨냈다. 그리고 자신을 만든 집단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그들이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후반부 자윤의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관객들은 오디션에서 간단한 초능력을 보여준 것이 적들의 눈에 띄기 위한 미끼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초반부 의학 논문을 뒤지던 장면은 처음에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한 시도인 것처럼 보이다가 이야기가 좀 진행된 뒤에는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 마저도 본격적인 후반부로 가서는 그를 만든 연구진을 찾는 것이 진짜 이유였던 것으로 밝혀지며 반전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심지어 자윤의 능력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고 혼자 적들을 궤멸시킬 정도로 막강하다. 가족의 목숨을 건 악당들의 협박도 사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중한 이들의 생명, 그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들은 여러 작품에서 주인공을 딜레마에 빠지게 하고 상황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여고생으로서의 자윤과 본모습을 드러낸 능력자로서의 자윤, 이 두 모습이 하나에 담긴 캐릭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놀랍다.
개봉 후 그 해 국내 영화제에서 신인 여배우상을 휩쓸었던 김다미의 연기력은 이런 캐릭터와 설정의 힘을 극대화한다. 그렇게 강한 능력을 갖고도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느낌으로 뻔뻔하게 평범한 소녀의 모습을 연기하는 그,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무적의 먼치킨답게 '니들 별거 없잖아'라는 느낌으로 태연하게 악당들을 짓누르는 그. 이 영화로 발견한 김다미라는 배우의 인상은 영화 속 자윤의 능력치만큼이나 파괴적인 임팩트를 가진다.
지난해 개봉한 후속작은 자윤 못지않은 능력을 지닌 쌍둥이 동생, 그리고 조직 내 다른 세력들의 등장을 다룬다. 아마도 다음 작품에서는 이 두 자매가 더욱 강력해진 적들과 싸우는 스토리로 전개될 것이다. 작품의 배경, 시작점을 알리는 것이기에 1, 2편의 그녀들은 상대에게 당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줬다. 그런 긴장감의 결여는 굉장히 위험한 선택일 수 있으나, 마녀는 훌륭히 해냈다. 그리고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어쩌면(아마도) 앞으로 이들은 먼치킨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리즈의 다음 작품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