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
한때는 WBC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오갈 데 없는 전직 복서 조하.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와 어쩌다 주어지는 스파링 파트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숙소도 없이 만화방에서 쪽잠을 자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조하는 친구와 한 잔 하러 들른 식당에서 우연히 17년 전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간 어머니, 인숙을 재회하게 되고 내키지 않지만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들어간다.
집을 나간 후 재가한 인숙은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또 다른 아들 진태와 함께 살고 있었고, 이렇게 조하는 난생 처음 아버지가 다른 동생을 마주하게 된다. 조하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하지만, 갈 곳 없는 신세에 이들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고, 일을 나가야 하는 인숙 대신 진태를 돌보는 역할까지 맡게 된다.
좋아하는 것도, 잘 하는 것도, 그 동안 살아온 과정도 비슷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두 사람이지만, 하루 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좌충우돌 하는 사이 어느덧 서로에게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인숙은 복지관에서 피아노 콩쿠르 소식을 듣게 되고, 피아노에 재능을 가진 진태를 콩쿠르에 출전시키려 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난치병 진단을 받게 된 인숙은 부산에 일자리가 생겼다며 두 아들을 속이고 치료를 위해 병원에 들어가게 되고, 조하에게 자신 대신 진태를 돌보며 콩쿠르에 출전시켜줄 것을 부탁한다.
조하는 진태가 혼자 피아노를 연습하며 보던 동영상 속 인물이 얼마전 우연한 교통사고로 만났던 한가율임을 알게 되고, 가율을 찾아가 진태의 실력을 평가해줄 것을 부탁한다.
영화 ‘역린’의 각본을 맡았던 최성현의 감독 데뷔작, '그것만이 내 세상'이다. 이 작품은 드라마 장르로는 적지 않은 수치인 약 34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특히 이 영화는 헐리우드까지 진출하며 연기력과 흥행력을 인정 받은 이병헌과 2016년 영화 ‘동주’로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거머쥔 이후 한국 영화계의 신진 연기파 배우로 급부상한 박정민, 여기에 독보적인 연기력과 캐릭터 소화력으로 중견배우 중 가장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보여주고 있는 윤여정까지 가세하는 등 참여 배우들의 면면만으로도 큰 기대를 모은 작품이다.
성공적인 흥행 성적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신파 구조로 영화에 대한 평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역시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만큼은 영화의 많은 단점을 상쇄할 만큼 이견 없는 호평이 따랐다.
평단의 혹평은 물론이고, 관객들조차 호불호가 갈릴 정도로 영화는 다소 진부하다.
아버지는 물론, 모든 것이 다른 두 형제가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과정, 이를 보다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두 사람의 유일한 매개인 어머니의 부재,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와 영화 말미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 투입된 난치병 설정까지 핵심 설정은 작위적인 느낌마저 준다.
많은 이들이 톰 크루즈,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레인맨’과 조정석, 도경수가 출연한 ‘형’과 같은 기존의 많은 영화를 짜깁기한 것 같다는 평가를 남긴다.
이런 형제 관계에 기반을 둔 핵심 설정뿐만 아니라,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고 피아노에 대한 꿈도 접어버린 피아니스트가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순수한 천재 진태를 만나 다시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느끼고, 물심양면 그를 돕게 된다는 설정이나 주인집 딸과 세입자의 아들, 연예인을 꿈꾸는 날라리 여학생과 오로지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자폐 청년이라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성향과 상황 속 남녀가 이성적으로 미묘한 감정선을 보여주는 설정도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전자의 경우 진부하고 작위적인 설정이 핵심 설정의 그러한 느낌을 더욱 부각시키고, 후자의 경우 두 사람의 감정선에 대한 어떠한 계기나 설명도 없어 재미를 위해 억지로 밀어 넣은 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착한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그저 기존의 영화들을 답습한 그저 그런 신파극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특유의 따스함 때문이다.
신파는 기본적으로 극적인 감동을 전제로 하지만, 이 영화는 눈물로 하이라이트를 이룰지언정 하이라이트의 감동보다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따스한 정서에 더욱 의미를 둘만한 영화다.
‘레인맨’이나 ‘오!브라더스’의 경우 형제 중 한 쪽은 지체나 자폐를 갖고 있는 인물로, 한 쪽은 사기꾼 같은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영악한 형, 또는 동생이 세상 물정 모르는 형제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다 자신도 모르게 진정한 형제애와 인간애를 발견하는 구조다. ‘형’의 경우도 동생의 결함이 정신적 장애 대신 시각 장애로 설정됐을 뿐, 이러한 인물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내 세상’의 조하는 다소 다른 캐릭터다. 그는 똑똑하지도 않고, 동생을 통해 이익을 실현할 계획도 없다. 성격이 급하고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성향이긴 하지만 천성이 착한 인물로 그려진다.
이전 유사한 영화들이 약자의 세계에 놓인 인물과 그를 이용할만한 능력과 위치를 가진 인물로 형제 구도를 설정했다면, 이 영화는 이러한 구도 대신 스포츠, 즉 몸의 세계와 예술의 세계라는 환경과 가치관의 차이로 두 인물을 구분한다.
악인이 인간적 감정을 깨달으며 선인으로 거듭나는 스토리가 아닌, 각기 다른 사람들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하며 어우러지는 모습을 그린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부 집주인과 인숙이 실랑이하는 장면은 흔하디 흔한 집주인의 갑질을 예상하게 하지만, 오히려 영화가 진행될수록 두 집의 관계는 이웃사촌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집주인 홍마담은 호스트바를 운영하며 몸이 좋은 조하에게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하지만, 극단적 신파에서 볼법한 어머니의 치료비라도 벌기 위해 주인공이 몸을 파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처한 가난한 환경을 어필하는 장면들은 여러 차례 나오지만, 가난 자체가 극적인 갈등이나 이야기의 비약을 만드는 도구로 소모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환경일 뿐이다.
권위적으로 보이던 가율의 모친도, 콩쿠르에서 진태를 외면한 유명 피아노학원 원장도, 호스트바를 운영하는 집주인 홍마담도, 언뜻 날라리처럼 보이는 홍마담의 딸도 첫인상에서 느껴지는 선입견과 달리 알아갈수록 선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결정적인 장면은 마지막 장례식장 신이다. 진태의 공연과 인숙의 임종에서 관객들의 눈물을 쏙 뺀 후 등장한 장례식장. 이곳에 모인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비통함보다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따스함이 느껴진다.
설정은 진부했지만, 그 진부한 설정에서 자극적인 갈등과 극단적인 감정을 끌어내기보다 끝까지 선한 이들의 따스한 이야기로 끌고 간 이 영화의 미덕에 대해서만큼은 높은 평가를 주고 싶다.
이래서 윤여정, 윤여정 하는구나
이런 영화가 가진 인간적인 미덕도 눈여겨볼만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며 느낀 점을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윤여정이라는 배우의 절대적인 힘을 느꼈다고나 할까.
사실 영화의 스토리 맥락에서 두 형제의 어머니인 인숙이라는 인물은 특별할만한 게 없는 캐릭터다. 어떤 중견 여배우가 소화하더라도 무리 없어 보이는 캐릭터인데 이병헌, 박정민이라는 무게감 있는 투톱 주연에 한지민이라는 썩 괜찮은 주연 배우를 주조연급으로 배치한 상황에서 굳이 '윤여정'이라는 대배우를 캐스팅할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개인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윤여정이라고 해서 항상 엣지 있는 역할만 할 필요는 없다. 실제 그녀에게 오스카 상을 안겨준 '미나리'에서도 한국의 어머니, 할머니상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연기해내지 않았던가.
다만, 가끔 볼 수 있는 이병헌의 루저 연기나 박정민의 서번트 중후군 연기 등 두 주연배우의 강하고 색다른 캐릭터에 윤여정이라는 대배우가 묻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를 한참 보고난 후, 이 영화에 윤여정이 필요한 이유가 느껴졌다.
어쩌면 뻔하고 진부할 수 있는 인숙이라는 캐릭터를 그녀라고 해서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로 탈바꿈시킬 순 없다. 대신 그녀는 누구보다 리얼하고 관객의 가슴에 와 닿는 감정 연기를 펼친다.
조하의 입장에서는 과거의 버려진 상처에 조금은 동생에 기운 듯한 애정에 서운할만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 모두에게 변함 없는 애정을 갖고 있는 어머니. 아들들과 함께 쉽게 울고 웃고 발끈하는 현실 속 우리와 똑같은 가장 평범한 일상의 감정을 표현하고, 죽음을 앞두고 자식들을 먼저 걱정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감정을 연기하는 그녀는 정말이지 완벽했다.
과하게 신파적이지도 않고, 너무 새롭게 해석하려 하지도 않고, 이야기의 진정성을 만들고 극 중 인물들의 관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딱 적정 수준의 연기를 펼치는 윤여정 배우를 보고 있노라면 아, 역시 윤여정이구나 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어쩌면 윤여정의 연기였기에 이 영화가 많은 약점에도 하나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감독은 그 부분까지 염두에 두고 윤여정이라는 대배우를 고집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맥스무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