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민덕희'
세탁소 화재로 모든 것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대출상품을 알아보던 생활력 만렙 덕희. 어느 날, 거래 은행의 손 대리가 합리적인 대출상품을 제안하겠다며 전화를 걸어온다. 대출에 필요하다며 이런저런 수수료를 요구한 손 대리에게 돈을 보낸 덕희는 손 대리를 찾아 직접 은행에 가서야 이 모든 과정이 보이스피싱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렇게 전 재산을 잃은 덕희는 집도 없어 자신이 일하는 공장에서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다. 그런데 덕희 인생 최악의 빌런 손 대리가 갑자기 다시 전화를 걸어오는데, 그 내용이 황당하다. 본인이 사기 친 덕희에게 제발 좀 살려달라니.
덕희는 손 대리와의 통화로 그가 보이스피싱 조직에 납치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손 대리도 구하고 잃어버린 돈도 찾기 위해 경찰을 찾는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총책을 잡는 일이 쉬운 일이냐며 경찰은 덕희의 제보를 무시하려고만 하고, 결국 덕희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절친한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직접 중국 칭다오로 향한다.
씁쓸한 현실에 울리는 유쾌한 경종
‘시민덕희’는 잘 알려진 것처럼 몇 년 전 경기도 화성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진 실화 영화다.
이 사건의 실제 주인공인 김성자 씨는 영화 내용에서처럼 보이스피싱 내부고발자의 정보를 토대로 경찰서에 신고하지만 차갑게 외면당했다. 총책 인적사항과 총책의 한국 입국 예정 정보까지 알려줬음에도 경찰은 그의 제보를 무시했고, 총책 사진과 은신처 정보 및 중국 사무실 주소, 피해자 명부까지 모아 제출한 뒤에야 경찰은 이 단서를 토대로 총책 검거에 성공했다.
사실상 김성자 씨가 숟가락째 떠 먹여준 셈인데, 그럼에도 경찰은 김성자 씨에게는 범인 검거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았고 그들의 치적으로 포장하고 홍보하기에만 급급했다. 최대 1억원의 신고보상금도 당연히 언급조차 없었다.
결국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그제야 경찰은 김성자 씨에게 1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넘기려 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이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진정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실제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고 하며, 영화 개봉 소식이 알려지며 사건이 다시 주목받자 피해액 전액에 해당하는 포상금을 지급하는 추천이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영화는 이처럼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엄연한 사실인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한다. 그리고 실제 그 목소리는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언론이 움직이고, 영화로 제작돼야 비로소 무언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이제는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우리나라 행정 시스템의 현실에 씁쓸함이 느껴진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설정들...납치 살인, 그리고 현장 출동!!
영화는 재미를 위해 실제 사실과는 다른 몇 가지 설정과 연출을 가미한다.
손 대리 제보의 개연성과 그가 증거를 모으고 탈출하는 과정에서의 극적 긴장감을 위해 강제로 납치되어 구타와 살인이 만연하는 범죄 소굴에서 착취당하고 있다는 설정을 추가했다.
실제로 내부고발자가 구타를 당하긴 했지만, 강제적인 납치나 살인과 그에 버금가는 잔혹한 폭력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설정을 통해 손 대리가 목숨이 달린 위험한 도박을 하는 모습을 긴장감 있게 그려내며 라미란이 맡은 주인공 덕희의 상황과 보조를 맞춘다.
행동 하나하나가 생사와 직결되는 손 대리의 상황, 그러나 한국에서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는 덕희의 상황이 맞물려 그려지는 동안 관객들은 답답함과 스릴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런 부분은 그동안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서 아주 자주 사용된 장치다. 영화는 여기에 더해 ‘여성’이라는 실제 주인공의 상황을 주요 포인트로 삼아 강력하고 특징적인 캐릭터와 이 영화만의 매력을 만들어낸다.
특히 실제로는 국내에서 제보자를 설득하고, 자료를 취합하는 역할을 했던 평범한 아줌마에 불과한 주인공을 아예 중국의 살벌한 현장으로 보내 손 대리가 겪은 '위험'을 덕희 일행에까지 전이하며 몰입도와 공감을 높이고,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국 아줌마’의 캐릭터로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한 한국 영화계의 입지전적인 인물, 라미란이 있다.
마초를 대표하는 마동석, 아줌마를 대표하는 라미란...
캐릭터성의 극대화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다
현재 마동석과 라미란은 한국 영화계의 트렌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마동석은 마초, 라미란은 아줌마라는 각각 남녀의 특성을 극대화한 캐릭터를 대표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놓치면 안 될 포인트가 있다. 그간 사회에서 두 성별의 다소 부정적인 영역으로 인식, 묘사되던 특징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동시에 인간적인 반전 매력을 부여하며 끝내 대중의 가히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긍정적 캐릭터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기존의 마초적 캐릭터는 액션영화 등에서 남성성의 매력을 한껏 뽐내지만 남성우월주의적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저 배우가 가진 훤칠한 외모나 캐릭터의 시크함을 더해 이를 상쇄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마동석은 적당한 근육질 몸매의 잘생긴 외모 대신 외형부터 마초, 힘 그 자체를 극대화한 인물이며, 여기에 따뜻한 인간적 매력과 유쾌함, 유머러스함을 부가했다. 매력적이지만 먼, 또는 약간은 불편해 보이는 캐릭터를 친근하고 믿음직스러운 캐릭터로 전환한 것이다. 마블리라는 그의 별명은 마초 캐릭터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아줌마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도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시끄럽고, 오지랖 넓으며, 여기저기 말을 옮겨 다니고 그래서 사건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억척스러움, 그리고 내 집과 이웃 정도로 한정되는 소규모 사회에 고립된 외로움 등의 입체적 요소들도 담겨있다.
라미란은 전자의 시끄러움과 후자의 억척스러움을 적절히 융화시켜 ‘아줌마’라는 캐릭터의 사회적 범위를 확장한다. 무서운 줄 모르고 악의 무리에 맞서는 정의로운 억척 아줌마가 바로 그것이다.
아줌마 라미란의 전성시대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시민덕희는 그런 라미란이 구축한 아줌마 캐릭터의 정점이라 볼 수 있다. 이전부터 라미란은 특유의 수다스럽고 능청맞고 억척스러운 캐릭터 연기로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만들어왔는데, 특히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에서 그 독보적인 캐릭터는 빛을 발했다.
‘걸캅스’에서는 전설의 형사 출신 민원봉사실 주무관으로, ‘정직한 후보’ 시리즈에서는 정치인으로 분해 불의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두 작품은 라미란에게 일종의 힘을 쥐여줬다. 걸캅스는 뛰어난 경찰 출신이라는 직업과 능력치, 정직한 후보 시리즈는 유력 정치인이라는 배경과 권력이 이에 해당한다. 아마도 라미란의 아줌마 캐릭터를 범죄와 정치판이라는 현장에 배치하면서 발생하는 낯설게 하기를 무기로 삼은 것일 테다.
하지만 시민덕희는 다르다. 덕희는 범죄집단, 그리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회 시스템이라는 두 개의 불의, 또는 부조리와 싸우지만, 그녀에게는 평범한 친구 말고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온전히 아줌마의 힘으로 무서운 줄 모르고 그 거대한 싸움에 끼어든다. 이를 통해 평범한 사람이 불의를 응징하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고, 사건의 분위기를 적정한 유쾌함과 답답함이 조화될 수 있도록 이끌어간다. 다른 말, 다른 지원 필요 없고 오로지 깡다구만으로 승부하는 순수한 아줌마의 힘, 그 정점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70만 관객을 넘기며 손익분기점 돌파, 또는 근접한 성적을 달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본격화된, 정점에 닿은 라미란의 캐릭터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앞으로 라미란이 만들어가는 캐릭터가 어디까지 진화하며 어디까지 성공할 수 있을지, 과연 마동석에 버금가는 신드롬까지 어이질 수 있을지 많은 기대를 갖게 하는 이유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실화 관련 내용은 본문 중 링크로 첨부한 나무위키 '시민덕희' 항목의 '9. 실화와 차이점' 부분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