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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콤플렉스 34화(3부 1화)

당신은 불행 앞에 담담할 수 있나요?(1)

by 이정석 Mar 04. 2025

우리는 네 가구가 함께 생활하는 다세대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다. 이 집은 가운데 마당을 두고 주인집이 1층을 쓰면서 2층을 두 가구로 쪼개어 세를 주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가구는 2층으로 바로 향하는 하나씩의 출입구를 두고 있었다. 그 외에 본체와 별개로 작은 가건물에 한 세대가 살고 있었다. 


나는 늘 이 집의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 일 없는 우리만의 출입구로 집을 드나들었다. 대략 4년 정도 된 것 같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그해 어머니는 이곳으로 집을 구하고 이사를 했다. 진학할 고등학교가 정해진 후 가장 가깝고 접근하기 쉬운 곳으로 정한 것이었다. 


이 집에 사는 약 4년의 시간 동안 인심 좋은 집주인은 보증금을 한 번, 월세를 한 번 올렸다. 보증금은 200만 원, 월세는 10만 원이 올랐다. 그럼에도 주변 시세보다는 좋은 편이어서 우리는 이 집주인이 아주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마웠다. 


이제 이 집에는 나 혼자 남았다. 이 집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어머니는 정작 안정적으로 이 집의 월세를 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떠났다. 


어머니가 남긴 편지의 내용은 축약하자면 간단했지만, 정말 많은 문장을 담고 있었고, 얼마나 오랜 시간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하고 결국 어쩌지 못해 남겨야 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동규야, 정말 미안해. 아니, 축하해. 내가 너를 떠날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내 생각에는 축하할만한 일인 것 같아. 너는 이제 정말 크게 자랐어. 너 혼자 네 삶을 일궈갈 수 있을 만큼. 그래서 나는 너무 뿌듯하다. 네가 자랑스럽고, 너를 이렇게까지 키운 나도 자랑스러워.


다만, 한 가지 미안한 점이 있다면, 아직도 네가 축구를 계속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솔직히 지금 네 삶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하지만 네 삶이고, 네가 그렇게 원했던 삶이고, 내가 뭐라 할 수 없지만 결국 못 지켜준 너의 삶이란 생각이 자꾸 들어서 마음이 아파.


내가 괜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 그냥 나는 너 스스로 혼자 삶을 지킬 수 있게 된 게 반가웠을 뿐인데. 그래서 나는 이제 네 옆에 없어도 돼. 난 네가 더 많은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가끔은 내 생각하지 않고 토할 때까지 마시다 집에도 안 들어오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쪽지로 남기는 거, 촌스럽단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네가 즐겁게 일하고 혹은 즐겁게 노는 그 시간에 이상한 문자로 네 흐름을 깨고 싶진 않았어. 이제 너도 스무 살이야. 더 즐겁게 놀고, 더 네 또래처럼 행복하게 살아야지. 혹시라도 내가 거기 방해되고 싶진 않아. 좀 더 나가자면, 네가 나 때문에 신경 쓰고 사는 게 더 싫어. 넌 결혼하고 아이도 키우려면 지금부터 계속 저축하고 쌓아야 해. 내 걱정하느라 생활비에 쓰고, 따로 돈 넣고, 그런 거 하지 마. 근데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네가 들을까?


넌 네 삶을 살아. 내가 그동안 너와 살았던 건 너를 키운 게 아니야. 보답하려고 하지 말고, 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려고 하지 마. 그리고 나도 이제 마흔을 갓 넘긴 나이야. 새 삶을 시작하기에 늦진 않았다고 생각해. 우리 이제 각자의 삶을 책임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살기로 하자. 그동안 정말 고마웠고, 사랑했어.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란다. 


테이블 위의 쪽지라고 생각했던 종이는 앞뒤로 빡빡하게 쓰인 편지지였다. 형식만 편지지가 아니었을 뿐. 처음 그 종이, 그 첫 문장을 보자마자 나는 느꼈다. 그리고 그 뒤의 내용은 잠결에 스러지는 햇볕처럼 조용히 녹아내렸다. 하지만 어머니가 떠났다는 사실은 확실했고, 오로지 그 충격만으로 모든 것을 잊고 쓰러졌다. 


어스름한 기억 사이로 무언가를 하고, 집을 오가고, 그러다 쓰러지고.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흐른 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다가 급박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여보세요.”

“야, 뭐야? 괜찮아?”

성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렴풋이 집안을 헤매는 시간 동안 성이에게 문자를 보낸 기억이 났다. 나, 오늘은 못 나갈 것 같아.


“가게는? 괜찮아?”

“너 없으면 문 못 열지.”


성이는 요리를 할 줄 몰랐다. 직업반에서도 조리과를 나오긴 했지만, 어쩌다 선택한 게 그것일 뿐이었다. 사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성이와 같은 학교 출신이자 전국구 중 한 명이었던 지훈을 피해 전공을 고르다 보니 거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게 사장인데, 나 하나 없다고 아무 망설임 없이 가게를 닫았다는 사실은 실망스러웠다.


“너도 조리반이었잖아. 나 없으면 아무 것도 못 하니?”

“네 손맛이 있잖아. 그리고 홀까지 보려면 아무래도 나 혼자로는 부족해.”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상황이 좋게 보이진 않았다. 


“그나저나 어제 얼마나 마신 거야? 아까 지영이한테 전화 왔더라. 너 못 나와서 가게 닫았다고 하니까 걱정 많이 하던데? 어제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다고.”


순간 치솟는 짜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성이가 말을 이었다. 화제를 돌려준 덕분에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 사이, 내가 너무 예민했던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술은 괜찮아. 그냥 개인 사정이 있어서. 일단 내일 얘기하자.”

“개인 사정? 내가 모르는 개인 사정이 있어?”


정말 순수한 녀석인지, 자신을 둘러싼 세계 외에 다른 가능성은 가늠하지 못하는 백치인지 성이는 자신이 모르는 내막까지 배려하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아이였다. 나는 잠시 한숨을 쉬고 전화를 끊기로 했다.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더 묻지 말고 내일 보자.”


녀석이 말을 이을 새도 없이 휴대전화의 폴더를 닫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직도 머릿속이 아찔하고 지난 새벽 뇌를 쥐어짜던 감각이 드문드문 올라왔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거의 쓰러질 것같은 감각으로 겨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속에서는 토악질이 올라오고, 머리는 어디라고 지목할 수 없는 여러 지점에서 쑤시는 듯한 통증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그러고 남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집을 뒤지기 시작했다. 


거의 기다시피 어머니의 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확인했다. 몇 되지 않던 어머니의 옷가지들이 완전히 거둬진 비키니 옷장, 그리고 오랜 동안 어울리지 않는 화장대 역할을 해왔지만 이제는 깨끗이 비어 제 모습을 찾은 밥상. 방구석이나 가구 한쪽에 남은 어머니의 흔적은 볼품없었다. 있으나 마나 한 반짇고리 세트와 호랑이 연고 따위가 공간을 떠난 주인에게 버림받은 모양으로 외롭게 나뒹굴었다. 


실제 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은 어머니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언제 이 모든 짐을 다 정리했을까. 그리고, 왜 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어머니가 무언가를 준비하는 움직임 정도는 알아챌 수 있지 않았을까. 


너무도 깨끗하게 비워진 그녀의 흔적에 나는 가슴이 울컥했다.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이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화장실에서 변기를 잡고 어머니가 떠나가던 지난밤 아무 것도 모른 채 신이 나 삼켰던 술과 안주를 한참 동안 게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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