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요, 환상 속의 그대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

by Suzanne

*불문과 문학회에서 발표한 소설 비평문입니다.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단계의 악동으로 여겨지던 여성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데뷔작으로 20대 초반 소르본 대학 학생이던 시절 쓴 작품이다.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한국어 제목은 노래 제목 등으로 꽤 익숙한 편이지만, 여기서 ‘안녕’은 작별인사(Au revoir)가 아닌 환영인사(Bonjour) 임을 잘 알아두자.



슬픔은 상실감과 부재감이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느끼는 허전함과 아쉬움, 허탈함. 여기에는 죄책감과 우울이 동반되기도 한다. 슬픔은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도 그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온다. “나는 무엇이든지 곧 잃어버리는 성격”이라던 주인공 세실은 살면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잊으며 슬픔이 건네는 인사를 인식하지 못 한 채 살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엇을 잃었기에, 마침내 자신을 찾아온 슬픔과 만나 인사를 했을까? 세실은 바로, 환상을 잃었다.


환상이라는 연극의 연출


연출가는 연극을 지휘한다. 소설의 2부에서 세실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이 연극을 구상하고 이끌어 가고 있음을 말한다. 이 연극에서는 세실 자신과 세실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순진하고 어리숙한 인물들인 시릴, 엘자, 레이몽이 주연이다. 연극을 관람하고 세실의 집이라는 극장을 떠날 관객은 안느이다. 자신은 연출가이자 배우로서 인물들 간의 관계를 조종한다. 세실이 원하는 장면은 소설의 첫 장, 아버지와 엘자가 여전히 한심한 수준으로 쾌락적인 사랑을 나누고 자신과 시릴도 비슷한 모양새이며 안느는 여전히 고상한 어머니의 친구인 상태이다.

소설의 서술자인 세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겠지만, 안느 또한 자신의 연극을, 세실보다 먼저 시작하여 이끌어 가고 있다. 안느의 연극은 엄마, 아빠, 자식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한 지붕 아래에서 오붓하게 살아가는 가정이다. 굉장히 평범하고 소박한 꿈이고 다른 표현으로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소망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세실의 환상 속 안느는 속물 같은 우리(세실과 레이몽)와는 다른 족속의 인물이므로, 그런 소망을 품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안느가 감히 그러한 소망을 품고 실행에 옮기려 했기 때문에 세실의 연극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하나의 무대 위에 두 명의 연출가가 존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사공이 많은 배는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연극은 뒤섞여 어느 것이 안느의 연극인지, 세실의 연극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어쩌면 두 연출가가 하나의 연극을 연출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처한다. 점점 세실의 판단 속에서 안느의 감정과 행동의 근원은 오리무중으로 빠지고 안느는 자신의 연극이 실패함에 좌절하여 막이 끝나기도 전 무대에서 빠져나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사고사인지 자살인지도 모를 만큼 자신의 감정을 잘 숨긴 안느는 연출가보다는 배우가 적성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만든 연극에 끝까지 존재하며 책임을 지는 연출가적 면모는 세실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실패한 연극, 파괴된 우상과 신

신이 대지라는 공간에서 세상을 관장하는 자라고 한다면, 연출가는 무대라는 공간에서 작품이라는 세상을 관장하는 자이다. 즉 세실은 연출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신의 역할을 모방한다.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연출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안느를 우상으로 삼고 연극의 연출가를 자처한 것은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거나 혹은 안느를 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안느는 세실에게 동경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고, 한심한 나와는 다른 세계에 위치한 고상한 인물이다. 교양 있고 품위 있으며 미모와 기품을 겸비한 안느는 닮고 싶지만 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럽혀질 수 없고, 자신의 상상 속 이미지로 박제된 채 남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박제를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출가, 신이 되고자 하였다.

타인을 완전히 안다고 믿는 것, 나의 고정관념 속에서 벗어난 타인의 존재를 견딜 수 없는 것, 그러므로 그를 내가 원래 알던 모습으로 되돌려 가두려는 시도가 바로 세실의 연극의 연출 방식이다. 그렇게 세실은 안느를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 틀 안에 맞춰 재단한다. 무신론자인 세실은 ‘신의 뜻대로 운명이 흘러가게 하소서’라는 문구 아래 처음에는 자신의 우상 안느가 신이었던 것처럼, 나중에는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에 대한 불완전한 정보만을 가지고 있고, 완전하게 통제할 수도 없다. 세실도 안느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설의 말미에 안느에게 굴욕을 선사하고서야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하나의 물체가 아닌 살아 있는, 감수성이 예민한 한 인간을 공격했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세실의 환상은 깨졌다. 자신의 능력 과신, 안느에 대한 우상은 모두 어린 시절의 환상에 불과했다.

세실의 연극은 어느 커플도 구성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실패한 연극이지만 연출의 의도에는 충실했던 연극이다. 자신의 환상을 지키려는 연출의 의도에 따라 안느는 세실이 죽인 것이다. 세실의 우상 속 모습으로도, 자신이 연출한 연극의 인물로도 존재할 수 없어진 안느라는 인물은 극에서 사라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세실의 우상 속 모습을 지키기에 안느는 이미 나이 들고 지쳐 지조만을 지키고 있을 순 없었다. 안느 자신의 연극은 세실의 연극에 의해 무너졌다. 안느의 쓸모를 소모시킨 건 세실이다. 세실이 무대에서 인물을 퇴장시켰다, 자신조차도 인식하지 못 한 사이에.


그렇게 세실은 환상을 잃고 슬픔을 얻었다. 안느가 신이라는 환상에서, 그리고 세실 자신이 바로 신이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와 보니 자신은 안느를 무대에서 퇴장시킨 무자비한 연출가가 되었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슬픔은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힘이다. 슬픔은 진실이 어디에 존재하는 줄도 모른 채 방황하는 어린양을 들어 올려 진실이라는 거울 앞에 세워둔다. 거울 속에 비친 세실은 신이 아니라 그저 목자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양이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슬픔의 맛이 있지만 환상이 깨졌음에도 일상이 그대로 진행된다는 씁쓸함, 이것이 세실의 슬픔의 맛이다. 씁쓸함이 감도는 입을 다시며 세실은 이 환상의 연출직을 은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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