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역할 고정관념, 일상에서 깨어있어야 벗어날 수 있다
아침에 잠깐 폰이 먹통이 되어 서비스센터에 다녀왔다. 접수표를 받고 내 담당 기사를 확인하니,
어라?
여자????
다시 봐도 또 여자이다.
전자기기 수리기사 여자는 처음 봤다.
신기하면서도, 순간 '제대로 못 봐주면 어쩌지', '다른 기사분으로 바꿔달라 할까' 이런 생각들이 스친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감금 생활에서 풀려나온 최민식이 횟집에서 미도를 처음 보고 '여자는 손이 차서였나 따뜻해서였나' 하여튼 이러한 이유로 회를 뜰 수 없다고 하는 장면이 있다. 이런 장면이 떠오르면서, 나 역시 내심 '어떻게 여자가 폰 수리원이 될 수 있었지? 그것도 삼성에서?!', '급여는 똑같이 받으시나', '언제부터 이 일을 하신 거지' 등등,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기사님들 중에 이 분만 여자분이다.
바로 앞 의자에 앉아 대기하면서 하시는걸 보아하니 옆 직원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집중해서 만지고 뜯고 조립하고...
익숙한 번호를 부른다. 내 차례.
"어떻게 오셨나요?"
"폰이 멈추더니 꺼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뜨거워지기만 하고 정말 멈췄어요."
이리저리 돌리고 열어 보고 하시더니,
"과부하예요. 문제 될 건 없네요."라고 대답해주신다. 다시 원상태로 폰을 만져주신다. 별 수리할 것 없이 일어섰다. 유심히 보았는데, 내 것을 봐주시면서 내내 다른 폰을 해체, 조립하시는 손놀림이 보통이 아니시다.
"AS기사님 여자분은 처음 봬요."라는 내 말에
"그런가요." 라며 마스크 뒤로 말갛게 웃으시던 분.
생각해보면 기계를 다루시는 손길도 전문적이었고 설명도 친절하게 해 주시고, 무엇 하나 모자랄 게 없는데 난 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단지 '여자'여서였다.
단지 여자여서, 잘못 보는 거 아닐까 걱정하고 기사님을 바꿀까 불안해하고 급여는 어떨까 차별을 미리 생각한 것이다.
'여적여', 여자의 적은 여자라더니, 나야말로 진짜 여적여였다. 여성의 힘과 능력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한 채, '여자가 이런 데에?', '이런 일을 여자가?'라고 사고를 한정해버린 나 같은 사람이 여성의 적이다. 머릿속으로만 여성의 주체성, 젠더로서 여성의 평등, 여성으로서 느끼는 불합리가 어쩌고저쩌고 떠드는 사이, 사회가 굳혀버린 나의 관념은 여성 기사분을 의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죄송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무치게 동경하게 되었다. 더불어 여자로서 참 괜찮은 직업 같단 생각도 들었다. 좀 더 많은 여성이 이 직업을 업으로 삼고자 도전해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다고 느꼈다.
딸 셋을 키우는 엄마로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사회에서 직업적 평등을 스스로 인식하고 경험하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내가 무엇을 한다고 그렇게 될 수 있으려나, 직업 선택에 있어 '여성'이 자신의 가치를 결정짓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려면 어찌해야 하나. 전형적인 전통적 사고방식을 떠받치는 딸 셋 아빠는 어찌해야 하나.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시대는, 분명 나와는 다를 것이다. 직업 선택에 있어 '여성'이라서 제한받는 상황은, 적어도 나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다. 오늘 만난 그분이 명확한 증거이다. 그 분을 만난 것이, 딸 셋 엄마로서 너무나도 영광스럽게 느껴진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