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의 일기, 상강(霜降)
서리, 발음만으로도 입술이 추워지는 단어이다. 서리가 내리는 시기라는 뜻의 절기, 상강(霜降). 가을의 절정인 날씨 속에 단풍도 절정을 이루고, 사방 어디서도 '쾌청'이란 말을 듣기 쉬운 때이다. 밤의 기온이 낮아져 아침과 새벽녘에는 서리가 내리고, 때론 얼음이 맺히기도 한다.
내 육아의 고됨의 절정인 나날일 때, 아침 서리를 헤치고 온 얼굴이 있다. 셋째 출산 후 매년 서리가 내릴 때면 내 삶의 외연이 넓어지는 이유, 그 얼굴 때문이었다.
첫째 조리원 퇴소 날 집은 어수선했다. 어쩌다 7개월에 걸쳐 끌게 된 이사가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아이가 잠드는 대로 틈틈이 작은 짐들을 정리했다. 이렇게 움직여도 될까 싶었지만, 자잘한 짐들은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수유를 하고 트림을 시키고 재우고 짐을 정리했다.
친정엄마는 다음날 와 주었다. 이틀 조리를 도와주고 갔다. 모두가 그렇지만 엄마에게도 역시나 먹고사는 일은 그 무엇에 우선이었다. 다행히 미역국이 많아 나에게 '먹는' 일은 해결되었다. 이틀 후에 다시 엄마가 왔다. 이런 식으로 세 번을 와주었다. 첫째 조리의 끝이었다. 물론 너무나도 졸린 날이나 부득이하게 외출해야 하는 날에 전화하면 두 말없이 와주었다. 그러나 그 일이 끝나면 엄마는 엄마의 삶으로 돌아갔다.
친구의 말이 자주 떠올랐다.
"첫애 낳고 얼마 안 돼 크리스마스였거든. 그 밤에 하얗게 눈이 내리는 거야. 세상이 조용하고 행복해 보였어. 그런데 나는, 안 자는 신생아를 안고 울고 불고 하다가 두 시간 만에 겨우 재운 거지. 잠이 든 애를 안고 창밖을 보고 있었어. 세상이 다 행복하고 나만 불행하더라. 뛰어내리고 싶었어. 하얀 눈이 내리는데, 세상의 행복에 오점을 남기고 싶어지더라구."
나의 창밖은 초여름이었다. 가끔 술을 마시고 소리 지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불행을 알 바 없었으나, 어찌해도 내가 가장 불행한 것은 뻔했다. 그렇게 대부분 여름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첫아이 조리 기간을 보냈다.
둘째 조리원 퇴소 날 집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조리원에 있는 동안 첫째를 봐주셔야 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일주일을 더 집에 계시며 아이를 봐주시고 씻겨주시고 식사를 챙겨 주셨다.
"나는 3주 했다. 할 만큼 했어. 무얼 바라거나 받으려고 한 건 아니다. 돈 같은 건 안 줘도 되니 예쁘고 건강하게만 키워."
시어머니는 진심이었다.
"너 혼자 할 수 있어. 나도 혼자 했어. 마음 단단히 먹기만 하면 돼. 시간 금방 가."
3주의 조리기 간이 끝나고 내 앞에 놓인 건 독박 육아였다. 어머님이 가심과 동시에, 남편은 2주짜리 훈련을 갔다. 기저귀도 떼지 못한 29개월과 태어난 지 3주 된 아이의 인생이, 출산한 지 겨우 3주 지난 내게 달려 있었다. 골반은 틀어져 있었고 무릎은 아팠으며 오로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 아이 둘을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미역국을 끓였다.
훈련을 마치고 온 남편은 일주일 있다가 부대 변경으로 다른 지역으로 갔다. 그 부대 숙소가 해결되지 않아 한동안 주말부부를 해야 했다. 둘째 100일까지 그렇게 혼자 아이 둘을 키웠다.
셋째만큼은 조리다운 조리를 하고 싶었다. '다들 친정집에서 최소 100일은 있다가 온다는데,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집에서 6개월은 같이 있어 준다는데, 나는 이게 뭐야' 같은 생각은 그만하고 싶었다. 친정엄마는 생계를 마다할 수 없었고, 시어머니는 셋째 조리원 기간도 아이 둘을 봐주셨다. 두 어른께 무얼 더 바라는 것은 염치없는 것이었다.
'산후도우미'를 검색했다. 셋째부터는 국가 지원이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 아파트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는 분이 있었다. 무조건 해보고 싶었다. 나도 남들 다하는 조리 해보자, 마지막 출산인데 내 몸 좀 아껴 보자. 그분에게 조리한 엄마들이 '한 달'을 권했다. 그래도 6주는 해야 조리하는 것 같죠, 마지막 출산인데 돈 아끼지 마세요, 거기 돈 아끼면 나중에 산후풍으로 돈 더 많이 나가요.
셋째 조리원 퇴소 날 저녁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아침 뵙겠습니다. 아이랑 좋은 밤 보내세요."
엄문자 이모님과의 첫 통화였다.
9시 출근이신데, 8시 40분에 도착하셨다. 이모님이 들어오시는 모습을 시어머니는 유심히 보셨다. 방에서 아이를 재우는 나에게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다리 휜 거 보니 일이나 제대로 하시려나 모르겠다, 53년생이면 나보다 한 살 적은데, 걱정이다. 저렇게 나이 드신 분이 올 줄 알았으면 내가 했지.'
휜 다리와 굽은 등을 보며 나 역시도 걱정이 되었다. 아이를 제대로 안으실 수는 있으실까, 아이 씻기다 떨구시는 건 아닐까. 그래도 워낙 평이 좋으셨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믿고 맡기는 것뿐이었다. 나의 걱정이 기우로 바뀌는 데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익숙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자고 있는 막내를 확인하고 빨래를 돌리더니, 나의 부탁대로 첫째와 둘째의 어린이집 등원을 다녀왔다. 나는 아침을 먹었고, 좀 쉬고는 점심을 먹었다. 그사이 청소와 점심 식사 준비가 끝나 있었다. 이모님은 점심으로 집에서 갈아 오신 토마토를 마셨다. 덕분에 처음 보는 사람과 함께 식사해야 하는 어색함을 피할 수 있었다. 식사 후 간단히 전신 안마를 해주셨다. 모유 수유를 하는 동안 이모님은 빨래 정리와 설거지를 마치고는, 아이 목욕 준비를 했다. 내가 한 일은 이모님의 주름이 깃든 손 안에서 깨끗해지는 아이를 보는 것이었다. 이모님은 씻고 난 셋째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첫째와 둘째 하원을 나갔다. 아이들이 오자 저녁을 먹이고 우리 부부의 저녁식사를 차려두고는 퇴근했다.
이모님은 한 달 동안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일하고 아이를 돌봤다.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몸조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모님은 변함없는 자세로 일하셨으나, 아이들을 예뻐하는 마음만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나는 아기들이 좋아서 이 일이 참 좋아요,라고 말하는 이모님의 표정에는 진심이 있었다. 그 마음을 조금만 떼어 오면 나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랑을 받아서인지 아이는 보채지도 않고 잘 자랐다. 첫째와 둘째에게도 ‘좋은 할머니’가 한 명 더 늘었다. 내게 없던 그것, '모성애'가 얼굴을 가진다면 저런 얼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식사가 가장 좋았다. 먹고 싶은 것은 말씀드리면 무엇이든 쉬이 식탁에 올라왔다. 비밀리에 친정엄마와 연락을 한 건지 하나 같이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집에서 농사를 지어서요, 라며 매일 무공해 식재료를 들고 오셨다. 하루는 알감자를 한 박스 갖고 오더니 다음 날은 당근이 두 손 가득이었다. 대파와 가지가 집에 쌓였다. 덕분에 최소한의 장보기로 나는 건강한 산후식을 매일 챙겨 먹을 수 있었다.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휜 다리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내가 묻지 않는 이상은 사담은 하지 않는 이모님을 불렀다.
"저기 이모님."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보고 가벼운 미소로 예,라고 대답했다. 그 모습이 좋았다.
"산모와 이야기하는 거 안 돼요?"
"대답은 괜찮지만, 먼저 말을 하는 거는 안 돼요. YMCA 규정이에요."
"그렇구나, 이모님. 어쩌다 이 일을 하시게 된 건지 궁금해서요. 이 일을 하시기 전엔 무슨 일을 하셨어요? 평생 이쪽 일을 하신 거세요? 결혼하실 때부터요?"
이모님은 고무장갑을 빼지 않은 채 식탁의자에 걸터앉았다.
"옛사람들이 그렇듯 얼굴 한 번 보고 결혼을 했지요, 그 해부터 40년 넘게 김장을 매년 250포기를 해요. 이젠 좀 줄이고 싶은데, 이 집 저 집 챙길 생각 하면 줄일 수가 없어요."
"식당 일을 오래 했어요. 삼겹살집. 고기 구워 두 아들 대학까지 보냈어요."
"시어른 두 분이 치매에 걸리셔서 8년을 간병을 했어요. 나는 고생한 게 없어요, 어르신들이 아프느라 애썼지. 쓸데없이 소문이 나서 효부상을 받게 됐어요, 나는 그런 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상 받는다고 어르신들이 돌아오나. 집에서 장례를 했어요. 3일 동안 잔치를 크게 벌였어요. 3일을 안 자고 앉지 못하고 울고 웃고 했어요. 어른들 잘 보내드렸어요."
"아들 두 놈 장가보내고 이 일 하는데, 천사 같은 아기들을 매일 보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천사들을 매일 보는 데 돈까지 줘요. 이것보다 좋은 일이 없어요."
조용히 들었다. 중간중간 어머, 라든가 세상에, 같은 추임새는 넣었으나, 나 같은 가벼운 인생이 끼어들 틈새는 없었다. 위인전기 따위에서 얻지 못한 감동이, 나직나직한 목소리에서 쏟아졌다. 위대한 70년 인생은, 말을 마치고는 미소 한 번 짓고 흘러내린 고무장갑을 다시 끼웠다. 딸그락 소리에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묻었다. '존경'이라는 두 글자가 마음속에서 단단해지고 있었다.
겨우 애셋 낳은 인생이, 그것 말곤 한 것 없는 인생이 지금까지 힘들다고 울고불고 해왔던 투정이 하찮아졌다. 육아 우울이나 일상에서 오는 먹먹함 같은 건 가소로워졌다. 교과서에서 많이 보던 '한(恨)'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어찌 보면 한스런 일생인데, 한스러운 감정이 전혀 없었다. '인생이 심심하고 지루해서 우울해하는 거야,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봐, 우울할 틈이 어딨어'라는 말과 그런 말을 하는 이를 미워했던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찌 살아야 저렇게 나이들 수 있을까, 순간 고민이 되었으나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이모님의 뒷모습이었다. 설거지를 하는 어깨가 가벼웠다. 어떻게 살긴, 내 앞에 놓인 일들을 받아들이고 가벼운 몸짓으로 해내면서 매일을 움직이며. 나와 주변을 한탄할 시간에 나의 일을 미루지 않고 해내며. 일상의 군더더기를 없애며, 미련이 남는 것들을 해치우며. 몸과 주변과 마음에, 쌓는 것(業)을 그만두며 그렇게.
마지막 날 받은 선물은 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내가 좋아하는 여러 밑반찬들을 집에서 직접 해오셨다. 고사리 볶음, 열무김치볶음, 고춧잎 무침, 양파절임, 새우볶음.
"ㅇㅇ엄마 나 없어도 이 정도면 삼사일은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버리지 말고 남김없이 다 먹어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귤을 한 박스 사 왔다. 밤에 캐오느라 혼났네, 라며 꺼내는 대파와 고구마, 무는 신선했다.
"아이고, 내 새끼. 이 놈 생각나서 며칠을 못 자겠네. 잘 있어, 아가. 할미 보고 싶다고 울지 말고, 잘 자고 잘 싸고. ㅇㅇ엄마도 울지 말고요. 난 몰라, 내뺄 거야."
마지막 퇴근, 문 앞에서 황급히 뒤도는 이모님의 눈도 빨개져 있었다.
이모님이 오시지 않던 다음날 새벽부터 아이는 울어댔다. 아이를 안고 재우려고 거실로 나왔다. 창문가에 서기만 해도 온도가 달랐다. 창가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 있었다. 상강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11월 초, 이모님께 연락이 왔다.
"다음 주 토요일에 일 없으면 우리 집에 놀러 와요. ㅇㅇ엄마네 한 번 밥 좀 먹이고 싶어서 그래요."
차로 20분 정도 걸렸다. 위치도 풍경도 집도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2년 전 리모델링했다고는 하지만, 구조는 영락없는 옛날 집이었다. 마당은 250포기 김장을 하기에 충분히 넓었다. 뒤로 넘어가는 길과 연결되는 산이 모두 이모님 땅이라고 했다.
"8,000평이에요. 이 동네 사람들은 다 만평이 넘어요. 그냥 먹고 살 정도예요."
도시 사람들이 30평과 구름에 닿을 듯 올라가는 건축물에 목을 매는 동안, 시골 사람들은 땅과 산에 터전을 잡고 평생의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땅에 갖는 자부심을 조금은 알 듯도 했다.
미역국, 잡채, 불고기, 생선구이, 닭볶음탕, 나와 남편이 잘 먹었던 반찬 10여 가지가 상을 가득 채웠고 자리가 모자라 조금 작은 상을 하나 더 펴야 했다. 한 끼만 먹을 양이 아니었다. 먹어도 먹어도 술술 잘만 넘어갔다. 아이들은 밥을 먹고 집 뒤로 가서 도토리를 줍고 놀았다. 나는 막내를 젖을 먹이고 재웠다. 친정은 있어도 친정집은 없는 내게, 몽글몽글하게 뭉쳐지는 감동은 '나도 이런 친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에 섞여 그 크기를 키웠다.
저녁에 친정식구들이 오기로 해서, 저녁까지 준비했다는 식사는 할 수가 없었다. 이모님은 모든 반찬을 다 싸 주었다.
"ㅇㅇ엄마 애 키우느라 밥할 시간도 없는데 이거라도 해서 오늘내일 먹어요. 이 정도면 몇 끼 먹을 수 있을 거야."
옛날 사람이라 늘 먹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음식을 챙겨주는 손도 마음도 하나같이 친정엄마 같았다. 울컥하는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이모님이 남편의 손을 잡고 나가신다. 한참을 있다가 돌아온 남편의 손에 대파가 한 다발이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이런 거뿐이라... 참, 할머니 티를 안 내려도 해도 어쩔 수 없다니까."
무엇도 모르는 아이들은, 할머니 집을 떠나며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할머니, 다음에 또 우리 집 와서 살아요."
앙드레 말로의 소설 '인간의 조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을 만드는 데는 10개월이 걸리지만, 사람을 완성시키는 데는 60년이 걸린다'. 막연하게만 끄덕거렸다. 멋진 문장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문장의 참된 뜻을 떠올리게 된 건, 이모님을 만나고 난 이후였다.
10개월이 걸려 만들어진 나의 아이를, 60여 년에 걸쳐 완성된 인격체를 가진 이가 보듬어 주었다. 나에게 생명을 다루는 일은 피와 살을 내주고도 피폐한 일상만 돌아오는 '노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그에겐 '천사를 키우는' 일이었다. 생의 전체를 바라봄에 있어 진정 가치로운 일이 무엇인지, 손길 하나와 낮은 자세와 말투로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 이모님과 함께 한 시간은 '인간 대 인간'의 시간이었다. 나는 본래 아이 같고 미숙한 면이 많아 나보다 어린 이들과 잘 어울렸다. 유치하고 시시껄렁한 대화를 즐겼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어려워하고 힘들어했다. 무언가를 배워야만 할 것 같았고 내가 못난 사람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 같아 싫었다.
그러나 이모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부모님의 연세를 지니고도 아이 엄마로서의 나의 인격을 그대로 존중해주었다. 갓 태어나 초점도 맞지 않는 아이를 '자체로서의 인격'으로 대우하고 아껴 주었다. 그런 마음이 어디서부터 발현되는지 궁금하여, 이모님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유심히 살폈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대하는 모든 손길에서 허투루 대하는 것이 없었다. 청소하고 빨래를 개고 밥을 짓는 손놀림은 가벼웠으나 쉼이 없었다. 주변의 것들을 미루고 핑계부터 찾는 나의 것과는 달랐다. 일상에서 먼지 없는 환경을 유지하니 개운하고 빈 곳이 많은 마음은 사람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남는 시간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내주는 삶이었다. 주말마다 쉬지 않고 장로님과 집사님들 댁을 방문하며 요리를 하고 청소를 했다고 하셨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을, 주변 거동이 불편하신 이들의 일상으로 들어가 먼지가 없게 해 주셨다. 지역 사회와 신앙에 바치는 일상이었다.
이모님의 일만 봐도 그러했다. 평생의 과업을 마쳤다 여기고는 여생을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돌보는 데에 쓰고 있지 않은가. 정갈한 삶, 내어주는 삶이 바탕이 되는 인격을 갖게 되면 사람을 대하는 데에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로 대할 수 있게 됨을, 이모님은 '산후도우미'의 명찰을 달고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이모님은 내게 이것을 알려주려고 당신 삶의 한 달을 내어주셨다.
두꺼운 경전과 신성한 어휘들을 도구로 존엄의 옷을 입은 종교가 태어나기 전, 어쩌면 인류 최초의 종교는 내 산후도우미 이모님의 모습이지 않았을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 삶의 주변을 정갈히 하는 손길, 마음과 실천이 같은 모양으로 이어지는 간결한 행위, 모든 이를 존재 자체로 아끼는 정신. 어쩌면 이런 단순한 가르침이었던 것은 아닐까.
*절기 설명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참조하였습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