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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Sep 10. 2021

입동(立冬), 사랑의 방식

절기의 일기, 입동(立冬)

  24절기의 모든 계절은 '입(立)'으로 시작한다. 겨울 역시 그러하다, 입동(立冬)으로 겨울을 알린다. 입동의 후는 설(雪)이나 한(寒) 같은 한자들로 절기가 이어진다. 

  입동은 겨울이라기에는 아직 가을의 색이 짙지만, 절기의 계절들은 늘 그랬다. 눈이 내리는 그날 입춘(立春)을 맞이했고 찌는 더위 속에서 입추(立秋)를 받아들여야 했다. 가을의 끝자락에 계절을 앞당겨온 입동의 그날, 우리 가족이 떠난 여행은 절기와 다르게 따스했다.


입동






  "회사 생활이랑 똑같아. 3,6,9 조심해야 돼. 3년에 한 번씩 위기 온다. 9년 넘기고 10년 차 되면 살만해지는 것 같아. 어떤 의미에서든 살만해져. 기억해, 결혼도 369야."

  신혼의 친구에게 해줄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거슬렸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슴에 남았다. 보란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야지. 남편에게 모든 것을 맞추고 나는 물 같은 사람으로 살 작정하고 한 결혼이라, 위기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려울 게 뭐 있어. 나는 원래 물 같이 상황에 따라 잘 변하고 잘 맞추는 사람이니 문제없어. 우리의 결혼 생활에 위기 같은 건 없다고.

  3년 차의 위기는, 위기라고 느낄 새도 없이 지나갔다. 첫째가 태어나 허둥지둥 육아와 우울에 빠져 지냈다. 위기였으나 위기인 줄 몰랐다. 그러나 6년 차에는 달랐다. 둘째가 태어난 다음 해였다. 나는 이틀에 한 번씩 아팠고 자주 링거를 맞았으며, 집은 감옥이었고 우울할 새도 없이 울었다. 울어서 우울한 지 우울해서 울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울다 보면 우울이 느껴졌다. 우울이 느껴지면 눈물이 났다. 그 와중에 둘째는 컸다. 첫째와 달리 온순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었다. 

  남편은 나의 우울을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남편과 있는 시간은 늘 바빴다. 저녁을 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 둘을 씻기고 입히고 재우느라 우울을 표현할 새가 없었다. 그러나, 그래서 더 우울했다. 전날 묵혀둔 우울을 낮에 혼자 풀었다. 방법은 눈물뿐이었다. 1년을 그렇게 살았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보다 우울이 자라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벗어나는 방법 같은 건 없었다. 그 시절 나를 가득 채운 두 단어는, 아니 그저 그 두 단어뿐인 삶이었다. 무기력과 우울이었다. 

  둘째의 돌이 지났다. 나의 우울도 1년을 꽉 채웠다. 일상의 곳곳에서, 생활의 틈새에서 우울은 새 나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밝은 사람이라 좋아해서 결혼했는데, 늘 눈물에 눈이 부어 있었다. 무엇을 해도 웃지 않는 아내였다. 보기가 거북스러워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뭐가 그리 힘드냐, 내가 뭘 해주면 되냐, 똑같이 반복되는 질문에, 애 키우는 거 자체가 힘들다,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너무 힘들다, 그냥 아이를 좀 안아줬으면 좋겠다, 똑같이 반복되는 대답이 집을 채우기 시작했다. 한숨과 고성과 침묵이 순번을 지켰다. 

  친구의 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6년 차 위기였다. 이대로는 살 수가 없었다. 생활로서 산다는 것,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 모든 면에서 살 수가 없었다. 죽을 용기도 없으면서 매일 죽는 생각을 했다. 죽는 모든 방법은 고통스러울 것만 같아서 무서웠지만, 죽는 모든 방법을 매일 떠올렸다. 그런 나를 어디에도 드러내지 않았다. 기껏 육아가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큰 소리로 웃어댈지, 그 얼굴들을 마주할 자신도 없었다. 내 나약함을 들키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겉보기에 어떤 문제도 없는 나의 삶이라 더욱 그랬다. 공무원 가족, 알뜰하고 가정을 아끼는 남편, 건강하신 양가 부모님, 좋은 주거 환경, 예쁜 두 딸. 그 어디에도 우울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드러내지 못한 나의 진짜 속사정은 내 안에서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남은 힘이 별로 없던 어느 때 그렇게 위기는 폭발했고 이혼이나 자살 중에 선택해야 하는 며칠이 이어졌다.

  일의 사사건건을 따지지 않는 그래서 누구의 잘못이 더 컸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감이 없는 나와 달리 남편은 내가 이러이러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다. 용서를 받아들이거나 하는 절차는 없다. 일방적인 사과가 화해인 우리 부부였다. 그 주말 남편은 남편답게 일방적인 여행을 계획했다. 나와 아이들은 차에 올라 그의 방향으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입동(立冬)의 바람을 가르고 도착한 곳은 익산이었다.

 

  제7공수특전여단에 있을 때 좋은 추억이 많았다는 익산이라고 했다. 맛집도 많고 갈 곳도 많다고 했다. 부부의 위기가 가시지 않은 내게 익산의 바람은 그저 남부의 늦가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나만의 시간, 나만의 휴식인데, 남편의 사랑의 방식은 아니었다. 함께 하며 아내에게 무엇이든 - 추억이든 선물이든 - 주는 것이었다. 

  받을 마음보다 힙시트로 인해 어깨 통증이 더 컸던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익산 보석대축제 현장이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지만, 내게는 금색 은색 반짝이는 쇠붙이일 뿐이었다. 10킬로가 넘은 아이가 갖는 중력은 시간이 갈수록 어깨 통증을 심하게 했지만, 한 바퀴 둘러본 남편은 한 바퀴 더 돌아보자고 했다. 

  남편의 그런 마음을 참으로 잘 알 것만 같았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 그래서 더욱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 앞에서, 제발 나를 혼자 두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마음을 드러내거나 말로 표현하기에는 눈물이 앞서는 유약한 심정의 아내였다. 9년 차인 지금도 그런 아내이기도 하다.  

  그냥 입구 문 정면에 있는 부스에서, 적당히 심플하고 적당히 합리적인 가격의 팔찌를 골랐다. 목걸이, 귀걸이 세트의 가격 앞에서 고심하는 남편의 표정이 팔찌를 향하게 했다. 아이를 안는 일상이라 목걸이, 귀걸이는 상상도 해서는 안 된다. 깔끔한 팔찌를 샀다. 주문 제작을 하고 나오는 남편의 얼굴에 뿌듯함이 생겨났다. 그거면 됐다 싶었다. 나와 남편 모두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거면 됐다. 그거는, 9년 차인 지금도 나의 왼팔에 있다. 지금도 볼 때마다 '잘한 선택이다, 이거여서 됐다' 싶은 팔찌이다.

  다음 목적지는 미륵사지 석탑이었다. 역사에 해박한 남편다운 행로였다. 역사에 흥미가 없는 나에게 가이드를 자처했다. 폐사지가 넓어 아이는 유모차에 태울 수 있었다. 아직은 가을의 공기여서 하늘이 맑고 높았다. 가정의 위기가 익산의 파란 하늘색으로 인해 조금 희석되었다. 

  교과서에 보던 미륵사지 석탑은 생각보다 컸다. 규모에 놀랐고 웅장함에 괜스레 압도되었다. 남편의 끊임없는 부연 설명이 좀 더 웅장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았다. 그랬다. 그 설명조차 남편의 사랑의 방식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자신 안의 모든 것을 꺼내어 아내에게 바치는, 사과이자 사랑이었다. 표현이 서툰 아내는 설명의 중간중간 '오'나 '아아', '그랬군요' 같은 추임새만 더했다. 이 사람이 최선을 다하고 있구나, 내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더 드러내고 싶었는데 그러기에 추임새들은 한 글자 두 글자, 짧은 문구였다. 그래서 아쉬웠다. 

  파란 하늘을 뒤에 두고 초록 잔디를 뛰는 아이들을 사진 찍어 주고, 울음이 넘치는 나날을 건너와 눈이 부은 아내를 남편은 찍어 주었다. 남편의 취미는 가족을 모델 삼아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사진 안에 사랑을 담는 것 또한 그의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그 여행은 그에게 있어 일종의 '베푸는 패키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위치에 서서 원하는 포즈와 표정을 취했다. 다른 말은 않았다. 쉬고 싶다거나 사진 찍을 기분이 아니라거나 혼자 있고 싶다는 말 같은 건 여행의 테마에 어울리지 않았다.

  남편이 맛집이라고 37번쯤 말한 것 같은 추어탕집 앞에 주차를 했다. 몸이 뜨거워 추어탕 같은 음식은 피하는 남편이었지만 아내를 위해 한 그릇을 비웠다. 땀으로 옷이 젖었지만 괜찮단다. 그런 남편을 보며 맛도 모른 채 먹었다. 베푸는 패키지였기에 받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받는 사람은 여행 내내 무리를 해서인지, 받기만 하는 패키지에 눌려서인지 소화 기관이 작동을 멈췄다. 추어탕은 거의 남김없이 거슬러 올라왔다. 미안하다고 연신 말하는 나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는 남편의 얼굴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어두운 밤인데 남편은 대형마트로 향했다. 속을 비워내서 괜찮아진 나를 위해 약을 사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소도시의 주말 밤, 문을 연 약국은 대형마트 내 약국뿐이긴 했다. 약을 먹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의 여행 주제를 따라야 했다. 여행의 주인이 아픈 것은 안 될 일이었다. 소화제를 빨리 털어 넣었다. 빨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종일 일정에 지친 4살과 돌이 갓 지난 아기는 울음으로 보챘다. 육아에 서툰 아빠는 짜증을 냈고, 아이들의 울음은 어떻게든 나의 몫이었다. 숙소만 가면 된다, 숙소만 가서 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군 숙소만 믿고 왔는데, 방이 없다고 한다. 밤이 늦은 익산의 시내를 몇 바퀴를 돌아도 숙소다운 숙소는 보이지 않았다. 10시가 넘었고 아이들은 차에서 잠이 들었다. 관광지 근처는 무엇이라도 있지 않을까, 다시 미륵사지 근처를 가 보았지만 숙소는커녕 가로등도 많지 않았다. 남편이 기억을 더듬어 간 저수지 근처에도 낚시터만 있을 뿐 잠을 잘만한 곳은 없었다. 밤의 저수지는 밤보다 어두웠다. 그 저수지보다 내 마음이 더 어두웠던 것은, 단지 여행의 피로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저수지를 벗어나 다른 도시로 가자고 말할 때는 이미 날이 바뀌어 있었다. 남편의 패키지가 헝클어졌지만, 그래서 남편은 더욱 미안해했고 최선을 다했다. 남편의 최선을 나는 참으로 잘 알았다. 그래서 그저 침묵했다. 침묵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도 했다. 

  가로등도 없는 길에서 거짓말 같은 모텔을 보았다. 귀신이 있어야 정상일 것 같은 모텔이었다. 3시간이 넘는 헤맴 끝에 처음 찾은 '잘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자요, 전 진짜 괜찮아요, 여기서 자요. 일부러 제발은 뺐다. 제발 여기서라도 자고 싶었지만 남편의 기분을 헤아려야 했다. 더 좋은 숙소를 구하고 싶은 남편의 마음을 알기에 '제발'은 빼야 했다. 

  5만 원 카드 영수증과 방 열쇠를 건네주는 주인의 손은 사람의 것이었다. 귀신은 아니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자야 해서 방을 좀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냐는 말에 주인의 끄덕임이 보였다. 귀신은 아닌 행동 같았다.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안심하고 방으로 향했다.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붉은 조명, 알 수 없는 냄새, 티브이, 침대, 모서리가 벗겨진 탁자와 때가 탄 작은 소파. 이불을 더 얻어와서 아이들을 바닥에 눕혔다. 남편은 방에 들어서기 전부터 미안하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 정말 괜찮았다. 잘 수 있는 곳을 발견한 자체로 다행이었으나, 남편이 생각한 숙소는 이 것이 아니었다. 방바닥이 뜨거워지기 시작해서 남편의 미안함은 멈출 수 있었다. 아이들이 깨서 울었다. 주인에게 온도를 낮춰 달라 하니, 그럼 보일러를 아예 꺼야 한단다. 입동의 날씨에 보일러를 끌 수는 없었다. 네 식구는 그렇게, 삐걱거리는 모텔 침대에서 밤을 보냈다. 

  남편은 동이 트는 것을 보고 우리를 급히 깨웠다. 빨리 여기서 나가요, 집에 가서 편하게 자요 우리. 전날 씻지도 못하고 잠든 나는 집에 그리웠다. 아직 자고 있는 아이들을 안고 나오는 방은 여전히 절절 끓고 있었다. 남편이 틀어 준 차량 히터에 노곤해졌다. 남편이 또다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며 차 안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베풀기만 한' 패키지는 그렇게, 나쁘지 않게 마무리되었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은 따뜻해지고 있었다. 차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집에 도착할 때까지 깨지 않았다. 입동의 날씨 속에서도 마음이 따뜻해서였을 것이다.  






  'A man who says sorry even when he is right is called HUSBAND' 남편의 카톡명이다.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결혼 9년 차여서 참았다. 남편이 무얼 해도 거슬리는 시기이고 그렇기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저께도 남편에게서 들었다, 미안하다는 말. 주말부부로 거의 1년을 살고 합가(?!)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약간의 싸움 끝에 '남편이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라고 했다. 또다시 똑같은 화해이다. 사과와 동시에 포옹, 그 전의 모든 감정은 한순간 정리되어야 하는 사과. 그래서 나는 또 '무얼 잘못했냐, 내 마음이 어떤지 알고 있느냐' 같은 말은 하지도 못한 채 일상으로 돌아왔다. 싸우기 전과 똑같이 밥을 먹고 식탁을 치우고 아이들을 씻겼다. 

  결혼 9년 차여서, 무엇이든 조심해야 하는 시기여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남편이 무얼 잘못했는지, 남편이 왜 잘못했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싸우게 되었는지. 그리고 알게 되었다, 참으로 단순한 그 사실. 그 모든 대상, 싸움의 또 다른 주체, 다름 아닌 나였음을. 

  모든 일의 잘못은 서로에게 있었다. 남편이 잘못을 한 순간 그 잘못을 더 크게 키운 것은 나였다. 내가 잘못한 순간 그 잘못을 감정적으로 그르친 것은 남편이었다. 어느 순간도 일방적으로 잘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모든 잘못의 시작을 남편에게만 향하게 했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윽박질렀다. 너는 잘했냐고 하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에서 '당신만큼 나쁘지는 않았어'라고 해도 입으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의 침묵에 남편이 받아 들 수 있는 답안 역시 침묵뿐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복수였다. 결코 나의 속내는 드러내지 않을 거야, 나를 알 수 없게 만들어서 당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할 거야.

  그리고 그 복수는, 똑같이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내 안에서 맴 돈 말들은 내 안에서 썩어 들어갔다. 우울이니 무력감이니 하는 것의 영양분을 제공한 것은 나였다. 남편이 열어 두었던 모든 방식의 대화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차단한 것은 나였다. 싸울수록 투명해진다는 유명 작가의 책 제목에 끄덕거렸지만, 정작 싸움을 피해서 우리 관계를 불투명하게 한 것은 나였다. 모든 잘못이 남편에게 수렴하도록 상황을 만든 것도 나였다. 사실 모든 잘못, 그러니까 갈등을 회피하기만 한 잘못은 나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에게 먼저 사과를 하게 한 것도 나였다. 3년 차, 6년 차, 그리고 9년 차 계속되는 위기의 모든 시작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럼에도 늘 먼저 'sorry'를 택하는 것은 남편이었다. 그가 'right' 할 때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남편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먼저 표현하는 것은 늘, 남편이었다. 이야기 좀 하자고 하는 것도, 아내의 침묵에 어쩔 줄 몰라하는 것도 모두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세상에서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이다. 부부이다. 위기를 헤쳐갈 유일한 주체들, 남편 그리고 아내이다. 

  사실 나는 매우 아주 엄청 잘, 모든 부사를 동원해도 부족할 만큼 이해하고 있다. 늘 주고자 하는 남편의 마음, 주고도 미안하다고 하는 남편의 마음, 그것이 남편의 사랑의 방식임을. 그래서 더 묻지 않고 요구하지 않고 그 마음 그대로 받아들여 일상으로 회복하는 것, 그것이 아내의 사랑의 방식임을 아마 남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랑의 마음만큼은 같다, 사랑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것마저 서로 알고 있기에 오늘도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다. 그것이 부부이고, 그래서 부부이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9년 차가 끝나가고 있다. 살만해지고 있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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