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어느 날은 가을 같다가도 어느 날은 '진짜 겨울이 오려나 봐' 정도의 기분이 든다. 그러다 소설(小雪) 즈음이면 정말 '진짜 겨울이 오긴 왔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겨울의 맛을 내는 간식거리들, 이를 테면 군고구마나 어묵, 붕어빵들이 자리를 잡고 계절을 알려 온다.
절기의 이름답게 첫눈이 들뜸과 설렘 혹은 구구절절했던 사연들을 이끌고 온다. 스산하고 처연한 절기 앞에서 나는, 무언가 결실을 맺어야만 했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나이 앞에 '3'을 달기 전에 어떤 성과를 얻어야만 했다. 마지막 20대의 나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내가 나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결실을 이루고 싶었다.
소설
'수영장'이라는 곳이 우리 집 근처에 있는지 처음 안 것은, 국민학교(그 시절 용어이다) 2학년 때였다. 수영장, 티브이에서만 보긴 했지만 뭐, 별 거 있겠어. 물이 있고, 놀면 되는 거지. 친한 친구가 가자고 해서, 그날로 엄마한테 말해서 수영복도 샀다. 재미있게 놀기만 하면 된다.
집 근처 중학교에 있는 수영장이었다. 친구랑 웃으면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친구는 탈의실에서 나가자마자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나도 물 곁으로 갔다. 발가락을 넣어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풍덩. 풍, 얽. 물이 입 속으로, 헙. 살려. 살, 살려. 업 웁, 퍼, 읍. 뭔가 손에 걸렸는데, 아, 합, 합. 발이 안 닿아. 땅이 없. 풉. 꼬르륵. 살려 줘. 살면서 '살려줘'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 날이었다. 살려줘, 를 많이 했는데,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물이 계속 입으로 들어왔다. 손에 잡히는 게 없다. 가라앉는다. 이러다 내가 죽는구나, 엄마 아빠 미안. 꼬르륵, 하는데 누군가 내 손을 덜컥 잡았다. 질질 끌려 나오고 보니, 아까 내가 발가락을 집어넣은 그곳 바로 옆이었다. 하아, 살았다. 엄마 아빠 나 살았어. 좀만 기다려, 집에 갈게.
"수영도 못 하면서 이런 데 오고! 다신 수영장 오지 마!"
나를 살려준 은인이었는데, 얼굴도 못 봤다. 쪽팔리고 무서워서 친구고 뭐고 바로 탈의실로 들어가 옷만 갈아입고 뒤도 안 보고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쉬지 않고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다짐했다. 죽을 때까지 다시는 수영장 안 가, 다시는.
몸치, 까지는 자존심이 상하고, '물'치 정도로 해두어야겠다. 방향치, 길치, 기계치, 물치. 나를 구성하는 4대 요소를 말하라 하면, 자신 있게 저렇게 대답할 것이다. 똑같은 곳을 열 번을 가도 한결같이 길을 잃는 내가 믿기지가 않아, 내가 정말 헤매는지 숨어서 본 친구가 '이제 나는 네가 하는 모든 말을 믿기로 했어'라고 말했다. 신촌역 1번 출구는 왜 갈 때마다 변해있는 건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에 버금가는 명제가 '방향치가 먼저인지 길치가 먼저인지'일 것이다. 길은 늘 한결같고, 그런 길을 헤매는 나도 늘 한결같았다. 사람들이 '랜드마크'를 정해서 다니면 편하다고 말해 주었다. 랜드마크를 정하고 보면, '그래, 저게 저기 있긴 했지'하고 끝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누구보다 가장 답답한 건 나였다. 길눈만 밝아도 세상 살기 좋을 것 같았다. 길을 헤매느라 낭비한 시간을 다 합치면 족히 2년은 될 것이다. 그 시간에 글을 썼더라면.
'마이너스의 손' 경진대회가 있다면, 나는 무조건 수상자 안에 들 것이다. 솔직히 1등도 자신 있긴 하다. 못 고치는 것은 당연하고, 손만 닿으면 부서지고 깨지고 날아간다. 특히 기계를 다룰 때면, 내가 곰이 되는 것 같다. 나도 내 '곰'손의 힘에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는 내 손이 닿았는데 멀쩡하면 신기할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을 볼 때면 매번 묘한 감정이 일어난다. 시기심이나 질투심과는 결이 다르고, 경외심이나 부러움 같은 것과도 거리가 있다. 일종의, '나와 같지 않은 종족'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사람들은 나와 피의 성분이 다르다거나 위액의 효소가 다르다고 생각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같은 '인류'로서 이렇게나 극단으로 다른 '손'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30년 가까이 살게 되면 내가 파악한 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평생 하지 말아야 할 것,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 세 가지, 수영, 자전거, 운전. '수영'에 대해선 목숨을 담보로 배운 경험이 있으니, 자전거와 운전만 하지 않으면 된다. 자전거야 탈 일이 없을 거고, 서울은 대중교통이 발달한 도시이니 운전도 할 일이 없다. 이 얼마나 깔끔하고 세련된 결단인가.
가끔 친구들과 엠티를 가서 자전거를 탈 일이 있을 때면, 친구 자전거 뒷자리에 앉거나 조금 연습해서 직선만 달리곤 했다. 제주도에서 가열하게 도전했다가 절벽 아래 떨어질 뻔 한 이후로 자전거 역시 직선코스 아니면 시도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운전은 하지 않아도, 하지 못해도 택시 기사님들이 도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배우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29살이 네 달 남은 9월의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남자 친구한테 차였다. 결혼 이야기를 해보려다 차였다고 했다. 컴퓨터 화면 아래쪽에 주황색으로 깜빡이는 친구가 가방 사진을 하나 보내왔다.
"나를 위해 하나 질러 봤다. 살면서 몇 백만 원짜리 가방 처음 사봤네. 남자가 안 사주면 나라도 나를 위해 사야지. 20대 마지막 남은 가을, 겨울 열심히 메고 다니련다."
몸 어딘가 잠들어 있던 촉수를 건드린 말이었다. 20대 마지막 가을과 겨울. 내 나이에 '2'를 앞에 달고 다닐 수 있는 계절이 단 두 계절뿐이라니. 대학원 과제를 하고 있다가 갑자기 바빠졌다. 두 계절 안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폰을 잡고 친구들에게 열심히 소개팅을 졸랐다. 연애라도 하자 싶었다. 가방은 살 돈도 없고 살 마음도 없고, 뭐를 사면 좋으려나. 조급했으나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뭔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무언가 뜻깊으면서도 평생 간직할 만한 걸 하고 싶었다.
"나, 운전학원 등록했어. 오빠가 도와준대. 결혼하고 애 낳고 나면 운전할 수 있어야 하니까 결혼 전에 면허 따자고 해서."
또 다른 친한 친구가 같은 날 해온 말이었다. 촉수를 다시 건드렸다. 그 친구는 결혼할 생각이 있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당시 나는 비혼이라고 떠벌리고 다녔지만, 부러웠다. 솔직히 많이 부러웠다. 그런데 '결혼 생각 없어'라든가 '그딴 거 왜 하냐'라고 떠벌리고 다닌 횟수가 너무 많아서, 부러운 티는 낼 수 없었다.
"아, 그럼 너랑 같이 나도 면허나 따 봐야겠다. 우리 같이 하자."
부러워서 한 말이긴 한데 하고 나니 오기가 생겼다. 너만 따냐, 운전면허, 나도 딴다, 그깟 면허. 말하고 나서 한 시간 후쯤 '현타'가 왔다. 면허가 그냥 면허가 아니고, '운전'면허야, 맹충아.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꿔먹었다. 뜻깊으면서도 평생 간직할만한 것. 사실 누구나 갖고 있어서 '신분증'으로 쓰이는 그것. 그래, 그냥 신분증 하나 더 만든다고 생각하고 면허만 따는 거야. 평생 운전은 하지 말고, 그냥 기념 정도로 갖고 있는 거야. 이 기회로 내가 나를 이기는 경험도 해 보고, 29살의 나에게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해 보는 거야, 딱 면허까지만.
단군 이래 면허 취득이 가장 용이하다는 시절이었다. 공부는 자신 있었다. 필기는 역시나 우스웠다(알고 보니 누구에게나 다 우스운 필기였다). 기능 시험에서 주의할 것은 두 가지였다. 비상음이 울리면 '급브레이크를 밟을 것', 신호가 보이면 '좌회전'을 할 것. 라이트 점등이라든가 와이퍼 작동 같은 것도 무리 없이 해내서 기능 시험도 한 번에 붙었다. 오, 나 운전 세포가 있는 편인가 봐, 이럴 줄 알았음 남들처럼 수능 끝나고 면허나 따놓는 건데! 도로주행이 남았다. 6시간을 연습하고 시험운행을 하는 체계였다.
첫 연습 6시간은 사실, 기억이 없다. 분명 연습 운행을 했는데 아무 기억이 없다. 그러나 첫 6시간 연습 후 첫 시험운행에서, 운행 시작하고 20분 만에 한 감독관의 말은 숨소리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저기 세워요. 운전미숙. 이래서 무슨 운전을 한다고. 운전대 잡은 손이 그렇게 떨려서 어떻게 운전을 해요. 내려."
첫 낙방 제목은 '운전미숙'이었다. 그 후부터는 2시간씩 시간당으로 운전연습이었다. 2시간씩 1회 8만 원을 결제를 하면, 담당관과 시간을 배정해 주었다. 6시간을 한꺼번에 결제하면 20만 원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백수였다. 20만 원은커녕 2만 원도 아까운 날들이었다. 6시간 결제할 돈도 없었거니와, 덜컥 6시간 했다가 2시간 연습 후에 합격해 버리면 환불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단박에 합격할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2시간씩 결제할 수밖에 없었다.
2시간 연습하고 일주일 후 시험, 낙제 이유는 '주행 미숙', 정확히는 '서행 지속'. 또 2시간 연습하고 5일 후 시험, 낙제 이유는 '과속'. 늦어도 난리, 빨라도 난리. 다음 낙제 이유는 '주차 미숙'. 연습 비용과 시험 비용은 각각이어서, 면허 비용은 점점 늘어났다. 이럴 줄 알았음 6시간으로 결제하는 건데.
등록비가 싸다는 이유로 집에서 먼 인천의 자동차학원으로 등록한 탓에,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지하철로 여행하여 바닷가로 향했다. 바닷가 도로 어느 즈음에서 차를 세우고 혼나고 불합격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또 떨어졌어. 20대엔 아니 평생 면허는 못 딸 팔자인가 봐."
"아... 어떡해. 다음엔 분명히 될 거야. 아빠 차로 좀 연습해 봐. 나는 요즘 매일 퇴근하고 오빠가 자기차로 연습하라고 해서 같이 하는데, 밤 운전이라 너무 무서워. 낮이랑 차원이 달라."
'밤 운전이라니. 말만 들어도 무섭다. 조심히 해'라고 보냈다. 입에서 '짜증 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썸을 타는 이가 있었으나, 자차는 없었다. '너의 차로 면허 연습 좀 하자' 할 관계도 되지 못했고, 일단 '너의 차' 자체가 없었다. 아빠의 차는 냉동탑차였다. 아빠는 밤 11시에 들어와 아침 6시에 나갔다. 내가 연습하는 건 2종이었고, 아빠는 1종 트럭이었다. 아빠 차가 2종이었다 해도, 트럭으로 운전 연습하는 건 싫었다.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그냥 다, 싫었다. 결혼상대가 없는 나도, 차 없는 썸남도, 트럭 타는 아빠도, 거지 같은 면허시험도, 하필 멀리 있는 자동차학원도, 29살도, 가을도 겨울도 다 싫었다. 다섯 번째 시험을 보러 가는 날은 날도 꽤 쌀쌀했다. 지하철에서 결국, 질질 짜고 말았다. 한낮의 인천행 급행에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창밖으로 서해의 바다가 멀리 시리게 보였다. 이 나이 되도록 제대로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게, 남들 다 갖고 있는 면허도 이렇게나 힘들고 어렵게 따는 내가 너무나도 못나 보였다. 조금 울고 말아야지 했는데, 콧물 눈물 다 뺐다. 오늘도 떨어지겠군, 돈만 나가네, 짜증 나.
시험감독은 아줌마였다. 어차피 떨어질 거 그냥 운전하자 싶었다. 앞차만 보면서 그냥 운전했다. 앞차 잘 따라갔는데, 아줌마가 빽 소리를 지른다.
"이렇게 운전하면 며칠 후에 교통사고 사망으로 뉴스 나가요! 여기 비보호인 거 알 텐데 왜 이럴까? 어?"
운전석에 그냥 앉아 있었다. 운전을 멍 때리며 그냥 했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다. 낙제 이유는 뭐라고 쓸까, 비보호 미숙? 정신 상태 미숙? 안구 충혈?
"오늘이 다섯 번째네?........... 주차 연습 많이 했어요?"
"......"
"...... 내가 진짜 이런 사람이 아닌데, 비보호만 잘했으면 좋았어요. 앞으로 비보호 잘 보고 다니고, 연습 시간 보니 주차도 충분히 한 것 같아. 여기서 해 봐요."
다행히 늘 연습하던 주차 칸이 비어 있었다. 어쩌면 될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촉수를 건드렸다. 그제야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냥 했더라면 삐딱하게 들어갔을 텐데, 긴장해서인지 예쁘게 들어갔다.
"앞으로 운전할 때 정신 차리고 잘해요. 비보호 늘 조심하고. 합격이에요. 그동안 시험 보느라 고생했어요."
소설을 며칠 앞두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어느 날, 29살의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인 면허증을 받아 들었다.
면허는 역시, 기념품 같은 것이었다. 지갑에서 나올 일이 없었다. 신분증 보여달라는 곳에서는 늘 주민등록증이 자기 할 일을 했다. 습관적으로 면허증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친구는 결국 남자 친구와 결혼을 했고 그땐 이미 드라이버였다. 서울길을 누비며 다녔다. 거의 동시에 면허를 딴 나는 그 후로 면허증을 다시 꺼내볼 일이 없었다. 그런 나를 운전대를 잡게 한 건, 남편이었다.
부부지간에 운전 가르치고 배우면 안 된다고 누가 했던가. 옛사람들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이 하나 없다. 신혼에 첫 싸움은 운전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려 열심히 싸웠다. 그 경험 때문에, 첫아이 돌잔치하고 남은 비용으로 깔끔하게 연수를 받았다. 역시, 부부싸움의 많은 문제는 돈 때문이기도 하지만 돈 때문에 해결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지금은 핸들링도 한 손, 주차도 한 손으로 한 번에 할 뻔하는, 운전 5년 차 김여사이다.
결혼 후 나는, 내가 나를 뛰어넘는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운전도 결혼 후에 시도할 수 있었고, 자전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자전거 타는 것이 로망이었던 남편은, 결혼 후 나에게 자전거 '특전 훈련'을 시켰다. 남편은 자전거를 가르치더니 내가 곧잘 타는 걸 확인한 어느 주말, 나만 따라오면 된다며 길을 나섰다. 그때도 9월이었다. 가을길을 따라 신나게 달렸다. 어느새 팔당댐에 도착했다. 집에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양주 저 끝에서 팔당댐까지, 왕복 60km를 달렸다. 어쩐지, 엘리베이터 없는 4층 집을 오를 때 나는 4족 보행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다 특전사 출신 남편을 만난 탓이었다. 그 덕에 지금의 나는 자전거 가능자가 되어 있다.
수영은 아직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첫 아이 임신 전, 두 달간 수영을 배운 경험이 있다. 물을 너무 무서워해서 킥판 놓는데도 오래 걸렸다. 그래도 물에 뜨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임신이 되는 바람에 더 배우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수영을 배운다면 혼자가 아닌 딸들과 배우려고 한다. 인형 같은 아이들에게 수영복을 입히는 일, 생각만 해도 사랑스럽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일 중 결혼하고 나서 가능해진 것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역시나 내가 '엄마'가 된 일이다. 내 인생에 가장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이었는데, 어느덧 출산을 세 번이나 했다. 아이도 안 좋아하고 집안일도 싫어했던 내가 '엄마'가 되면서, 불가능한 것은 없어야 했다. 엄마는 며칠을 밤잠을 자지 못해도 집안일이 가능했고, 세 아이 동시에 화장실 일을 봐주면서 밥을 먹이는 일도 가능했다. 그렇다,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불가능이 지속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엄마는 어쩌면 불가능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엄마라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
아, 어찌해도 불가능한 것 단 하나가 떠올랐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라는 마음을 갖고 하는 모든 일이다. 엄마는 그런 것이 없는 존재이다. 엄마라는 명찰을 달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나는 하찮지만 엄마는 위대한 이유가 바로 이 것이다.
20대의 끝에서 나는 나에게, 내가 나를 뛰어넘는 상징으로 운전면허증을 선물했다. 30대의 끝에서 나는 나에게 무엇을 선물할 수 있을까.
이미 선물을 주었고 받았다.
글을 쓰는 삶. 어쩐지 이 선물은 평생을 내가 나에게 주고받을 것만 같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