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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Sep 27. 2021

대설(大雪), 눈처럼 흰 삼계탕

  절기의 이름과 맞지 않게 대설(大雪)에 큰 눈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대설이라는 명칭에는 뜻 모를 설렘이 깃들어 있다. 12월답게 적당한 찬바람에 섞여 있는, 그 사이로 내리는 눈을 기다리는 희고 작은 마음. 

  초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도 여전히 흰 눈을 기다리는 마음이 유난했던 것은, '생일'에 대한 기대를 흰 눈이 대신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 생애 가장 벅찬 생일 선물이 온 날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일에 대한 그 어떤 감정도 없는 때였다. 육아 때문에 메마른 생일이었고, 그랬기에 더욱 벅찬 선물이었다.


대설






  내가 나를 챙길 수 있었던 시간은 딱 한 달이었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서 2주를 보내고 집에 온 후, 시어머니께서 일주일을 도와주셨다. 어머니가 가시고 남편도 동시에 2주짜리 훈련을 갔다. 둘째가 태어나고 3주 후부터 그렇게 나는 내 손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29개월 첫째도 같이 미역국을 먹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먹지 않았다. 아이의 먹거리를 신경 쓰다 보니 자연스레 내 먹을거리는 소홀히 하게 되었다. 10일 정도 후부터는 아이 먹을 것 위주로 음식을 했고, 나는 대충 먹기 시작했다. 신생아 수유를 하면서, 부족한 잠을 자면서 첫째의 음식을 신경 쓰며 내 것까지 챙길 수는 없었다.

  둘째를 낳고 딱 한 달 후부터 나는 우선순위에서 나를 가장 뒤에 두기 시작했다. 밥은 첫째가 먹고 남은 밥을 먹거나 대충 라면을 끓여 먹었다. 어묵탕을 끓여 놓아도, 뭇국을 끓여도 아이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충 먹으니 젖양도 줄었다. 아기는 깊이 자지 못했고 수시로 울어댔다. 왜 자지를 못하니, 왜 힘차게 빨지를 못하니, 하면서 내가 챙겨 먹을 생각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빈혈과 무기력을 달고 지내는 와중에 입 안쪽 구석에서 사랑니가 난동을 부렸다. 훈련이 끝나고 남편이 집에 있는 며칠 동안 치과를 다녔다. 오로가 멈추니 사랑니 뽑은 자리에서 피를 보았다. 진통제와 약을 먹는 동안 모유수유는 멈춰야 했다. 아이는 젖병을 거부했고 끊임없이 울어댔다. 수유 동안은 젖이 없어 난리 더니, 수유를 끊은 며칠간은 젖몸살 때문에 온몸이 아프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슴은 시도 때도 없이 딱딱해지고 열감이 심해졌으며 통증은 갈수록 더해졌다. 진통제를 머리맡에 두고 겨우 잠이 들었는데, 아이가 깨서 우는 바람에 그마저도 잘 수 없었다.

  남편이 다른 부대 전출 간 후, 초겨울 치고 영하를 벗어나지 못하는 추위가 이어졌다. 설상가상, 사랑니 위에 세탁기였다. 베란다의 세탁기가 얼기 시작했다. 며칠을 돌리지 못하다가 빨래가 산을 이룬 어느 날 수리기사를 불렀다. 세탁기의 정상 작동을 확인하고는 세탁기를 얼지 않게 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날부터 모든 신경은 세탁기에 집중하였다. 밤에 얼기 때문에 자기 전에 조치를 취해 놓아야 했다. 젖을 물리다 깜빡하고 잠이 드는 날은 여지없이 다음 날 종일 물을 끓이고 호스에 들이붓기를 반복해야 했다. 수유 텀 따위가 있을 리가 없는 둘째 수유를 하며, 기저귀와 물티슈를 체크하고 주문을 하며 첫째 어린이집 준비물을 준비하며 세탁기 동파를 이겨내는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보내느라 생일인 줄도 몰랐다. 아침에 대학 동기 단톡에 뜨는 메시지를 보고서야 생일인 줄 알았다. '진샤 생일 축하해'로 시작해서 줄줄이 이어지는 'ㅊㅋㅊㅋ', '생일 축하해~', '나도 축하! 오늘 뭐하니~', '아이들이랑 즐거운 하루 보내' 같은 것을 보고 '고마워 다들'이라고 답을 했다. 그러고 나서 늘 하던 것처럼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재우고 나서 라면을 하나 끓여 밥을 말아먹었다. '생일인데 미역국을 끓일까' 하다가, 빨리 먹고 좀 자고 싶었다. 설거지도 안 하고 대충 밀어 놓고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아이가 깨고 기저귀를 갈고 젖을 물리기를 반복했다. 생일이라는 게 다시 떠올랐지만, 나이 들고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 내 생일은 아무 날도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아침에 축하도 받았으니 그걸로 됐지, 싶었다. 몇몇 친구들이 기프티콘을 보내 주어서 '아주 못 살진 않았나 보다' 싶었다. 둘째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겨울에 태어난 나에게 '아이스커피'를 보내주는 친구들의 센스에 웃음이 피식 나기도 했다.

  첫째가 하원 했고 저녁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생일 축하한다고 해서 고맙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그렇게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였다. 서럽거나 아쉽다거나 그런 감정이 들 새도 없었다. 아이가 3시간 이상 자주면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런 날들이 쉬지 않고 반복되었다. 한낮에도 영하의 날씨가 이어져 밖에 나갈 생각은 아예 할 수 없었다. 둘째의 밥통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9층 집에서 못 나간 지 14일째 되던 날, 대학 동기 단톡을 두드렸다.

  "나 요즘 좀 우울해. 뭐, 산후우울증 비슷한 거 같아. 호르몬의 장난이니 이 또한 지나가겠지. 그런데 좀.. 서럽다. 하루 종일 애들 기저귀 갈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밖에도 못 나가고, 그 와중에 세탁기는 매일 얼어. 세탁기 한 번 돌릴 때마다 몇 시간 전부터 호스 녹이고 아주 개고생이야. 얼마 전 사랑니 뽑은 데는 왜 이리 오래 시큰거리냐. 나이 들고 애 낳고 나니 회복이란 걸 영원히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좀 우울한데, 어디 말할 데도 없고 괜히 너네한테 이런다. 미안해. 우리 다들 엄마 되고 애쓴다. 너네 진짜 대단하고 존경스러워."

  

  애엄마가 된 대학 동기들 8명이 있는 단톡이었다. 20대에 일찍 애 낳고 초등학생 엄마가 된 워킹맘부터 둘째 임신을 기다리는 엄마, 아이 하나만 키우는 엄마 여럿이 있었다. 육아에 관해서는, 삐뽀119 책이나 어설픈 인터넷 검색보다 더 빠르고 괜찮은 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거의 매일 자고 나면 '300+'의 톡 숫자가 매겨져 있는 곳이었다. 산후우울에 대해 한 마디 해도 너끈히 이해해주는 곳이었다.

  '진샤가 고생이 많네, 금방이야, 한 달 두 달 지나면서 좋아지니 좀만 힘내.'

  'ㅠㅠㅠㅠㅠ 친정엄마 못 오시나? 와서 미역국만 끓여 주셔도 좋을 텐데.'

  '그때 진짜 힘들어. 앉았다 일어나기만 해도 힘들 때야. 그렇게 힘들어서 어떡해.'

  '우리 빨리 애 키우고 우리끼리 여행 가서 다 같이 엉엉 울자.'

  위로의 말들이 쏟아졌다. 나보다 힘든 시간을 지나온 친구들도 있어서, 그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여기다 한풀이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풀어내고 응원받고 나니 살 것 같았다. 이들이 없었다면 어찌 육아를 했을까, 매일 하던 생각이 유난히 짙어졌다.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한 친구에게서 개인 톡이 왔다. 뭐지, 하고는 20분을 펑펑 울었다. 비ㅂ고 미역국이 10봉, 육개장이 10봉, 삼계탕이 10봉이었다.

  '나는 둘째 낳고 잘 못 먹을 때 제일 서럽더라. 너 지금 상황 보니까 잘 못 먹어서 그러는 거 같아. 애들 챙긴다고 대충 먹지 말고, 이런 거라도 먹어. 내가 지금 가서 해줄 수 있는 상황은 못 되고... 매콤한 거 먹고 싶을 때 있을 땐 육개장이 좋을 거 같고. 나는 둘째 4월에 낳았는데 그때 삼계탕 많이 먹었어. 힘나더라고. 그때 힘들었던 기억이 나서 보내. 네가 잘 먹어야 돼. 그래야 안 우울하고 애들도 이쁘게 보이고 잘 키울 수 있어. 생일날 선물 못 보내준 것 같아서, 생일선물 대신이야. 늦었지만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대학 4년 내내 사실,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 졸업 후엔 더 연락할 일도 없었다. 결혼식도 가지 못했고, 그 아이가 두 아이 낳고 허덕대며 사는 동안 나는 나의 삶을 사느라 그저 바빴다. 그래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아니 내 삶과 상관없는, 앞으로도 상관없을 것만 같던 친구였다.

  아이를 낳고 무언가를 물을 때는, 그 친구의 이름부터 불렀다. 하라야, 애가 잘 때 이상한 소리가 나. 하라야, 지금 톡 가능? 애가 이렇게 저렇게 해도 딸꾹질이 안 멈추는데 어떡해? 하라야, 아무래도 지금 병원 가야겠지? 하라, 7개월 이유식에 이거 넣어도 돼? 하라 하라, 기저귀에 이상한 거 묻어있어, 사진 찍어 보여줘도 되겠니. 10년을 넘게 얼굴을 못 봤는데도, 아이를 낳고 나자 그 친구와 가장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 무얼 물어도 늘 정성껏 대답해 주었다.

  첫아이 낳은 해에는 여자아이 옷과 신발을 가득 넣은 박스를 들고 집에 오기도 했다. 그래도 나름 상태 좋은 옷들이라 그냥 막 입히기 좋을 거야, 라는 부담기 뺀 담백한 말도 같이 주었다. 그 후로 계절마다 택배로 옷을 보내 주었다. 나도 옷 처리하는 거라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라는 말 뒤에 커피를 보내 주었다. '너 자꾸 이러면 나 담엔 못 보내, 부담돼서'라는 말에 '부담 느끼고 또 보내 주세요~'라고 능청맞은 문자를 보냈다.  


  고마워,라고 답하기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보잘것없는 세 글자에 담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저 고마움만으로 그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태어나 35해에 맞는 생일, 몇 번의 기억에 남는 선물을 받았지만 이보다 크게 다가오는 선물을 없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죽어가는 나에게, 죽지 마라고 살려 준 선물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내 선물보다는 아이 선물을 훨씬 더 많이 받았었는데, 오롯이 나만을 생각해서 보내 준 선물은 처음이었다. 내 몸과 마음 모두를 생각한 선물이었다. 한참을 울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했다.

  "하라, 너무 고마워. 아까워서 어떻게 먹어. 진짜 고마워. 이 은혜를 어떻게 갚니."

  "뭘 은혜를 갚아. 진짜 은혜 갚고 싶으면 남김없이 잘 먹고 애들 이쁘게 키워. 너 고생하는 거 보니 나 예전에 혼자 키웠던 거 생각나서 그래. 그땐 뭘 해도 힘들 때니까, 밥 한다고 불 앞에서 고생하지 말고 쉽게 쉽게 해."


  다음날 커다란 박스가 집 문 앞에 도착했다. 내 몸과 마음을 채워줄 식량이었다.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보냈다. 잘 먹을게, 남김없이 다 먹고 은혜 갚는 진샤 될게. 7살 아들과 4살 딸 엄마인 친구는 쿨하게 이모티콘 하나로 대답했다. 나도 첫째가 7살이 될 때면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겨울에 웬 삼계탕, 하며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헤프게 입가에 걸었다. 삼계탕은 겨울 별미였다. 다 먹고 뜨거워진 얼굴을 하고는 괜스레 커튼을 열어 보았다. 뽀얀 삼계탕처럼 흰 눈이 제법 쌓였다. 삼계탕의 온기가 불러온 눈은, 열흘 이상 한반도를 덮고 있던 한파를 몰아내는 눈이었다.

  다음 날은 12월 들어 처음으로 한낮 기온이 영상으로 오른 날이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웠다. 그렇게 둘째의 첫 외출이 시작되었다. 아파트 단지 한 바퀴 돌고 단골 카페 사장님께 아기 얼굴을 보여주고 돌아오는 단출한 여행이었지만, 나에게는 잊지 못할 나들이였다. 내 안과 밖의 모든 냉기를 몰아낸 날이었기 때문이다. 대설(大雪)이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하라의 생일은 크리스마스였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매년 크리스마스엔 친구의 생일을 꼭꼭 챙기고 있다. 비록 케이크를 보내주는 정도밖에 못하고 있지만, 내 생에 산타클로스 같이 온 친구의 생일을 그냥 보낼 수 없다. 요즘은 12월의 내 생일보다 친구의 생일을 더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특별한 건, 내 생애 몸이 가장 힘들고 아팠던 때에 나를 먹여 살린 친구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평생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기억할 것만 같다.


  둘째를 혼자 키운 수고의 나날이 깊이 새겨져 있어서, 셋째 출산은 마냥 두렵기만 했다. 그 시절을 다시 헤쳐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어서, '닥쳐서 우울해하지 뭐'라는 마음으로 출산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었다. 신은 어딘가 분명 존재하긴 하는구나, 싶었다. 천사 같은 산후도우미 이모님을 보내고 한 달 후 시어머니가 오셨다. 딱 1년의 시간 동안 지내실 곳이 마땅치 않으셔서, 육아도 도울 겸 큰아들 집으로 오셨다. 초등교사 출신이신 시어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육아에 탁월한 분이셨다. 덕분에 나는 셋째를 키우며 매일 잘 챙겨 먹을 수 있었고 아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모든 인생은 등가이다'라는 어느 드라마 대사를 매일 떠올린 시절이었다.


   나의 첫 아이가 일곱 살이 된 올해, 나는 그 친구처럼 멋진 사람이 되었나 하고 생각해 보면 자신이 없어진다. 친구처럼 멋진 사람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여전히 옹졸하고 미숙하고 속좁고 걸핏하면 울기부터 한다. 왜 나를 몰라주냐며,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걸 어찌 모를 수가 있냐며 징징대기만 하는 모습에 나 스스로도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혼자만의 감정 과잉을 글로 해결하고 있지만, 글 밖에서는 여전히 헉헉댈 뿐이다.

  지금은 아이들이 꽤 커서 육아 단톡이 예전 같지 않다. 예전이 그리워질 정도로 잠잠하다. 가끔 톡방이 울릴 때가 있지만 금방 이야깃거리가 고갈되곤 한다. 하라와 같은 초등 엄마들이 '지금 애들 학원 픽업 나가'나 '학원비가 장난이 아냐', '학원이 애들 키운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 나 같은 유치부 엄마들은 '그렇구나', '유치원도 장난 아니긴 한데', '한글은 언제 시작하는 게 좋은가' 같은 대답을 하곤 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지점이 엄마들이 자라는 지점이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세대차이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육아의 시간을 지나오고 있다. 첫 아이 7살을 키우며 약간의 여유를 가져 보니, 그 시절 나에게 생명의 양식을 보내준 친구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때 힘들었던 기억이 날 때마다, 하라가 보내준 톡과 박스를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나도 그렇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기회가 온 것 같다. 오늘내일하던 7층 애기 엄마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둘째를 출산하러 간 것이다. 이사 왔을 때부터 만삭으로 숨을 몰아쉬던 그녀였다. 우리 첫째를 잘 따르는 그 집 아이는 우리 아이들과 하원 후 함께 지내게 하면 될 것이다. '양가 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 없어서 저도 혼자 키워야 해요. 할 수 있겠죠'라며 말끝을 흐리던 그녀의 옆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어쩌면 그녀 인생에서 가장 힘들 수 있는 시기에, 필요한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다. 하라만큼은 아니어도, 육아로 힘들 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만 괜찮다면, 올겨울엔 흰 눈이 오는 날마다 뽀얀 삼계탕을 끓여 보려 한다. 경험상, 둘째 아이를 낳고 처음 맞이하는 겨울엔 삼계탕이 별미이니까.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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