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Oct 04. 2021

동지(冬至), 따뜻한 바닥과 따뜻한 회와 따뜻한 날들

절기의 일기, 동지(冬至)

  한 해의 마지막 절기답게 동지는 1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이다. 아빠는 동지가 지날 때마다 '겨울 다 갔네'라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창 밖엔 눈이 세상을 지우고 있거나 겨울보다 차가운 밤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겨울이 다 갔다는 아빠는 늘 틀리게 보였다. 그리고 사실, 아빠는 틀린 게 맞았다. 아빠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겨울은 3개월 이상을 더 생존하여 나의 내복의 생명도 연장시켜 주었다.

  내복을 벗고 겨우내 스타킹으로 버텨오던 20대를 지나 서른에 들어선 해, 나는 처음으로 공항의 바닥이 따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지






  엄마는 좋은 메신저는 아니었다. 엄마가 아빠를 잘 설득시켜 주리라는 믿음이 어디서 생긴 지 모르겠다. 그 당시 아빠는 엄마 말이라면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딸과 관련된 일이라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엄마 아빠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시큰둥을 넘어서 은근 반대까지 했다. 공무원에 사지 멀쩡하고 정신 올바른 대한민국 사내를 데려왔는데, 도대체 맘에 안 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삼국지에서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아빠의 대답에, 조조라고 대답한 남자 친구 때문인가. 그때 아빠의 표정에 약간의 '아하.. 이 친구'가 있었지만, 조조가 어때서, 남자 친구 이야기 들어보니 충분히 좋아할 만하고만. 중문과 나와서 삼국지도 안 읽었냐, 는 동생의 질문과 후회가 뒤섞여 휘몰아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삼국지 따위가 내 결혼에 방해물이 될 순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 아빠가 이상했다. 첫 식사자리에서 남자 친구는 충분히 예의를 갖추었고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였는데, 집에 오는 내내 엄마 아빠는 별 말이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왜 신랑감으로 좋지 않은지, 왜 사윗감으로 좋지 않은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마치 짠 듯이 엄마 아빠는 비슷하게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내가 듣기에 온통 변명이고 핑계이고 말도 안 되는 말들 뿐이었다. 지금의 나를, 이런 집에 사는 나를, 이런 변변치도 않은 직장에 다니는 나를 그저 좋아해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엄마 아빠는 나에게 무얼 해주었다고 반대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엄마는, 같은 여자여서인지 나의 마음은 이해해 주었다. 여전히 맘에 안 들지만, '네가 좋다는 데 어쩌겠나, 살면서 풀어나가든가 해야지'라고 말해 주었다. 지금에야 '살면서 풀어나간다는' 말의 의미와 무게가 골반뼈 속까지 깊이 스며들지만, 그때는 그저 '그럼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나를 이해해주는 엄마가 좋기만 했다. 그래서 별 문제 될 것 없다는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지나 남자 친구랑 제주도 놀러 갔다 올게, 아빠한테 잘 말해줘'라고 말한 것이다. 부부는 일심동체이니 엄마의 마음이 곧 아빠의 마음이 될 거라고, 가볍고 깔끔하게 생각해 버린 것이다.


  성탄절이 지난 어느 날, 가볍고 깔끔하게 생각했으면서 쥐새끼 같은 모양으로 겨울의 새벽을 빠져나왔다. 죄는 짓지 않았지만 죄를 진 자의 행색이었다. 일종의 죄책감, 결혼 전 엄마 아빠의 완전한 허락 없이 떠나는 여행이라는 나름의 무거운 생각이 죄책감의 탈을 쓰고 마음 오른쪽 구석 어딘가 팽개쳐 있었을 것이다. 이제야 인정한다. 나는 그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고 도망 나온 모습으로 김포공항으로 향한 것이다.

  김포공항 어느 기둥에서, 겨울 추위에 나보다 얼굴이 빨개진 남자 친구의 얼굴을 보자 죄책감이나 그런 비슷한 감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회식을 늦게까지 하고 조금 자고 오는 바람에 충전을 못해 폰 배터리가 없어 꺼질 뻔했다고 말하는 그가 그저 좋았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될까 싶었다. 배터리가 꺼져도 우리 사랑은 안 꺼질 건데.

  엄마 아빠에게 남자 친구를 정식 소개하고 나서 엄마 아빠의 반응에 괜히 속상해진 내가 던진 '우리 여행이나 갈까요' 한 마디에, 군인 남자 친구는 바로 제주도 행 표를 끊은 것이다. 나는 기껏해야 동해바다나 기차여행 정도였는데, 제주도라니. 놀라운 실행력과 스케일에 그가 더 좋아졌다. 나에겐 없는 대범함이 있었다. 지금도 이런 데 결혼하면 쿵짝이 더 잘 맞겠지, 이런 생각만 짙어졌다.

  결혼에 대한 고민이 깊었으나, 결혼을 결심한 후는 고민할 게 없었다. 엄마 아빠에게 보이고 친구들에게 다 공표했으니, 둘이 여행을 떠난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 요즘은 임신이 결혼 필수라는데, 나이도 있으니 흠 될 것 없지, 그럼. 그런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폰을 끄라는 방송이 울렸고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비행을 즐겼다.

 

  이륙하고 비행기 안에서 폰을 켰다. 부재중 전화 48건. 모두 아빠였다. 아빠의 감정이 새겨진 번호, 48. 다 죽었어, 18. 아, 엄마 메신저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구나.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구나 싶었는데, 다시 폰이 울렸다. 네, 어, 아니, 안 가, 싫어, 싫다고. 폰을 끊는 나의 표정을 살핀 남자 친구가 물었다. 아버님이세요? 대답을 하지 않았다. 30년 동안 내가 들은 아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 와중에 사람들이 다 내려 우리도 비행기에서 내려야 했다.

  내리는 동안 또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주공항 전화해 보니까, 40분 후에 서울 비행기 있다더라, 그거 타고 다시 와, 너 안 오면 아빠 못 볼 줄 알아, 끊어. 내가 싫어,라고 말하기 전에 아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결정을 해야 했지만 결정을 하기 싫었다. 이렇게 돌아가면 이 사람과 결혼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돌아가는 건 아니야. 아빠는 왜 저러지. 평생을 결혼 안 하고 산다던 딸이, 멀쩡한 사람 데려와서 결혼하겠다는데 도대체 왜 저러지. 요즘 가끔, 친구들이 손자 사진 보여주는 데 이쁘다고 말하던 아빠였는데, 왜 싫어하는 거지. 아니, 경제력 안정적이고 건강하고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은 사람인데 왜 저렇게 삐딱하게 나와? 뭐가 문제야? 오히려 더 밀어줘야 하는 것 아니야, 무조건 싫어하기만 하면 뭐가 해결돼? 왜 저래 진짜? 아빠도 잘 나지 못했으면서, 왜 무작정 싫어하기만 하는 건데, 왜!

  오랜만에 보는 제주공항의 이색적인 창밖 풍경에 그만, 복잡한 마음을 대변하는 감정이 툭 떨어졌다. 그 사이 전화는 계속 왔지만 받지 않았다. 우는 내 옆에서 남자 친구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휴지를 갖다 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저 서러웠다. 아빠랑 친하게 지내 왔는데, 그래서 더 내 마음을 잘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결정한 나의 결혼에 도대체 왜 반대만 하는 건지, 그게 아빠라서 더 서러웠다. 아빠가 어쩜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그저 다정하고 따뜻하기만 한 아빠였는데, 어쩜 이렇게 한 순간 바뀔 수가 있는 거지.

  "일단 나는 렌터카 알아보고 있을게요."

  내 옆 있던 그가 자리를 비웠다. 공항에서 30분이 넘게 있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줄지어 있었다. 바로 돌아갈까, 여기까지 왔는데 오전이라도 있다가 갈까, 그래도 저녁까지는 구경할까, 쳇 아빠가 뭐야, 그냥 예정대로 2박 3일 있다가 가버리는 거야. 그런데 아빠가 진짜 많이 화가 난 것 같은데. 아빠 없는 결혼식장은 나도 싫은데.

  또 폰이 울린다. 아빠다.

  "아직도 비행기 안 탔어! 너 왜 이래. 나이 먹었다고 말 안 듣는 거야. 아빠가 오라면 오는 거지. 당장 다음 비행기로 와."

  툭 툭 떨어지던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공항은 눈물과 친숙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힐끔힐끔 보고 곧 자신의 행선지로 눈길을 옮겼다. 아까보다 좀 더 서러워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옆에 남자 친구가 왔다.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아버님 말씀을 들어야겠어요. 그게 모두에게 좋아요. 우리 여기 왔으니 근처에서 밥 먹고 점심에 서울 가요. 제주도는 다음에 또 와도 돼요. 그렇게 해요."

  싫어, 싫다고. 그만 제주도 공항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린아이처럼 앙앙 울었다. 왜, 왜 가야 하는데, 나 나이 서른인데 왜 내 맘대로 할 수 없는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뭔데. 나이 서른에서 20을 뺀 나이처럼 엉엉 목놓아 울었다. 드라마로 연출해도 나쁘지 않을 장면이었다. 공항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여주인공,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 주인공, 몇몇 옆에 서서 수군대는 사람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는 행인들.

  손에 쥐고 있는 폰이 또 울린다. 짧게. 엇? 전화가 아니야? 눈물을 닦고 들여다보았다. 동생?

  누나, 잠깐 기다려 봐.

  

  무얼 기다리라는 거지, 전화를? 서울행 비행기를? 얘가 직접 오려나? 와서 뭘 어쩌려고? 설마 엄마 아빠가 오려나? 도망을 가야 하나? 어디로? 도망가기 위해 렌트를 해야 하는 건가?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제야 내 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김삼순이 나이 서른에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라며 질질 짜는 걸 보면서 '서른에도 저렇게 철이 안 들 수 있구나' 생각했던 20대 초반에는 생각도 못했다, 내가 나이 서른에 아니 서른하나를 며칠 앞두고 공항 바닥에 철퍼덕 앉아 10살 아이처럼 엉엉 울게 될 줄은.

  폰이 또 짧게 울린다. 엄마 문자였다.

  지금 진호가 아빠랑 이야기하고 있다. 잘 될 거 같기도 하니까 좀만 더 기다려 봐.

  

  그 문자를 보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공항 바닥을 짚었는데, 그때 처음 알았다. 제주공항의 바닥은 따뜻했다. 내가 앉은자리가 아니었어도 따뜻했다. 다른 자리를 짚어보지 못했지만, 일어서려 짚은 그곳은 분명 따뜻했다. 겨울의 제주공항이 원래 그렇게 바닥이 따끈한 건지, 아님 내 꼴이 우습고 불쌍해서 공항 책임자가 그곳만 보일러를 틀어준 것인지, 내 뜨거운 눈물이 주변을 데운 건지, 아님 그저 내 손이 뜨거웠던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그 온기의 감촉만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 시간 전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눈물 닦는 척 그 자리를 계속 바라보았다. 신발이 막고 있어서 그 온기는 이내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폰이 울린다. 길게 울리는 걸 보니 전화다. 아빠. 받아 봐요, 남자 친구의 말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어디야. 공항? 진호랑 얘기했는데, 마음 풀고 재밌게 잘 놀다 와."

  내가 한 달 가까이 노력해도 안 되던 일을 동생이 해냈다. 이 놈, 무슨 작전을 쓴 거지. 도대체 아빠를 어떻게 했길래, 한 시간 만에 아빠가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거지. 그런 궁금증이 컸지만, 허락받은 기쁨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눈물도 다 닦지 않고 당장 차를 렌트를 하러 갔다. 눈물이 나 닦고 있을, 그럴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하얗고 가벼운 차를 받았다. 하얗고 가벼워진 내 마음과 어울리는 차였다.

 

  빠져나오는 제주공항의 하늘은 회색이었지만, 그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예쁜 회색을 보았다. 회색 구름 뒤에 원래부터 구김 없이 있는 파란 하늘과 붉은 태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단 10여분 만에 내 온 세상은 어둡고 못생긴 회색이었다가, 파랗고 붉은 본심을 숨긴 예쁜 회색이 되었다. 전화 한 통으로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변할 줄이야. 그것은 결혼을 허락받은 시간이었기에, 아빠가 원래의 다정한 아빠로 돌아왔음을 확인한 시간이었기에 나의 온 세상이 그리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오전 내내 긴장하고 울고 불고 공항에서 드라마를 찍었으니, 긴장감이 사라진 자리를 허기가 채우기 시작했다. 공항에서 가까운 시장의 아무 식당으로 들어갔다. 고등어구이 정식을 시켰는데, 내가 아는 한 그곳은 제주도에서 고등어구이를 가장 잘하는 곳이었다. 특히 구름 낀 날 엉엉 목놓아 울고 먹어야 진짜 맛을 알 수 있는 집이었다. 원래 생선구이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그날은 혼자 남김없이 다 먹었다. 고등어구이인데, 꿀을 발라 굽는 건가, 꿀 맛이 났다.

  식당에서 일어서기 전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너 아빠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거야.

  "뭐, 누나도 서른인데 누나가 자기 신랑감은 자기가 고를 수 있는 정도는 된다 했지. 아빠 딸 그렇게 잘난 거 아니라고, 형이 더 잘 나면 잘 났지 누나라고 더 낫기만 한 것 없다고. 둘이 나이도 그렇고 잘 어울리니까 엄마 아빠는 잘 봐주기만 하면 된다고. 야, 너는 나이가 몇 갠데 엄마 아빠한테 제대로 이야기도 안 하고 일을 이렇게 만드냐. 하여튼 형? 뭐라 해야 해? 매형? 잘 놀고 와, 다치지 말고."

  부쩍 철이 들더니 어느새 오빠 같아진 동생이 아빠의 마음을 움직여 놓았다. 덕분에 고등어 집에서 또 한바탕 우느라 눈이 고생을 했다. 내 폰을 뺏더니 연신 '처남, 처남'하며 신난 남자 친구를 보며 웃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돌아오는 날 동생이 김포공항에 마중을 나왔다. 한라봉과 이것저것 선물을 들어줘야 해서 나오라고 부탁했다. 야,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귀찮게 하네, 하면서 동생은 착륙시간에 맞춰 공항에 있었다. 선물을 들어달라는 건 핑계였다. 처남 아니었으면 결혼은커녕 여행도 못할 뻔했는데, 우리 처남 맛난 거 사줘야지요. 입만 벌리면 처남, 처남 하는 남자 친구가 그저 귀여웠다.

  동생을 보자마자 넉살 좋게 '처남' 하더니, 동생도 처음의 어색함이 걷히자마자 '매형'이라고 술술 쉽게도 말했다. 요놈이, 어쭈. 동생은 작정했지만 안 한 척 '저기 회전초밥집 있던데 거기 가도 될까요'라며 말도 마무리하기 전에 그쪽으로 우리를 인도했다. 요놈이 아주. 

  누나, 요즘 초밥이 너무 좋아졌어, 라며 자꾸만 접시를 당기는 손을 째려보아도 눈치 따위 쌓여가는 접시 속에 같이 쌓아둘 뿐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맘껏 먹어요, 처남, 이라고 말하는 매형 덕분에 산 줄 알아라. 그러나 실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지난 2박 3일의 즐거움이, 우리가 미래를 약속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그 시간이 모두 동생 덕분에 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였을까, 그날 그 집의 초밥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초밥은 차가운 맛으로 먹는 건데, 모든 접시의 초밥들이 하나같이 같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따뜻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 따뜻해서, 내 서른의 동지 즈음은 따뜻한 기억으로 가득하다.






  두 달 후 상견례를 하고 석 달 후 결혼식을 올렸다. 결심하고 나니 나머지는 거칠 게 없었다. 다 그의 실행력과 추진력 덕분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아이가 갖고 싶었으나, 그건 실행력이나 추진력이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다. 임신은 이론과 실천이 맞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가 비슷한 의구심을 가졌지만 티는 내지 않은 채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뭐가 문제인 걸까, 내가 문제인 건가, 친구들은 쉽게 되던데, 너무 늦은 건가. 아직 젊으니 곧 되겠지, 라는 생각이 많아질 즈음 다시 동지가 왔다.

  우리 일 년 전 그런 일도 있었는데, 그래서 결국 이렇게 부부가 되었네요. 참, 그때 공항에서 펑펑 우는데.. 내가 진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진짜 난감했어요. 어쨌든 결혼 성공했잖아요? 그럼 된 거지, 뭐. 그렇게 서로의 추억을 끼워 맞춰 나가기엔, 겨울밤은 너무나도 길었다.

  "신혼여행 아니 신혼여행 같았던 신혼여행 전 여행 때 먹었던 회덮밥이 갑자기 너무 먹고 싶다. 나가요."

  남편은 당황스러워했지만, 밤 10시에 그렇게 내 손에 끌려 겨울밤을 함께 배회했다. 마침 한 초밥집이 불을 밝혀 신혼부부를 맞이했다. 참치회덮밥을 주문하고 보니, 연말 프로야구 정산을 하는 프로그램이 티브이에 나오고 있었다. 겨울밤과 회덮밥과 프로야구, 이러한 부조화가 사실 결혼생활의 '힌트'였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모든 부조화들을 헤쳐나가며 조화롭게 지내야 하는 것이 결혼생활임을, '신혼'은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제주공항에서 객기 부리며 울며 성공시킨 결혼생활은,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즐거운 날과 참담한 날이 뒤섞여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공항 바닥이 이상하게 따뜻했던 느낌과 따뜻한 초밥을 먹었던 날이 떠오르는 날은, 역설적이게도 심하게 다투는 날이다.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 싶을 때면 그 생각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러고 나면, 따뜻했던 날들이 실은 훨씬 더 많았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따뜻했던 그날들을 바탕에 깔고 결혼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가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어질 때면, 제주공항의 바닥을 짚었던 날의 내 손을 불러온다. 동지의 밤이 길어도 결국은 봄이 오는 것처럼, 차가운 나날들이 있어도 결국은 내 손으로 따뜻한 나날을 짚어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