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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Oct 11. 2021

소한(小寒), 태평양의 다짐

절기의 일기, 소한(小寒)

  절기의 이름으로 따지면 대한(大寒)이 가장 추워야 하지만, 1년 중 가장 추운 때는 바로 소한 즈음이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엄마의 말을 어렸을 때 듣고는, 이불속에서 얼굴만 내밀고 세차게 끄덕거렸다. '그럼 소한이 대한이어야지 왜 소한이라고 그래?' 묻기 위해 입을 여는 것은 귀찮았으나, 엄마가 까준 노란 귤을 입에 넣는 것은 수월했다.

  소한의 추위가 절정일 때, 팔랑거리는 봄옷을 입고 바닷가를 걸은 시절이 있었다. 소한의 추위는 까맣게 잊고, 인생의 가장 더운 때에 오로지 하나의 걱정을 바다에 던지던 때가 있었다.


소한






  솔직히, 비웃었다. 중국어는 이제 더 이상 공부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온 학교였는데, 대만을 가라니. 중국어 하는 작은 섬나라? 내가 거길 왜? 몇몇 대만 사람들보다 내가 중국어 더 잘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굳이 거길 왜? 이 젊은 청춘의 1년,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빠져들어도 1분 1초가 아까운데, 거길 대체 왜?

  학교가 전액 지원해 주고 용돈까지 주고 넌 중국어도 잘하니까 또 다른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경험도 쌓고 문화도 배우고.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말해주는 친구의 표정 앞에서는 참았지만, 내 속에는 비웃음과 경멸이 부글대고 있었다. 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스물다섯 나이에 계룡산 자락에 들어온 절박함을 모르는 애도 아닐 텐데, 내가 열심히 공부하려는 게 꼴 보기 싫은 걸까. 뭐, 어차피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내가 보기에는 좋은 기회일 것 같아서 그래,라고 말을 마무리하는 친구에게 입으론 '그래'라고 대답했다. 속마음을 말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안 갈 거니까.

  늦깎이 신입생이었던 나에게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였다. 유학과 국제기구 참여 활동이 많아 견식이 넓고 속이 깊은 친구였다. 저런 말을 해주는 건 분명 생각이 있어서였겠지만, 그래도 싫었다. 해야 할 철학 공부가 쌓여 있었다. 그 텍스트들을 이해하기 위해 해야 할 외국어 공부는 더 많이 쌓여 있었다. 대만이라니, 우습지도 않아.

  친구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두 달 후 나는 타이베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친구가 던진 돌은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학교의 국제교류팀 선생님들이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교류 맺는 학교인데, 중국어 전혀 못하는 아이들만 가서 걱정이 되니 네가 가서 상황 살펴 주고 학생들이랑 교류처를 이어주면 좋을 것 같아. 따지고 보면, 내 인생에 비행기 값 빼고 학비와 기숙사비와 생활비까지 대주는 유학을 또 언제 갈 수 있을까 싶었다. 기회는 잡아야 기회지 놓치면 후회와 미련 말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내 평소 신념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인생 길게 보고 1년 버리는 셈 치고 가자. 무슨 기회가 있을지 모르는 기회의 땅 대만으로.


  나의 학교는 대만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대학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도 해발고도 가장 높은 도시에서 오래 살았는데, 여기서도 그런 곳이라는군. 팔자에 산이 있나 보군. 동네가 예전 탄광지였다고도 한다. 팔자에 석탄이 많나 보군.

  학교는 내게 사실상 모든 기회와 선택을 열어 주었다. 소속은 중문과였으나 나에게는 학교의 모든 수업을 청강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철학 학부 수업과 인도철학 석사 과정을 들었다. 동아리 체험도 무엇이든 가능했다. 얼후(二胡)나 고쟁(古箏) 같은 중국 악기도 호기심에 잠시 배웠다. 서예동아리도 생각보다 즐거웠다. 시창(詩唱) 동아리에서는 단원이 되어 대회에 나가 상을 받기도 했다. 보고 배울 기회가 넘쳐났다.

  국제교류팀은 첫 외국인 교환학생에게 최선을 다했다. 2주에 한 번씩 중문과 석사 선배들에게 우리를 타이베이 근교 유원지나 박물관, 유적지에 데리고 가게 했다. 석사라 해도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었지만, 그들의 최선이 느껴져 나 역시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응답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중문과 교수님은 우리를 대만 섬의 유명한 곳에 데리고 가 주었다. 웬만한 유명한 곳은 1박 2일 코스로 다 돌아보았다. 화롄(花蓮)이나 가오슝(高雄), 타이난(臺南) 같은 유명한 도시는 물론, 지방 소도시의 소소한 볼거리도 소개해 주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윈린(雲林) 현의 어느 작은 도시였다. 윈린에서 보고 느낀 것은 지방 인형극 박물관과 동네 정취 정도였으나, 그곳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날씨 때문이었다. 농촌 마을에 안개가 가득했다. 안갯속에 숨은 빗방울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왜 지명이 구름 숲인지 알 것만 같았다.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 달에 두 번씩 여행을 다니며,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며 용돈을 모아 저축까지 하며 지냈다. 대만에 온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가장 즐거웠던 것은 역시나, '사람'이었다. 나는 타이베이 근교 작은 대학에 온 첫 외국 교류 학생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적극적인 친구들은 '외국인'을 보러 내 기숙사를 찾아왔지만, 외모만으로는 '외국인'을 알아보지 못해 종종 돌아가곤 했다. 여기 한국인 교환 학생이 있는 방 맞니, 라는 질문에 능숙한 중국어로 '맞아'라고 대답하면 쭈삣거리다 돌아가곤 했는데, 그 모습들이 귀여워서 일부러 신분을 밝히지 않기도 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아챈 들은 자기들끼리 '얘가 교환학생 걔야', '완전 못 알아보겠다', '말 걸어 봐'라고 수군댔다. 드라마에서나 보는 명랑소녀처럼, 갑자기 뒤돌아 '안녕' 한 마디 하면 엘리베이터 안의 모두가 박수를 쳤다. 그때부터 이어지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들, 예를 들어 '한국 여자들은 정말 다 수술하냐', '공자가 정말 한국 거라고 생각하냐', '너도 자주 개고기 먹냐', '북한이랑 전쟁 중인데 안 무섭냐'처럼 왜곡된 교육과 미디어의 폐해로 잘못 이해하거나 받아들인 정보를 확인하려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안녕'을 외친 과거의 나를 쥐어박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만큼 순수했기에 잘못된 정보를 지적하고 바르게 알려주면 '아' 하며 받아들였다. 

  가끔 자기의 주장을 펼치며 여전히 대만의 우위를 가져가려는 이들이 있었으나, 이야기로 당장에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도 생활에서는 그저 좋은 친구들이었다. 맛있는 것이 생기면 '진샤 것'이라며 늘 먼저 챙겨 주고, 궁금한 한국어가 있으면 서슴없이 찾아와 물어보곤 했다. 동그란 눈을 가진, 예쁜 구릿빛의 얼굴들이었다.


  그중에 '가인(家仁)'이 있었다. 성도 한 씨였다. 한국에 너랑 이름이 똑같은 진짜 예쁜 연예인이 있는데,라고 하면 별 상관없다는 듯 '그래?' 하고 마는 친구였다. 말레이시아 화교인 가인은 학생회장이었다. 아마도 '외국인 교환학생'을 잘 챙기라는 국제교류팀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가인은 심심하면 내 방문을 열었고, '헤이, 진샤' 하며 나를 불렀다. 나는 그 아이를 '지아런(家人)'이나 '빼밀리'라고 부르며 반겼다.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녀서, 말레이시아의 중국어 발음인 'Malaixiya(馬來西亞)'의 '마(馬)'라고도 불렀다.

  가인은 학교 내 여기저기 나를 끌고 다녔다. 자신의 기숙사 방부터 체육관, 여기저기 식당, 도서관, 테니스장, 농구장을 보여 주고, 그곳들로부터 매점에 빨리 가는 길을 가르쳐 줬다. 내가 혼자 밥을 먹으면 늘 옆에 앉아 수다를 떨어 주었다. 주말엔 심심해할까 봐 타이베이 시내를 함께 나가 주었다.

  겨울방학이 다가오던 어느 날부터는 빼밀리가 멀리서 보이면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빠른 중국어를 알아듣기도 힘들었고, 분명히 '헤이, 진샤' 하며 '거기 가볼래?'로 대화를 시작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늘 말과 같이 빠른 속도로 내게 뛰어왔다.

  "헤이, 진샤, 겨울방학 때 어떻게 해? 한국 가?"

  "아니, 일단 여기 있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럼 우리 집에서 지내자. 내가 엄마 아빠한테 말해 뒀어."

  응? 나의 거처를 벌써? 이미?

  "그렇게 해도 돼?"

  "진샤라면 얼마든지. 한 달 다 있어도 돼."

  아열대 기후인 나라여서 겨울방학이 짧았다. 아, 그, 그럼, 2주만 신세 질게. 고마워. 겨울방학 동안 나를 초대한 친구들의 방문 일정을 뒤쪽으로 미루고, 방학을 하자마자 가인의 집으로 향했다. 가오슝보다 더 남쪽, 그러니까 대만 최남단 지방인 핑동(屛東)이었다.



  대만 고속철인 까오티에(高鐵) 비용도 물론 빼밀리가 준비해주었다. 가오슝 역에 내리니 인상 좋은 아저씨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인의 아버지였다.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를 더 가서 도착한 가인의 집을 앞에 두고 나는 한참을 머뭇거렸다. 내가 들어가면 안 될 집만 같았다. 티브이에서나 보던 3층 집이었다. 앞마당에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이런 집인 줄 알았으면 안 온다고 했을 텐데. 부담스러워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가장 부담스러웠던 것은 집 앞 풍경이었다. 눈이 시리다 못해 아플 정도로 푸르렀던 바다였다.

  "太平洋."

  가인의 아버지가 말했다.

  "이 바다가 좋아서 이곳에서 대만 생활을 시작했어요. 태평양을 매일 보고 사는 것, 좋잖아요."

  말레이시아와 대만을 오고 가며 의학 교류를 하는 의사였다. 이렇게나 진중한 분에게서 저렇게나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딸이 나온 것이 신기했다. 가인의 아버지 말을 듣고 다시 바다를 보았다. 새파랗다, 에 깊이까지 더해져 검게 느껴지는 태평양이 내 앞에 있었다.


  빼밀리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나의 가족이 되어 주었다. 빈 방이라고 하기에는, 4인 1기숙사보다 더 큰 방을 내어주었다. 11시까지 자고 일어나도 '왜 이리 일찍 일어났냐'며 더 자고 일어나라고 했다. 늘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먼저 물어보았다. 가인의 어머니는 삼일에 한 번씩 가오슝 시내나 대만 최남단 컨딩(墾丁) 관광 지구, 야시장을 데리고 가주었다. 가인의 여동생도 친언니보다 나를 더 따랐다. 나는 그곳에서 한없는 평화와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그곳 생활에서의 가장 큰 문제였다.

  스물여섯. 학교라는 한 단계를 넘어 다른 단계를 나아가야 하는 때라고 느끼는 나이였다. 그 나이에 나는 바다 앞에 멈춰 있었다. 대학원을 가거나 취업을 한 친구들의 연락을 멀리한 지는 꽤 되었다. 직장생활 2년 차의 애환 같은 건 나와 먼 이야기였다. 스물여섯의 나는, 아침 늦게 일어나 앞 가게에서 사 온 꽈배기와 우유를 먹고 무한도전을 보거나 슬램덩크, 프리즌 브레이크를 자막 없이 보곤 했다. 가끔 중국어 원서 책을 읽다가, 답답해지면 집 앞 바닷가를 거닐었다. 일이 없는 날은 두 시간, 세 시간을 바다 옆에 있었다. 멍을 때렸고, 알 수 없는 막막함에 울기도 했으며 나의 걱정을 반복해서 재생시켰다.  

  그 당시 나의 걱정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걱정이 없어도 되는가', 이 것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이 나이에, 이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게 시간을 보내도 된단 말인가.

 

  온도가 영상 18도인데, 스쿠터 타고 지나가는 이들은 패딩을 입고 목도리를 하고 털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나를 보았다. 나는 얇은 봄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들을 보고는 풉 비웃었다. 아무리 더운 나라라 해도 저건 너무 오버잖아. 이 봄날에 웬 패딩? 봄날, 봄날. 봄날이라기에 날짜는 1월 초였다. 연중 가장 추운 때. 그러니까 나는, 연중 가장 추운 때에 얇은 봄 셔츠 하나 입고 바닷가에 서있는 여자였던 것이다. 이런 미친. 그들의 눈빛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뭐라도 핑계를 대야 했다. 이상한 눈빛을 방금 거둔 그들의 뒤통수에 변명을 던졌다.

  "워스한궈런(韓國人), 한궈런!"

  "오, 한궈~!"

  그제야 그들은 나를 보고 웃으며 엄지를 올려 주었다. 엄지 뒤에, 태평양이 있었다. 한 겨울의 따뜻한 태평양. 그때서야 나는 내 걱정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보고자 하는 세상만을 바라본다는 것. 핑동의 주민들이 한겨울의 한국인을 이상하게 바라보았듯, 북방의 추운 나라에서 온 내가 따뜻한 섬나라의 겨울을 이상하게 바라보았 듯, 나는 내 발 디딘 곳에서 내 친구들의 세계만 현실로 인식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현실에서 벗어난 나 스스로를 내가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온전한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오로지 친구들의 그곳만을 현실로 인식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내 눈앞의 것들이었다. 모래밭과 가인의 집과 태평양, 이런 것이야말로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 마음의 시선만 이 쪽으로 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을 받아들이고 내 것으로 하면, 내가 붙잡고 있던 걱정은 실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이 시기에, 이 나이에 이렇게 걱정이 없어도 되는가.


그럼, 물론 그래도 되지. 인생 80년, 길게 100년 잡아 보고 20대에 1,2년 늦어지는 것 무어 문제 된다고. 앞으로 내가 살면서 언제 또 푸르고 검은 태평양을 매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어.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태평양을 바라보는 것, 내가 지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지금의 시간을 잘 다지는 것, 그것에 충실하면 돼. 지금 여기의 삶을 잘 살면 되는 것, 이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 나는 이곳에 온 것이었어.


  대만에서의 한 학기 내내, 그 하나의 고민으로 마음이 부글거렸다. 동아리를 하고 듣고 싶은 수업을 골라 다니고 여러 지역과 장소를 방문하면서도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당장 한국 들어가서 토익책이라도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들이 부글거리고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의 기숙사 침대에서 넘쳐흘렀고, 버스와 기차 창문가에서 끓어올랐다. 발은 타이베이에 두고 마음은 회사와 면접장에 있었다. 그렇게 이분화된 시간과 생활이, 태평양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합쳐졌다. 대만 생활에서 마음속 거품이 사라지던 순간이었다.

  서울에 가 있던 마음을 대만 핑동현 친구 집 앞으로 가지고 왔다. 몸과 마음의 위치가 같게 되었다. 그게 태평양 앞이라서 다행이었다. 멀리 있던 마음이 파도를 일으키며 몸이 서 있는 곳에 합쳐져 큰 해일이라도 일어날 줄 알았는데, 소리라곤 발 언저리의 작은 파도 소리뿐이었다. 그래서 더 좋았다. 바다보다는 덜 짠 눈물 역시 아무 소리 없이 흘렀다. 평안함의 결실이 눈물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태평양을 보며 다짐했다. 언제나 '지금, 여기'의 마음 자세로 살겠다고. 내 발이 디디는 자리에 내 마음이 서 있게 하겠다고. 그런 삶의 자세가, 내 남은 생을 채워나가게 할 거라고.

  소한 즈음의 어느 날, 태평양의 바람이 유난히 산뜻했던 오후였다.






  가인의 집을 떠나, 타이난과 타이중(臺中)의 친구 집에서 각각 이틀씩 머물고 타이베이로 돌아와 며칠을 쉬었다. 그리고 계획해 두었던 홍콩 여행을 다녀왔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보내고, 대만에서의 두 번째 학기는 첫 학기와는 다르게 보냈다. 본격적으로 한국어 수업반을 개설해 매일 수업하고 개인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만에서 좀 더 지내고 싶어 져서 여러 방법을 알아보며 지냈다. 일단 한국에 들어가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했다. 그렇게 스물일곱의 여름날 다시 인천공항을 밟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대만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석 과정에서의 인연이 남편을 내 앞에 데리고 왔다. 예정에 없던 결혼을 했고 예정에 없던 아이를 셋을 낳았다. 내가 대만에서 한가하고 평화로우며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동안 치열하게 회사 생활을 시작하던 친구들도 모두 아이를 둘씩 낳았다.

  "이렇게 애엄마나 될 줄 알았으면 고등학교 때 공부도 대충하고 대학교도 대충 가고 석사는 안 하는 건데. 봐봐, 다 똑같아. 남자는 회사원, 여자는 아줌마야. 여자는 애가 둘이냐 셋이냐 차이라도 있지, 남자들은 다 똑같은 아저씨야."

  친구의 말에 씩 웃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20대에 이것저것 하고 공부하고 싶은 것 다 해본 나도, 졸업과 동시에 명문대 석사하고 대기업 간 너도 결국은 애엄마로 통일되었구나. 그런데 말이지, 하나는 다를 텐데. 나에겐 파도가 있거든. 마음속 저 멀리서 부글거리며 밀려오는 파도, 태평양에서부터 온 하얀 파도.

  대만에서 돌아오고 나서 중국어 강의를 할 때도, 무역회사에서 일할 때에도 나는 자주 나의 '지금, 여기'를 불러왔다. 내 발 밑의 지점과 마음의 위치가 일치하는지 점검했다. 나 스스로삶의 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했다. 마음과 발의 거리가 멀어질 때마다 마음을 불러오곤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한동안은 태평양의 다짐을 잊었다. 우울과 아이를 함께 키우던 어느 날 빼밀리가 SNS에서 '진샤 잘 지내? 나 말레이시아에서 의사가 되었어'라고 소식을 전해 준 그때, 태평양의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다행히, 마음속 태평양은 여전히 검고 푸르렀다.

  나의 '지금, 여기'를 확인해 보았다. 수유쿠션, 수유패드, 손목 보호대, 수유브라, 신생아 싸개, 기저귀, 그리고 내 품에서만 자는 아기. 매일 반복되는 육아에 집을 도망쳐나가는 생각만 하던 나의 마음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나는 나의 집에서 나의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 그래, 지금 내가 엄마라면 엄마의 삶을 살자. 엄마로 최선을 다하자. 

  잠든 아이를 눕히고, 먹은 그릇을 치웠다. 깬 아이를 토닥이며 다시 재웠다. 이렇게나 작은 숨을 몰아쉬는 존재가 내 아이라니. 그날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엄마'로서의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요즈음도 태평양을 떠올린다. 나의 지금, 여기. 엄마로서의 삶, 아내로서의 삶, 그리고 하나 더, 글을 쓰는 삶.

  파도처럼 하얀 모니터를 앞에 두고 태평양처럼 푸르고 깊이 있는 글을 써내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한다. 내 글이 태평양처럼 푸르고 깊어질 수 있도록, 그저 꾸준히 쓰는 엄마로 지내고 싶다는 다짐을, 글을 쓰는 모든 순간 두드린다.   




* 개인적인 추억의 단편을 회상하는 글일 뿐, 특정 국가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나 편견을 드러내기 위함이 목적이 아님을 밝힙니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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