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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Aug 20. 2021

한로(寒露), 가을처럼 익어가는 엄마

절기의 일기, 한로(寒露)

  24절기 중 17번째 절기인 한로 즈음은 완연한 가을이다. 아침저녁의 이슬이 서리로 변하기 직전의 시기이고, 나무가 본격적으로 잎을 떨궈내는 때이다. 헛된 시절이나 속절없는 세월, 공허나 허무, 삶의 덧없음, 무상 이런 단어들과 어울리는 때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삼십 대 중반 처음으로 내가 이루어온 것들의 덧없음에 대해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더불어, 남은 생에서 내가 진짜 이루고 익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이를 키우기 이전의 삶을 떨어진 낙엽 더미에 던지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엄마'라는 이름으로 천천히 익어가는 것뿐임을, 차가워진 이슬을 밟으며 알게 되었다. 

 

한로






  그 시절 혼자 있던 시간의 대부분 내가 한 것은,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앉아 살랑살랑 발을 구르는 것이었다. 하늘을 보고 바람을 느꼈다. 그게 다였다.  


  아이를 낳고 첫돌까지, 32년 이전 인생과는 전혀 다른 1년을 살았다. 그 전 32년 인생은 차라리 우스웠다. 대부분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 환경이었으나, 그런 환경 안에서도, 일단 결정만 하면 내 맘대로 되는 인생이었다. 그 안에서 행복하고 자유로웠으며 안온했다. 

  아이와 함께한 1년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내 자유는 아이에게서 허락되었다. 나의 인격, 나의 자존, 나의 존재 이유 하다 못해 나의 이름마저 모든 것은 '아이'의 부차적인, 하부적인 것들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건 그런 거였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자신을 낳아준 존재도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렇게 1년을 넘게 키우고 15개월이 되던 어느 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거의 처음으로 남편을 거역한 결정이었다. 아이는 엄마 손에 커야 한다는 남편의 심중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를 내가 키우다가 내가 진짜로 없어질 것만 같았다. 나도 무서웠다. 언제 어디서 내가 나를 없앨지 몰랐기에. 

  "요즘은 다들 어린이집 일찍 보내요. 아이에게도 짜증만 내는 엄마랑만 있는 것보단 그게 더 좋을 거예요."

  남편의 어쩔 수 없는 끄덕거림이 무거워 보였지만, 그 덕분에 내 마음은 가벼워졌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고 적응기간이 끝나는 즈음 미량의 가을이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종일 하던 육아도, 전화 한국어 수업도 잠시 멈추었다. 아이를 업고 이유식을 만들며 수업을 하던 6개월을 뒤돌아 보니, 왜 그리도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나 싶었다. 내 앞에 놓인 모든 여유를 즐기고 싶어서, 아이를 보내고 집에 오는 길의 놀이터를 자주 들렀다. 

  아이를 앉히던 그네에 앉아 혼자 발을 굴렀다. 그네는 나의 자유만큼 움직였다. 내가 원하는 만큼만,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나'를 잊은 마음에 온전한 '나'로 다닐 길이 넓어지고 있었다. 바람 하나면 족한 그런 길이었다. 

  이 시절은 한 계절을 다 채우지 못했다. 돌이켜 보니 그때만큼 아쉽고 애처로웠으며 달았던 때가 없다.



  어린이집을 가게 되면 잔병치레할 거란 말은 많이 들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늦여름이어도 아이는 자주 코를 훌쩍거렸다. 하원길에 병원 들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도 건강한 아이여서 하루 이틀이면 또 괜찮아졌다. 모유수유 14개월의 힘이라고, 잔뜩 모유수유 부심을 부릴 때였다. 

  금요일 오후 하원한 아이가 뜨거웠다. 38.6도. 해열제는 두 시간을 채 못 갔다. 교차 투여를 해도 아이는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열이 조금 내리면 잘 놀다가 열이 오르면 엄마에게 매달렸다. 육아 선배들인 대학 동기들 단톡에 계속 상황을 보고 했다. 저녁 8시가 넘자, 반의사인 친구가 한 마디 했다.

  "오늘 밤은 보초 서야겠네. 진샤, 각오하고 힘내. 혹시 애가 늘어지면 바로 응급실 가고."

  그동안 단톡방에서 많이 봐온 단어였다. 보초. 어제 밤새 보초 섰어, 새벽 5시까지 보초 서고 뻗었다, 같은 묵직한 문장 안에서였다. 나도 드디어 보초서는 날을 맞게 된 것이다. 10시, 12시 해열제를 먹였다. 2시부터는 해열제를 먹인 후, 미지근한 물을 손수건에 적셔 연신 아이의 온몸을 닦아 댔다. 그래도 아이의 볼에 붉은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식은땀은 더했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아이가 뒤척대면 내 손은 자동으로 아이 이마부터 짚었다. 잠을 몰아낼 정도로 뜨거운 열이 아이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냥 열감기인 줄 알았는데, 그냥 열감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12시간이 지나자 무서워졌다. 

  친구들은 아무래도 응급실을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가까운 데 좀 큰 데로 가 봐, 괜히 어설픈 데 가서 오진받지 말고. 뜨거운 아이를 얼싸안고 대형 병원 도착한 것은 아침 8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모세기관지염'이란 말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쯤 후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입원하고 약을 쓰면서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입원'은 두 글자뿐이었는데, 지난 20시간을 복기시키는데 충분한 위력을 지닌 단어였다. 가을바람이 부는 데 나는 왜 애기 자는 동안 수건 한 장 덮어주지 않았던 걸까, 땀을 흘리면 닦아줘야지 그걸 그냥 두고 선풍기나 틀어주는 어미라니. 저녁에 뭘 먹었더라, 그게 소화가 안 됐나, 소화 안 되는 거랑 모세기관지염이랑 상관이 있나. 어제저녁이라도 와볼걸, 난 왜 내가 고생하면 애가 좋아질 거라 생각한 거지, 괜히 보초나 선다고 잠만 못 자고. 

  이런 조그만 몸에 맞는 입원복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입원복을 입고 나를 보고 웃는 아이 앞에서 참은 눈물이 터졌다. 운다고 뭐가 해결되지 아니었지만, 이건 6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지만, 눈물이 나는 것 또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때부터 나는 거의 모든 상황을 통해 깨달았다. 내가 어찌한다고 해결되는 게 거의 없는 일, 그게 바로 아이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다행히 빈 침대는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는 단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운이 넘치는 17개월 아기였다. 집에서 갖고 온 장난감이고 책은 무용했다. 5분을 집중하지 못했다. 아이는 지겨워서 소리를 질렀고, 나는 옆 침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안해요,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죄책감'이 내 안에서 넓은 길을 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수습될 틈도 없이 아이는 침대에서 들뛰고 링거줄을 잡아당겼다. 바늘 꽂힌 부분에 피가 걸핏하면 거꾸로 올라왔다. 하도 뛰어대서 역류를 하는 것이다. 

  보다 못한 옆 침대의 시크한 표정의 아이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줌마, 아기는 뽀로로 안 봐요?"

  그때까지 나는, 아이에게 미디어는 독이라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집에서 티브이를 열심히 보긴 했다. 육아 우울을 잊는 시간은 티브이를 보는 시간과 같았다. 무한도전이나 태양의 후예를 열심히 봤다. '같은 대위인데, 유 대위랑 우리 집 대위는 왜 저렇게 달라?'라는 친구의 문자에 '미안하다, 소령이라 모르겠다'라고 말하면 '재수 없는 년'이라고 친구가 답했다. 서로 낄낄댔다. 내가 낄낄대는 사이 아이가 티브이에 집중하면 바로 껐다. 나는 괜찮아도 아이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의 아이는 당연히 뽀로로를 안 봤다. 

  "애기 시끄러우니까, 뽀로로라도 보여 줘요."

  정윤이 어머님은 '아유, 죄송해요, 우리 애가 말을 못되게 해요'라고 하셨지만 나는 어느새 뽀로로를 검색하고 있었다. 동영상을 들이밈과 동시에, 나의 아이는 온순해졌다. 동시에 나의 박동도 온순해졌다. 이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정윤이 어머님이 조용히 입을 여셨다.

  "첫 애 처음 입원인가 봐요. 저도 얘가 그때부터 입원을 하기 시작했어요. 자꾸 아파요. 일 년에 두세 번을 입원해요. 빠르면 일주일, 늦으면 두세 달만에 퇴원해요. 학교를 잘 못 가니, 성격도 지랄이에요. 말도 그래서 막 해요. 이게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요."

  엄마의 말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아닌 척하는 건지, 정윤이는 보던 패드에서 눈도 안 떼고 말했다.

  "저는 포비를 제일 좋아해요. 해리는 너무 시끄러워요. 저런 아기들은 루피 많이 좋아하던데."

  4학년이라는 정윤이가 우리 애 만할 때부터 입원을 한 거면, 거의 10년을 병원과 친하게 지낸 거였다. 어쩐지. 나는 매번 남편한테 수건 갖고 와라, 슬리퍼 갖고 와라, 과도 갖고 와라 하는데, 그분은 입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정윤이와 내 아이가 각자의 영상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정윤이 어머님과 나는 각자의 아이에 집중했다. 


  병원에서의 첫 밤이 되었다. 늦어도 11시면 잠드는 아이가 1시가 넘어도 잠들지 않았다. 병원의 공기와 기운이 아이를 그냥 두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나왔다. 복도의 조명이 듬성듬성 켜져 있었다. 휠체어를 밀고 복도의 끝에서 끝까지 여행을 했다. 반짝반짝 작은 별이나 엄마가 섬그늘에 같은 노래를 쉬지 않고 불렀다. 휠체어가 조금이라도 멈추면 아이는 울었다. 조용해야 하는 곳이었기에, 나는 조용한 복도를 조용히 걸으며 조용히 노래를 불러 아이를 조용히 시켰다. 

  화장실을 가고 싶었지만, 아이는 여전히 잠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기운이 넘치는 시기라 기운을 써야 하는데, 종일 좁은 침대를 못 벗어나니 기운 쓸 일이 없었던 탓이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를 부르다가 울컥하고 눈에서 쏟아져 나왔다. 졸리고 피곤했다. 화장실도 가고 싶고 세수도 하고 싶었다. 1차원적인 서러움이었다. 

  그때의 아이는, 내가 안 보이면 뒤집어지게 울었다. 그래서 화장실 갈 때도 늘 내 무릎 위에 안겼다. 수액 바늘을 꽂고 있는 아이를 안고 화장실을 가기엔 나도 많이 지쳐 있었다. 잠들면 가려했는데, 아이가 잠들지를 않는다. 희미한 복도 구석에 휠체어를 세웠다. 나를 보고 있는 두 눈을 앞에 두고, 최대한 조용히 꺽꺽댔다. 아가, 미안해. 이렇게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근데 엄마가 정확히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그것도 미안해. 그런데 엄마 지금 좀 지쳤어. 꼴랑 하루 이러고 지친 것도 미안해. 좀 빨리 자주면 안 되겠니. 잠이 안 오는데 자라고 해서 그것도 미안해. 그런데 엄마 지금 너무 힘들어. 

  어두운 구석에서 빨간 눈을 하고 나오는 어미에게 한 간호사가 다가왔다.

  "어머니, 아이는 제가 조금 보고 있을게요. 저기서 조금만 눈 붙이세요."

  간호사의 손 끝에 복도 의자가 있었다. 엄마와 떨어지면 통곡을 하는 아이라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는 내 몸 상태도 걱정해야 했다. 

  "죄송하고 감사해요. 이런 아이들이 또 있었나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있어요. 아이들은 원래 엄마 마음처럼 안 돼요."

  간호사의 웃음은 옅었는데, 내 기억 속엔 생각할 때마다 매번 더 진하게 느껴진다. 간호사는 알기나 할까, 그때 그 엄마가 6년이 지나도록 자신의 미소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의 휠체어가 멀어지는 걸 보면서 눈이 감겼다. 


  깨우는 손에 눈이 떠졌는데, 손의 주인은 그분이 아니었다.

  "아, 정간호사님 퇴근하셨어요. 아이는 잘 자고 있어요. 20분 전에 잠들었대요."



  병실로 가서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보조 침대에 구겨졌다. 건조한 눈으로 창문을 밀고 들어오는 새벽빛을 바라봤다. 

  20대, 이런저런 일을 해보면서 인생을 배운다고 생각했다. 수고와 보수의 관계, 노력과 득실에 대해 따지는 시간들이 있었다. 심리학 책을 읽고 존재에 대해 꽤 오래 사고했다. 공부가 좋다고 뒤늦게 석사도 했다. 사회에 대해 뜨겁게 토론하는 시간이 많았다. 원하는 영역 안에서,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결실을 맺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어느 책에서, 결혼이 서울에서 부산으로의 이사 정도라면 출산과 육아는 지구에서 다른 행성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했는데 딱 그렇게 느껴졌다. 석사 논문은 라면 받침대로 좋았다. 지난 일 년간 내 손은 육아용품 검색과 기저귀 주문에 익숙해졌다. 그동안 배우고 느끼고 결실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내 삶에서 한 순간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나는 한순간 '진샤'라는 인간에서 '아이'의 양육자 신분으로 궤도 이탈했다. 충분히 적응 가능한 이탈이라고 생각했는데, 하고 보니 속도와 주기 모든 면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몸이 아팠고 빈혈과 어지러움이 24시간 함께 했다. 아이 밥을 먹이다 내가 구토를 하고 입을 헹구고 다시 밥을 먹였다. 그런 삶을 살고 있었는데, 몇 년 앞서 육아를 한 친구들은 하나 같이 똑같이 말했다.

  "그래도 그땐 몸만 힘들잖아. 좀만 더 지나 봐. 몸도 힘들고 마음도 힘들어진다."

  육아가 이런 거고 엄마 되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어쩜 이리도 한 명도 제대로 이야기해주지 않았을까. 다들 왜 '힘들어'라고만 말하고 '미칠 듯이, 죽도록, 눈물 나게 힘들어'라고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임신 중의 나는 '육아의 지난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하긴, 그렇게 말해줬더라도 여전히 와닿지는 않았을 거다. 열이 나는 아이를 안고 그보다 더 뜨거운 눈물을 밤새도록 흘려 보거나, 밤새 잠들지 않는 아이를 데리고 어두운 복도를 몇 시간씩 배회해 보지 않았으니, 출산 전의 나에게는 그 어떤 말도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유난히 병원 공기가 무겁게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지던 그때에, 의사 선생님이 아침 순회를 왔다. 

  윤정이에게는 차도가 좋아 내일이면 퇴원할 수도 있겠다고 웃으시던 분이, 우리 아이에게는 '염증이 심해졌어요. 내일도 봐야 할 것 같네요'라고 차갑게 말했다. 같은 분 맞아? 왜 우리 아이한테만 저렇게 차가워? 도대체 내 아이는 왜 염증이 생기고 난리냐고! 왜 저런 말만 해주고 그냥 돌아서서 가냐고! 

  탓할 대상이, 의사 선생님의 등뿐이었다. 그날 내 폰은 종일 아이에게 있었다. 아이는 뽀로로 시리즈를 다 보고도 또 보았다. 나는 그저 아이와 크롱과 패티와 에디를 번갈아 보았다. 기운이 없었다. 식사가 와서 폰을 멈추면 아이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다시 폰을 보여 주고 밥을 먹였다. 병원도 폰도 뽀로로도, 그걸 그냥 보여주는 나도 다 싫었다. 다 나 때문인 것만 같아 싫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었나 보다.

  "ㅇㅇ엄마, ㅇㅇ엄마 때문이 아니에요. 아이 폰 좀 본다고 잘못 크지 않아요. 지금은 아이가 낫는 데만 집중해요."

  엄마 나이 11살이 되면 그렇게 엄마 나이 1살의 마음이 다 보이나 보다. 덕분에 조금 기운이 났다. '아기, 아 해 봐' 하면서 밥을 먹일 수 있었다. 입 닫고 손으로만 먹이던 창백한 엄마에서, 조금은 발그레하고 수다스러운 엄마로 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퇴원수속을 하러 다니느라 정윤 엄마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하루 만에 염증이 좋아진 우리 아이와 달리 정윤이는 수치가 더 나빠졌다고 했다. 짐을 싸고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빴다. 퇴원 처리를 하고 오니, 정윤 엄마가 내 아이 옆에 앉아 있었다. 

  "광고 나오니 싫어하길래 넘겨줬어요."

  정윤이는 늦게까지 자고 있었다. 좀 더 야윈 듯했다. 우리 아이가 좋아진 건 좋은 일인데, 정윤 엄마에겐 그마저도 미안했다.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일은 아니었다. 엄마에겐 모든 일이 그랬다. 늘 내 잘못 같고 늘 미안하고. 

  "아이 잘 키우세요."

  네, 감사합니다. 나의 대답은 이 여섯 글자뿐이었다. 가난한 대답. 그땐 엄마 나이 고작 한 살이라 '정윤이도 빨리 퇴원하길 기도할게요'같은 말을 붙일 여유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또 미안해진다. 11살 치고 작았던 정윤이와, 그 아이를 위해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인생의 반을 병원에서 보내는 그 엄마 모두에게. 


  확실히 아침 공기가 달랐다. 길바닥의 나뭇잎이 입원하던 날보다 더 많이 쌓여 있었다. 아이 옷을 한 번 더 여몄다. 눈에 공기에 내 손끝에 가을이 가득했다. 문득, 가을과 엄마는 같은 존재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은 자신이 작정하고 나뭇잎을 떨구고 여름의 생명들을 물러가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가을이기에 그렇게 될 뿐이다. 엄마도 그렇다. 작정하고 아이들을 아프게 하고 주위에 불편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엄마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병원을 나온 날 하필 가을이 있어서, 마치 나 같아서 조금은 다행이었다. 

  백로가 며칠 지난 어느 화요일 아침이었다. 






  다음 해 백로를 지나고는 둘째를 낳았다.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둘째는 '요로감염'으로 입원했다. '기저귀를 오래갈지 않으면 요로감염에 걸려요'라는 의사의 말이 지금까지 내 영혼에 뜨겁게 흉터로 남아 있다. 둘째의 입원도 또, 내 잘못 때문이었다. 기저귀만 제때 갈아줬어도 입원은 안 했을 텐데. 

  둘째 입원 기간 동안 병실이 비지 않아 소아응급실에서 10시간 정도 대기를 했었다. 지구 상에 생지옥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었다. 대학병원 소아응급실은 다 한 순간도 절규가 끊이지 않는다. 헬기와 앰뷸런스가 끊임없이 죽음 직전의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죽기 싫다고 울어대는 삶 속에, 그들의 절규 속에 부모의 흐느낌이 겹쳐져 있었다. 어떤 이들은 아이보다 더 크게 소리 질렀고 어떤 이들은 눈을 감고 눈물만 흘려보냈다. 울음의 종류는 달랐으나 마음은 다들 같았다. 미안해, 엄마가 아빠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제발 아프지 말아 줘, 원래대로 돌아와 줘. 

  울음의 너울 속에 나와 둘째도 있었다. 내 품 안의 아이도 열이 펄펄 끓었다. 그 열은 나에게도 옮겼다. 둘째 입원 내내 나도 고열에 시달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모와 자식 모두 뜨거웠던 2박 3일, 내 입을 가득 채운 말도 역시나 하나였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어제도, 그저께도 그랬다. 아이들에게 저 말들을 했다. 주변 엄마들에게, 마트 계산원에게도, 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했다. 죄송해요, 제가 아이를 잘 못 봤어요, 죄송해요, 우리 아이가 그랬네요, 미안해요, 빨리 입금할게요, 아휴 죄송해요, 깜빡했네요. 

  엄마 나이 7살이 되니, 내 안에 죄책감이 낸 길이 왕복 16차선은 되는 듯하다. 그 길을 매일, '미안한 감정'이 내달리고 있다. 감정의 대상은 대부분 아이들이다. 이것밖에 안 되는 엄마라, 늘 미안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럴 때면 가끔, 정윤 어머니의 눈가 주름이 떠오른다. 그분 눈가의 주름이 그 정도가 되기까지, 도대체 마음에 얼마나 넓은 죄책감의 길을 내온 걸까. 그 길과 주름 사이로 오간 회환의 감정과 세월을 표현 가능한 단어가 있기는 한 걸까. 


  나의 이런 감정들과 '엄마'라는 존재의 역사 가운데에 가을이 비스듬히 있다. 엄마와 가을, 쓸쓸하고 외롭다. 때때로 왕성한 생명을 아프게도 한다. 아프게 하는 데는 이유나 의도가 없다. 그저 가을이라서, 그저 엄마라서 그렇다. 

  엄마도 가을도, 모두 '익히는' 존재이다. 가을은 벼와 곡식과 과일을, 엄마는 육아의 기저에 깔려 있는 죄책감과 들끓는 감정들을. 그 과정을 지나면서 성숙하고 단단해진다. 수많은 죄책감을 익혀내는 시간을 거치면서 마음의 자세가 낮아진다. 

  미안하고 죄송한 감정의 계단을 밟아오다 보면, 차가운 이슬이 맺히는 걸 몇 차례 보고 나면 어느새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훌쩍 자란 아이들, 평수가 넓어진 마음과 단단해진 감정 결, 조금은 옅어진 죄책감, 인격의 성숙, 그런 것들을 생의 결실로 품는 가을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엄마가 되고 나서 가을의 이면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아픈 계절, 그래야만 익을 수 있는 계절. 나도 엄마라서, 그렇게 아프게 익어가고 있다.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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