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의 일기, 추분(秋分)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절기가 있다. 춘분과 추분. 춘분을 지나 낮이 밤보다 길어진다면, 추분을 기점으로 밤이 낮보다 길어진다. 추분, 발음처럼 가을이 일상의 모든 것에 서려 있고 우리는 더 이상 가을을 낯설어하지 않게 된다.
본격적인 가을의 시작을 앞에 두고, 나는 내게 다가온 수많은 인생 선배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가르친 건 단 하나뿐이었지만 그들은 나에게 그들이 걸어온 인생을 통째로 가르쳐 주었다.
나는 어쩌면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정된 시나리오는, 교환학생에서 돌아오면 대학원 입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던 소식은, 지도교수님으로 생각하던 분이 서울대로 옮기셨다는 것이었다. 그리 놀랍진 않았다. 교수님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나의 철학 공부는 여기 까지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발 빠르게 휴학계를 냈다. 퇴학계와 휴학계 가운데서 조금 고민했지만, 인생은 어찌 될 줄 모르는 것이니 약간의 보험은 필요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돈을 벌기에 스물일곱은 늦은 나이였다. 대만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다 왔는데, 아직 그 행복감이 가시지 않았다. 가르치는 일을 하자.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중국어와 한국어뿐이었다. 닥치는 대로 지원하고 면접을 보고 연락을 기다리고 까이고 조금 슬퍼하고 다시 지원하고를 반복했다.
한 달의 방황 끝에 내 정착지는 여의도였다. 슬램덩크의 서태웅처럼 '집에서 가까워서요'가 가장 큰 이유긴 했다. 집에서 가깝고 중국어를 가르칠 수 있었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았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았는데,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다른 것'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영어 공부와 복식 발성이었다.
평생 영어를 가르쳐온 원장의 마인드는, 영어가 외국어의 기본이라는 것이었다. 중국어를 하는 애들은 영어를 우습게 봐, 그래선 아무것도 못해. '우습게 본 게 아니고 그냥 영어를 못하는 거예요'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도 유치한 대답이라 그 말이 마음속에서 새 나오지 않게 하려 꽤나 애를 썼다. 여기서 중국어, 일본어 가르치는 강사들은 다 영어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해. 내일 새벽 타임 CNN 수업 들으러 와. 네. 내 입에서 나온, 군말 없는 '네'라는 대답이 간결해서 나도 좋았다.
6시 40분 수업 이랬는데, 6시 30분에 도착해도 자리는 거의 없었다. 뉴스 앵커의 빠른 발음 스피킹과 그만큼 빠른 강사의 한국어 덕분에 한 시간이 어찌 지난지도 모르게 휘몰아쳤다. 한 시간 더 들어, 라는 원장의 말에 폭풍 같은 한 시간을 또 견뎌냈다. 아침 두 시간을 미쿡 뉴스로 보내고 나니, 어디든 눕고 싶어 졌다. CNN 선생님은 흐물흐물해진 나를 일으키더니, 텅 빈 강의 실 가운데에 세웠다.
배에 힘을 주고 발성하란다, 복식 호흡을 가르치겠단다. 아.. 저기, 선생님, 제가 복식으로는 선생님을 앞설 수도 있겠습니다만... 역시 경험은 해두면 언제 어디선가는 빛을 발하는 법이다. 21살 원어연극에 젊음을 쏟은 때, 매일 발성연습만 두 시간을 했다. '패왕별희'의 한 장면처럼 모두가 앞을 보고 서서 자신의 대사를 쏟아냈다. 두 시간을 소리를 지르고 목이 쉬면, 선배 목에서 피가 터질 때까지 혼이 났다. 배로 소리를 내야 목이 안 상해! 그때에 배운 복식 발성에, 2년 이상 매일 아침 수련(?!)한 복식 호흡으로 나는 비공식 '복식'전문가였다.
"오, 쫌 하네?"
쫌 하는 수준이 아닐 걸요? 보란 듯이 발성 호흡과 소리를 내질렀다. 강사에게 생명 같은 목을 보호하게 하는 교습소라니, 더 마음에 들었다. 중국어 강사에게 영어를 공부하게 하고, 기본 발성을 가르치고, 외국어 학습법도 어설픈 교재 공부나 문법 위주가 아닌 듣고 따라 하기 즉 쉐도잉 연습 방식으로 하고, 모든 것이 좋았다.
딱 하나 월급이 안 좋았으나, 월급으로 대체 불가능한 가치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렇게 10일의 강사 수습생 기간에 인수인계를 받으며 정신없이 가을을 맞이했다. 내 손에 넘어온 출석부에 적힌 수강생은 7명이었다. 그들의 이름에, 내 스물일곱의 추분이 스며들고 있었다.
다행히 수강생 분들은 큰 동요 없이 잘 적응해 주었다. 수업 방식과 연습 시스템이 있어서, 강사가 바뀌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나 역시 대만에서 1년을 가르친 경험 덕분에 크게 긴장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와 수강생들이 친해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니 문제라 할 것도 없었다. 나의 자신감이 수강생들에게 매력으로 전환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을 시작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점심 수업에 갑자기 뛰어들어 오신 분이 있었다. CNN 수업을 청강하던 며칠 그때에, 늘 옆에 앉으시던 선생님이었다. 머리가 조금 벗겨졌고 안경을 쓰시고 늘 한결같은 자세로 열심히 수업에 임하시던 분. 나 역시 수업을 하다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 꽤 큰 노력이 필요했다. 그분도 놀라셨을 테다. 영어 수업 같이 듣던 젊은 여자가 갑자기 중국어 반에서 수업을 하고 있으니. 그분은 갑자기 들어와 빈자리에 앉으시더니, 마치 전생에 중국인이었던 것처럼 잘만 따라 했다.
"김 선생님 중국어 배우셨었나요?"
"아니요, 처음입니다. 선생님 수업이 너무 좋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초급반이긴 해도, 한국어의 ㄱㄴㄷㄹ 격인 '뽀포모퍼(bopomofo)'부터 하는 수업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분은 매일 점심 수업 시간에 오셨다. 점심을 거의 드링킹 하다시피 하고 수업에 오는 거라고 하셨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으로 듣고 따라 했다. 수업이 끝나면 늘 단상으로 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고 나가셨다. 나는 그분을 보며, 살면서 처음으로 '성실'이라는 단어의 뜻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분을 위해 주말 입문반을 만들었다. 입문반이 없었던 학원인데, 순전히 그분을 위해 만들었다. 학원에도 공지가 떴고, 몇몇 분이 토요일 아침을 나와 함께 했다. 입문반 3개월이면 초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분은 그 3개월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몇 번의 출장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주중 수업과 주말 수업들을 빠지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른 수업을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 토요일 특별 수업을 하고 있었다. 시사 중국어나 영화 중국어, 성어 수업 같은 것이었다.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어서 했지만, 순전히 내가 재미있어서 하는 수업이었다. 그분은 내가 하는 모든 수업을 들었다. 2년이 조금 안 되게 수업을 하는 동안 아파도 슬퍼도 기뻐도 바빠도 나오셨다. 마지막 몇 번은 HSK 문제집을 들고 와 물으시더니, 결국은 6급 합격증을 보여 주셨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도, 그분도,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나의 덕분이 아니었음을, 그분의 온전한 노력과 열정으로 이루어낸 결실이라는 것을.
점심 반에 진(金)셴셩(先生)이 계셨다면, 새벽반은 박 선생님이 계셨다. 70대이신 퍄오(朴)셴셩은 집이 학원과 가까웠다. 은퇴하고 자식들도 시집 장가 다 보내고, 학원에서 공부하는 재미로 여생을 보내는 분이었다. 늘 새벽에 강사들보다 일찍 학원에 도착해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어두운 복도에서 강사들을 기다리는 동안 중국어 단어장을 손에 쥐고 계셨다.
아침 첫 시간은 중국어를 들으시고, 두 번째 시간은 일본어를 들으셨다. 집에 가셨다가 점심시간이면 CNN 반에 계셨다. 선생들 목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라고 자주 말해 주셨다. 단어 시험은 늘 100점이었고, 보란 듯이 아름다운 번체자로 써내셨다. 취미와 시간 보내기로 공부를 하시는 분이셔서, 틀린 발음을 굳이 교정해 드리지 않았다. 이미 발음과 성조는 중요하지 않은 분이셨다.
가끔 중국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있을 때면 선생님의 눈빛이 달라지곤 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의 개인사가 덩달아 궁금해졌다. 수업이 끝나고 여쭈어볼 날도 있었다. 선생님 중국어는 언제부터 배우셨나요, 젊으셨을 땐 무슨 일을 하셨나요, 중국에 대해 어찌 이리도 조예가 깊으신가요.
그때부터는 할아버지와 다 큰 손녀 같은 사이가 되었다. '김 선생, 내가'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은 재미있었고, 길었다. 다음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도 끝이 없어서 난감한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나 생의 깊이가 깊으신 분이 나의 수업을 들어준다는 것이 점점 영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새벽반의 특성상, 인원이 많지 않았다. 눈이 심하게 오는 날이면 가끔 교실이 텅 빌 때가 있었다. 그분은 내게 먼저 문자를 주셨다.
'오늘은 학생들이 못 올 거 같아요. 나는 혼자 공부하면 되니 김 선생 천천히 조심히 와요.'
문자를 보고 지하철역까지 괜히 더 뛰었다. 15분을 늦어도 그저 '김 선생 천천히 오라니까, 수업은 중요하지 않아요'라며 말씀하시는 분이셨다. 늦게 온 나는 대놓고 '셴셩, 오늘은 제 선생님이 되어 주세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인생 선생님이, 나는 앞자리에 앉아 다 큰 손녀가 되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분이 살아온 생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웃음도 나고 눈물도 나고 탄식도 나왔다. 625와 서울 수복 같은 말이 교과서 밖에서 뛰쳐나왔고, 중동 파견이나 8,90년대 호황기 잘 나가는 사장님 이야기에서는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부모를 한 날 한 시 보낸 사연이나 첫 손자를 잃은 대목에선 굳이 눈물을 참지 않았고, 그러면 어르신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셨다. 할아버지의 냄새가 났는데, 그건 70년을 기다렸다가 내게 온 냄새였다. 냄새마저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아침반 수업이 시작되면 그분은 일본어 반으로 넘어가지 않고, 다시 점잖은 중국어반 학생이 되어 주셨다.
가끔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계실 때가 있으셨는데, 졸으신 건지 생각에 잠기신 건지 궁금했다. 끄덕끄덕 하신 거로 보면 졸으신 것 같지는 않다. 수업인지 추억인지, 그 끄덕임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만나 뵈면 여쭤보고 싶은데, 만나 뵐 가능성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내 수업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건 변 선생님이었다. 삐엔(邊)셴셩은 증권맨의 모범이었다. 큰 키에 정장은 늘 잘 어울렸다. 슈트핏이란 단어는 그를 위해 태어난 단어였다. 서글서글한 웃음이 눈꼬리와 입 끝에 멈춘 적이 없었고, 신사 다움은 목소리와 몸짓에 넘쳐흘렀다. 유머와 위트와 센스와 영민함은 그와 같은 쾌남들이 기본으로 장착하는 요소였다.
상해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회사 근처에 중국어를 접할 곳이 이곳뿐이라며 초급반인데도 수업을 들으러 왔다. 초급반에서 재수 없게 느껴질 정도로 유창하게 선생님에게 농담을 던졌다. 농담을 안 받아주는 척하느라 꽤나 맘고생이 심했다?! 눈치를 챈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수업이 끝나고 따로 수다를 떨고 갔다. 최근 중국의 경제 변화와 문화에 대해서 중국어로 쏟아내고, 나는 그의 중국어를 교정해 주었다.
그때부터였던가. 그의 오른손엔 캔커피가 있었다. '조지아'를 보면 지금도 그분이 떠오르는 이유다. 캔커피에는 한결같이 '김 선생님에게만 드리는'이라고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날씨에 맞게 시원하고 적당히 미지근하고 따끈했다. 그 온도는 20대 여자가 혼자 착각을 하고 오해하기 좋은 온도였다. 친구가 '그 아저씨 끼 부리네'라고 말해서, 착각과 오해가 매일의 크기만큼 커졌다. 점심 수업 15분 전부터 심장이 촐싹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할수록 얼굴은 더 빨개졌다. 혼자만의 감정이었지만, '혼자만은 아닐지도 몰라'라는 생각에 캔커피를 함부로 못 마시는 날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월요일은 다가왔고, 그는 주말에 가족과 얼마나 행복한 여행을 다녀왔는지를 중국어로 이야기해 주었다. 덕분에 위험한 상상까지 가지 않을 수 있었고, 그를 내 안에서 '이상적인 남편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결혼 생각은 없지만, 만약에 결혼을 하게 되면 변 선생님 같으신 분이랑 해야지. 더 위험한 관계가 될까 봐(....) 나는 그에게 저녁 수업을 권했다. 저녁 수업에는 소영 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3살 많은 소영 씨는 중견그룹의 팀장이었다. 중국 관련 업무가 많아 중국어를 반드시 배워야 했다. 저녁 수업은 거의 소영 씨 혼자 뿐이어서, 그녀에게 맞춰 진행할 수 있었다. 수업 자체를 중국어로 하고 교재보다는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했다. 변 선생님도 중급 이상 수준이었던 저녁 수업을 좋아했다. 셋은 대놓고 중국 문화와 먹거리와 중국인들의 특성에 대해 자주 토론을 했다. 중국어 전공자와 무역 관리자, 증권 관계자가 중국을 보는 방식과 시선은 달랐다. 중국인들의 사업관과 세계관, 역사관, 정치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한 시간 반은 금방이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 저녁 수업의 모토였다.
그 와중에도 변 선생님은 캔커피를 잊지 않아 소영 씨의 이상한 눈빛을 받아야 했다. 우리 관계에 대해 설명해도 소영 씨는 웃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변 선생님이 진라오스(金老師)를 유난히 아끼시네요, 라며 그를 쏘아봤다. 변 샘은 '그런가요, 하하, 그런가 봅니다'라고 대답해서, 옆의 두 여자를 더 당황스럽게 하곤 했다. 그의 끼(!!)를 슬슬 즐기기 시작한 어느 날, 허선생님이 저녁 수업을 오셨다.
그는 소영 씨 회사의 대표이사였다. 점잖으신 인상이셨다. 선생님께선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수업하세요' 라 하셨는데 그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저녁 수업 청강을 들은 다음 날 허선생님은 5명을 더 데리고 와 등록했다. 회사의 모든 중국 관련 업무자들을 다 데리고 오신 것이다. 김 선생님만 믿고 공부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날부터 허선생님과 아이들(?!)은 점심 수업의 주축이 되었다. 직원들 점심은 먹이시나요. 점심시간을 조금 앞당겼습니다. 어이구,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수업 직전에 다 같이 전날 복습까지 하고 온다는 그들 덕분에 점심 수업의 열기는 최소 5도는 더 올랐다.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 때문이었을까. 매일 지각하던 이들은 수업 이전부터 오게 되었고, 가끔 나오던 이들도 그들의 열정에 전염되어 매일 나오게 되었다. 수업 정시에 와도 자리가 없어 서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3개월 즈음이 지나고, 허선생님께서는 수업이 끝나고 나를 부르셨다.
"진라오스(金老師), 열심히 하는 학생들과 한 끼 하고 싶은데.. 매일 앞자리 계시는 김 선생님이랑 변 선생님이랑 우리 김 팀장이랑 괜찮으시겠어요?"
얼마 후, 허선생님을 중심으로 네 명은 수업이 끝나고 여의도의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크게 별 것 없는 식사였다. 간단히 자신이 하는 일을 소개했고, 중국어를 배우게 된 동기나 수업 시간에 배웠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의가 갖추어진,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들 나를 선생님으로 불렀으나 그중 내가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그날 나눈 많은 이야기 가운데, 허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여기 계신 분들 다 알고 계시겠지만, 어떤 일을 하든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사람'이에요, 김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나 좋은 분들과 매일 한 시간씩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중국어를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즐거운 수업을 이끌어주는 김 선생님 분위기와 그 안의 사람들의 힘이 좋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커서 오늘 이렇게 따로 시간을 부탁드렸어요."
피곤하고 지치고 졸려도 수업 시간만 되면 살아나는 이유가 학생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집중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내가 더 집중하게 되었고, 그들의 눈빛에 내가 더 힘을 내게 되었다. 아픈 곳이 있어서 수업이 끝나고 나면 안 아프게 느껴졌다. 내가 그들에게 받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에게 받는 것, 이라고 표현하기엔 표현 자체가 너무 가난해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학습에 대한 열정, 자신의 직장에서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성실함과 꾸준함, 감사와 예의 같은 것들이 넘치는 현장 한가운데에 내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번의 추분을 보냈고 두 번째의 추분이 오기 전 그만두었다. 천만 원에 가까웠던 학자금을 다 갚고 나니, 마음이 하릴없이 휑해졌다. 목표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학자금을 갚기 위해 일한 건 아니었으나, 돌아보니 학자금을 갚기 위해 일한 시간이었다.
매일 14시간을 강의실에서 보냈다. 수업 준비 시간 이외는 내 시간이긴 했으나 변화가 필요했다. 직장인 대학원도 한 학기를 마친 상태였다. 공부에 집중하고 싶었고,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학원 분위기상 마지막 날 수업을 마치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제 수업은 오늘 이렇게 끝입니다, 내일부터 또 다른 좋은 선생님과 수업을 이어하시면 됩니다, 감사했습니다, 셰셰. 수강생 전원과 악수를 했다. 오래 봐 온 여자 수강생분들은 눈물을 보여서 나도 같이 울어버렸다. 중국에 장기 출장 가 있는 변 선생님께 마지막을 말씀 못 드린 게 정말, 아주 조금, 아쉬웠다.
총 48명의 수강생 이름이 적힌 출석부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나왔다. 20대의 마지막, 여름보다 늦고 가을보다 빠른 어느 날이었다.
여의도는 그런 곳이었다. 엘리트라고 말하면 다들 부끄러워했지만, 하나같이 엘리트인,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이는 분들만 있는 곳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의 학생들은 죄다 멋지고 똑똑한 분들이었다. 기자, 방송국 직원, 국회의원 보좌관, 증권거래소, 증권사, 해운사, 건강보험공단, HP, 3M, 월드비전, 세계 곳곳을 출장 다니며 공항에서 펜을 사주시는 무역 전문가들이 나의 수강생들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딱 하나, 중국어를 가르쳤다. 기껏해야 발음과 성조와 회화 문장이었다. 앞에 섰다는 것 빼곤 그들보다 나은 게 하나 없었다. 앞에 섰다는 이유로 70대 분께 웃으며 '열심히 하세요'라고 하고 50대 사장님께 '어림도 없어요'라고 할 수 있었다. 호통치고 혼낼수록 그들은 더 크게 웃었고 좋아했다.
그리고, 그들은 진심으로 최선을 다 했다. 바쁜 와중에 단어 시험은 늘 100점이었다. 아파도 수업 들으면서 아파야죠, 라는 분이 있었고, 수업 시작과 끝에 늘 90도로 인사해 주시는 분이 계셨다. 수업만 아니면 친한 언니 삼고 싶을 정도로 예뻤던 HP 직원분은 수업 끝날 때마다 '선생님 너무 좋아요'라며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점심 수업에는 강의실 문 앞에서 빵과 우유를 드시고 들어오시는 분들이 많았고, 늘 같은 부분을 틀려서 몇 번이나 혼나도 잘 안 고쳐지시는 분도 계셨다. 그래도 한결같이 같은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고 싱긋 웃고 나가셨다.
외국어 수업의 장이 아니었다면, 내가 살면서 만날 일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선생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이를 불문하고 그들은 내게 깊은 존경심을 보이고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주셨다.
처음에는 그저 수업이 좋았다. 내가 재미있어야 남들에게도 좋다는 생각에 재미있는 수업을 하려 했다. 다행히 통한 것 같았다. 그 후부터는 그들의 눈빛, 앉은 자세와 정갈한 태도, 몸짓과 손짓이 눈에 들어왔다. 말투에 담긴 배려와 남을 먼저 위하는 센스 같은 것은, 각자의 스타일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갖추어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기본적으로 갖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을지는 내가 차마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그저 중국어 수업을 들으러 왔다가, 어쩌다 젊은 선생님에게 그들이 평생을 살아온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무언으로 가르쳐 주었다. 나는 말로 그들에게 언어를 가르쳤고, 그들은 표정과 자세와 태도로 인생을 가르쳐 주었다. 가르침의 크기와 내용에 있어 균형은 깨어졌으나, 늘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건 그들이었다. 그것조차 고마웠다.
가르침은 생의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오게 된다. '성실'이나 '근면' 같은 삶의 태도는, 문자의 형태로 는 도저히 와닿지 않는다. 나는 20대의 끝에, 성실의 형체를 보고 배웠고 근면이 어떤 것인지 매일 같은 자리에서 확인했다. 2년을 가득 보고 배운 자세와 태도가, 다행히 지금도 내 안에서 잘 보존되어 있다.
가끔 삶이 헝클어질 때, 정리가 필요할 때면 그저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 그때의 어른들이 말없이 태도와 자세로 해답을 보여준다. 20대 후반 만난 인생의 스승들이 내 안에서 지금도 성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나만 그들을 보내지 않으면 된다.
내 안의 여의도는, 영원히 불 꺼지지 않는 강의실로 남을 것이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