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Jul 30. 2021

백로(白露), 셋째 아이가 준비한 선물

절기의 일기, 백로(白露)

  '흰 이슬'이라는 뜻의 백로(白露)는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 절기이다. 한낮에는 여전히 햇살이 뜨겁지만 아침저녁으로는 풀잎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 절기의 이름에 걸맞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는 여름의 뒷모습을 배웅할 새도 없이 오는 가을을 맞아야 하기에 마음이 바빠지는 때이다. 길어지는 코로나 속에서도 거스르지 않는 절기의 흐름을 받아들이며, 2020년의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백로






  멤버는 나까지 총 5명이었다. 선생님은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쓰고는 '천천히 밝아오는 숲'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뜻도 발음도 예쁜 이름이었다.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왔다. 가장 늦게 온 나는 이름도 말하기 전에,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임밍 아웃'을 했다.

  "실은 제가요, 어제 셋째 임신을 확인했어요."

  나이가 드신 분들은 첫마디부터 축하한다고 해주셨으나, 그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니었다.

  "첫째와 둘째가 아직 너무 어려서 셋째는 가진다 해도 막둥이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일찍 와서 사실 너무 속상해요. 우울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여기서 함께 하면서 좀 덜 우울하고 싶어요."

  다들 끄덕끄덕해 주었다. 내 앞의 야구 모자를 눌러쓴 그녀만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듣고 있었다.


  2019년 1월 1일 내게 온 셋째를 확인하고는 종일을 울었다. 보장 기한 최소 3년짜리 우울이 눈물로 바뀌어 몸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자유가 실체를 갖기 시작했는데, 두 달의 겨울만 지나면 나는 빌어먹을 육아에서 한 걸음 멀어질 수 있었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세포에게 자유를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 같았다.

  내 앞에 펼쳐진 10개월은 뻔했다. 죽을 맛의 입덧과 손발 저림, 계속되는 채혈과 당뇨 검사, 명치 밑까지 차오르는 호흡과 불면, 불편한 태동과 더 불편한 분비물, 불어나는 체중에 반비례하는 자존감, 끊임없는 태동을 견디며 다섯 살과 세 살을 키워내야 하는 일상, 그리고 목숨 건 출생, 오로와 훗배앓이와 차라리 산고가 낫다 싶은 젖몸살, 그 후는... 차라리 임신이 낫다 싶을 정도의, 죽음 같은 우울에 잡아먹힐 육아. 앞으로 이삼 년은 불 보듯 뻔한 불행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이미 내 몸 안에서 끊임없이 세포 분열하고 있을 그 존재가 너무나도 싫어서, 어디로든 뛰쳐나가야 했다. 그 존재를 잊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1월의 찬바람에, 돌 지난 둘째를 싸매고 왕복 30킬로를 달렸다. 시간제 보육기관이 멀었지만 상관이 없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4시간을 맡기고 집에 오면, 사실상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은 3시간이었지만, 그 세 시간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발달이 느려 걷지 못하는 아이가 나를 보고 울어도 나는 1월의 바람보다 더 차갑게 돌아섰다. 돌아서는 순간만큼은 눈물이 났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편했다. 운전하며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다. 모성애는 나에게 뿌리내리지 못한 가치였다. 바로 도서관으로 가서 강의실 문을 열었다.

  

  목요일은 '신문 필사', 금요일은 '북요일'이었다. 신문 필사는 원하는 기사나 글을 필사하는 수업이었다. 한 시간은 신문의 내용으로 의견을 나누고, 한 시간은 필사를 했다. 얼마 만에 접하는 활자인지, 손에서 단맛이 났다. 

  북요일 모임은, 조금은 신선했다. 여타 독서 모임과는 달랐다. 한 시간 반 동안 읽고 30분간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하는 모임이었다. 독서토론이나 독후감 쓰기를 하다가 자연스레 친목 모임이 되었던, 그러다가 남편 흉도 보고 애 키우는 이야기만 하다가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하며 사람에 질리는 모임이 아닐 수 있었다. 깔끔해서 좋았다신문을 고 쓰고 책을 읽고,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나면 둘째를 데리러 가야 했다. 매일 60킬로를 두 시간씩 달렸지만, 아이와 종일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나는 육아에 좀처럼 스며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이와 집에 있으면 아이만 쫓아다니고 먹이다 결국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멍하니 폰만 바라봤다. 아이가 내게 오면 '저리 가'라고 말하거나, 유튜브를 틀어주고는 나는 방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을 죽이고 내 정신도 죽였다. 아이와의 소통이나 공감 같은 건 진작에 없었다. 아이의 '생명 유지'말고는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엄마였다. 지치고 무기력했다. 엄마로서, 한 인격체로서 바닥을 치고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으나 그 누구도 옆에 있지 않았다. 어둡고 긴 터널을 혼자 걸어왔는데, 아무리 걸어도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시간의 구렁텅이였다. 내 힘으로 나와야 했고, 나는 그 힘을 도서관에서 얻으려 했다.


  60킬로를 매일 왕복하던 두 달은 간신히 흘렀다. 삼월이 되어 둘째가 어린이집을 가기 시작했다. 입덧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월화수는 영어수업과 테드 스터디로, 목금은 도서관으로 일상을 채웠다. 집에서는 영어와 중국어 필사, 책 읽기를 했다. 느린 속도였지만, '자존감'이 점차 내 안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신문 필사 모임에서는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함께 하고 있어서 수업이 끝나면 조용히 눈인사만 하고 헤어졌지만, 북 요일 모임에서 하나둘씩 그들만의 리그가 형성되고 있었다. 나는 그런 데 낄 시간이 없었다. 뒤뚱거리며 바삐도 다녔다. 셋째라 배는 금방 불러왔다. 다들 다음 달이 산달이냐고 물었지만, 이제 4개월이었다. 억울했다. 벌써부터 손발이 저리고 숨이 찼다. 하고 싶은 게 많고 할 게 많은데, 이렇게나 몸이 안 따라줘서야.

  "혹시 많이 바쁘세요? 이것 좀 드시고 가세요."

  젊어 보이는 사람이, 평일 아침에 도서관이라니, 백수인 게지. 한심하긴.  

  "네, 바빠요."

  눈도 제대로 안 보고 대답을 던지고는 빠져나왔다. 강의실 뒤편에 준비된 과자를 대충 몇 개 집고 빨리 그 상황을 벗어나려 애썼다. 빠져나오는 뒷모습이 뒤뚱거리는 모양새라 보기 흉할 것 같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섞이고 싶지 않았다.

  이삼주 후,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북요일에 백수 그녀와 나만 나왔다. 책만 읽으러 도서관을 오기에는, 사람들에게 끈기가 요구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저 회원님 인스타에서 봤어요."

  회원님이라니. 우리가 언제 뭘 했다고 회원님이래. 그래도 그렇게 불러주니 좀 친한 기분이 들긴 했다.

  "인스타에서 이천 카페 검색하다가 태그로 봤는데, 어, 나 이 사람 알아. 북요일 회원님이어서 너무 반가웠어요. 우리 이래 봬도 일주일에 한 번씩 보는 사이잖아요."

  그날만큼은 독서모임을 가장한 수다 모임이었다. 선생님과 나와 그녀는 두 시간 내내 이천의 카페와 경제와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 주에 온 사람은, 선생님과 젊은 백수와 애둘엄마 그리고 나였다. 네 명은 빠른 속도로 친해졌다. 어느새 북요일은 책모임을 가장한 '금요 미식회'가 되었다. 책은 거들뿐, 우리는 동네 곳곳의 맛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장맛비가 거세게 온 어느 금요일이었다. 언니, 비 오는데 우리 오늘 북요일 가지 말까요. 우리 오늘 장칼국수 먹기로 했잖아. 아, 맞다, 언니 도서관에서 봐용. 이런 본능적인 대화에 낄낄대며 책을 애피타이저 삼았다. 눈은 책에 가 있었으나 '장칼국수 먹고 무슨 카페 가지'라는 생각만 머릿속에 득실득실했다. 분명 철학서였는데, 혼자 킥킥거렸다.

  7월이 되고 새 시즌이 시작되자 우리 아파트 신입이 들어왔다. 다섯 명은 금요일마다 약속이나 한 듯 함께 뭉쳐 다녔다. 여름을 가득 채워 그들과 함께한 음식과 정감 어린 수다들이 뱃속 내 아이를 키웠다.

 

  8월 말 모든 도서관 프로그램들을 마무리했다. 9월 초 백로 즈음하여 셋째가 세상의 문을 두드릴 예정이었다. 셋째는 힘 안 줘도 나온다는 옛사람들 말은 다 거짓이었다. 난산에서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을 다 겪고서야 아이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겨우 생(生) 쪽으로 발을 옮기고 쓰러진 후여서, 셋째가 마냥 예뻐 보이지 않았다.

  가을을 집에 갇혀 보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거의 매 순간 울었다. 배고프다고, 졸리다고 우는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두 번을 해 봐서 신생아 육아에 익숙해졌다 해도 힘든 건 힘든 거였다. 아니, 세 번째여서 더욱 힘들었다. 사라지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했다.

 

  12월 말, 필사반에서 작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고 했다. 처음으로 셋째를 꽁꽁 싸매고 유모차에 태웠다.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 역시나, 네 달을 쉬었더니 낯선 얼굴들이 있었다.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외출이었지만, 젖이 불기 시작해서 집으로 와야 했다. 가슴이 딱딱해지고 열감이 올랐으나 울적했던 마음은 좋아졌다. 그날 처음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필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고, 북요일은 자연스레 글쓰기 모임이 되었다. 글쓰기, 너무나도 하고 싶었지만 현실이 나를 혼내기 시작했다. 애를 셋이나 키우고 게다가 막내는 100일도 안 되었는데, 책이고 글이라니! 정신 똑바로 차려라. 현실에 혼이 나고 선생님께는 '아무래도 저는 못할 것 같아요'라는 식으로 말했다. 조금의 가능성을 남겨둔 말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필사반 크리스마스 파티에 본 분이라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앞에 앉았던 분인가, 아이랑 같이 온 분인가, 두 분 다 선한 인상이기는 했는데. 아이랑 같이 온 분이라고 하신다. 모임 때 아이는 우리가 같이 봐 드리던가 안아드리면 되니까, 글쓰기 모임 같이 해요.

  톡에서 온기가 났다. 핸드폰이 뜨거워지는 건 아니었는데, 분명 그 톡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나왔다. 따스함이 눈에서도 흘러나왔는데, 꽤 오래 흘러서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나, 진짜 하고 싶었구나. 나를 억지로 혼내며 안 하려 했는데, 실은 너무나도 책을 읽고 쓰고 싶었구나. 그런 마음을 알아줘서 우주가 이 분을 보내줬구나. 그럼 해야지,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덕분에, 글을 쓰며 2020년을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이 순간부터 나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생을 살게 되었다.


  매주 읽고 쓰는 건 불가능했다. 선생님은 그림책도 된다고 했다. 그림책 위주로 겨우 읽었다. 남편도 시어머니도 몰래 하는 모임이어서, 글도 몰래 써야 했다. 컴퓨터가 시어머니 방에 있어서 컴퓨터로 글을 쓰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차에서 폰으로 몰래, 첫째 둘째 등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몰래, 새벽에 화장실 갔다가 몰래, 아이를 재우는 척 몰래. 톡으로 에이포 용지 반 장 이상을 그렇게 매주 써서 냈다.


  5월의 어느 날, 선생님이 '시를 써 볼까요'라고 했다. 시는 한 때 전공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시가 좋아 고민도 없이 문학동아리를 했던 나였다. 시를 써볼까요, 라는 말을 들은 다음날 아침 비가 왔다. 아이들 등원 길에 지렁이를 보았다. 갑자기 시가, 마음에 후드득 쏟아졌다.


중력

비 내린 마음에
지렁이가 흔적을 남겼다.
꿈을 꿈을
접었다 폈다
지나간 자리가 남긴 비린내가
마음
아래로 아래로
침전한다.
땅에 붙어사는 모든 마음이
비와 함께
비릿비릿
가라앉고 있다.


  20년 이상 무의식 속에서 뛰쳐나갈 기회만 노리던 내 안의 '시 쓰는 이'가 때를 만난 것이었다. 밤이 새도록 시가 흘러넘쳤다. 끓어오르기도 했고 얼어붙는 활자로 쓰이기도 했다. 영혼의 펜의 잉크가 마르지를 않았다. 시에 깔려 질식사하기 직전이 되었다. 시를 어디라도 옮겨 담아 둬야 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 '시'를 검색하고 보다가,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라는 사진을 봤다. 소중한 글을 기대한다니, 그런데 그게 축하할 일?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고 기뻐하는 글이 사진 밑에 있었다. 작가면 작가지, 브런치 작가는 뭐야. 좀 더 찾아보니, 그런 사진과 기뻐하는 글이 많았다.

  브런치를 검색했다. 음식 사진이 많았고, 당신의 글을 맛있는 브런치처럼 보여주겠다는 사이트가 있었다. 오, 여기라면 내 시들을 모아놔도 될 것 같아. 알고 보니 심사를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 뭐, 어려울 거 뭐 있어. '시를 쓰고 싶어 신청합니다' 한 문장으로 자기소개를 썼다. 써두었던 시를 세 편을 넣었다. 신청 완료. 

  이틀 후 메일이 왔다. 브런치 작가 신청 결과 안내드립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건방지게 내 시를 못 알아보다니. 그래, 글쓰기도 바쁘고 애 키우기도 바쁜데 잘 되었다. 화인지 짜증인지 실망인지 그런 비슷한 감정은 일단 누르고, 자존심을 앞장 세웠다. 저딴 브런치 안 해.

  그날부터 브런치에서 '시'를 검색했다. '시'라고 뜨는 모든 작가를 구독했다. 이러니 내가 안 되지, 하는 인정이 밀려오는 밤도 있었고, '이딴 시도 시라고!' 하면서 브런치 심사팀을 욕하다가 또 밤의 농도가 옅어지는 걸 보는 날이 많아졌다.

  시간은 성실하게 흘렀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으로 써서 낸 글들이 모여 마을 문집이라는 물성을 가진 책으로 나왔다. 너무 부끄러웠는데, 다행히 50부 밖에 안 냈다고 한다. 세상 50명만 내 거지 같은 글을 본다 이거지. 거지 같은 글이라 살 사람도 없을 거야, 라는 생각을 비웃듯이 책은 한 권 한 권 잘도 팔려 나갔다. 도대체 왜 사시는 거예요, 묻고 싶었지만 답은 뻔했다. 당신 글은 거지 같아도 다른 분들 글이 좋아서요.

  8월부터 시작되는 2기에는, 매달 한 편씩 주제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거지 같은 글이어도 6개월을 쓰고 났더니, 글쓰기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글이 쓰고 싶어 며칠 밤을 울며 보낸 나는 결국, 가슴속에 어설프게 묻어두었던 '브런치'를 꺼내 들었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검색했고, 자기소개를 좀 더 길게 쓴 후에 이전보다는 더 정성 들인 시를 제출했다. 신청 완료. 이틀 후에 브런치로부터 받은 메일은 3개월 전과 똑같은 것이었다. 이것들이 날 물로 보나.

  물로 보는 게 맞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날 밤 보게 된 브런치 작가 글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쉬긴 했지만, 어쨌든 1년에 걸쳐 브런치 신청을 하신 분이었다. '아빠 육아'를 쓰시는 분의 브런치 입성기를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글을 잘 쓰시는데, 1년이나 걸렸다고? 그때부터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나도 1년 동안 신청해야지. 그러려면 폰으로는 안 되겠어, 노트북이 필요해. 셋째 낳고 받은 군 복지 포인트가 떠올랐다. 남편에게는 '군인가족생활 수기'를 쓰고 싶다고 했고, 남편이 '쉬는 날 같이 매장 가요'라고 했다.

  그날 밤 또 신청을 했다. 좀 더 정성을 들인 소개, 블로그에서 '이 정도면 되겠지' 했던 글. 이틀 후 브런치가 보낸 메일은 익숙한 것이었다. 브런치야, 거절 메일도 정성껏 보내 봐.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가 아니고,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해야지. 괜찮았다. 어차피 1년을 신청할 거니까.

  그날 밤 신청할 땐 3시간이 걸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신청했다. 신청글에 사진도 넣고, 글씨 크기, 색을 신경 썼다. 폰으로 하기에는 쉽지 않았다. 눈이 금방 침침해졌다. 작성하다가 아이가 깨면 수유를 하고 토닥토닥 재우고 다시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안 되면 조금 아쉬울 것 같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마흔 전에 합격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월요일 밤 신청을 했는데, 브런치는 내게 그 어떤 힌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 안 되겠구나 싶었지만, 얼굴 어디에도 실망과 안타까움은 드러내지 않고 남편과 매장을 들렀다. 게임도 안 하고, 워드 작업만 할 거라 기본 사양이면 돼요. 카페에 들고 다니게 될 것만 같아 가벼운 걸 사고 싶었지만, 가벼울수록 가격은 무거워졌다. 적당한 가격에 적당하지 않게 무거운 노트북을 사들고 왔다. 노트북이 무거워도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 폰이 아닌 노트북으로 최소 1년 동안 브런치 신청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1년 후에도 안 되면 어떡하지? 그럼 그 작가님을 능가하는, 작가 신청 최장 기간 보유자가 되어야지! 이게 뭐라고 벌써부터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며칠 밤을 거의 자지를 못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몽롱한 정신이었으나 발랄한 엄마의 얼굴을 장착하고 등원 길에 나섰다. 폰은 아침부터 경망스럽게 울려댔다. 아침부터 열심인 광고쟁이들일게 뻔해. 피부과이거나 마트 할인 문자겠지.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무심코 폰을 확인했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중한 글 기대하겠습니다.


'백로'가 지났지만 여전히 아침 햇살이 뜨거운, 9월의 어느 금요일 아침이었다.






  2020년 백로 즈음부터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내가 이름 붙인 마을 문집 모임 '오도독(吾道讀)' 3호 출간을 앞두고 있다. 대부분의 오도독 글도 브런치에 올리고 있다. 시도 브런치에 쓰고 있다. 그러니까, 2020년 백로 즈음부터 쓴 대부분의 글이 여기에 있다.


  물론, 글은 줄곧 곁에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문학동아리를 했고, 대학생 때는 기자 준비를 했다. 그땐 논리와 논조와 주장만 가득한 글을 연습했다. 면접 때 유용하다며 '서울대 추천 100'권을 순서대로 읽기도 했다. 서울대는 이런 걸 왜 추천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드는 책이 대부분이었으나 일단 읽었다. 직장을 다닐 때도 학교 때의 습관으로 신문을 하루 두 부씩 읽어댔다. 대학원 때는 매주 에세이를 제출했고, 논문 학기에는 글과 쓰기에 파묻혀 지냈다. 그러다가, 출산과 육아가 나를 활자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더 이상의 임신 출산 육아는 없다'라고 생각하던 나날의 정점에 셋째가 왔다.


  셋째는 나에게 세 가지를 선물했다. 첫째는 글쓰기 인생이다. '아니에요, 엄마. 나는 그냥 왔는데 엄마가 직접 나선 길이에요'라고 아이가 말한다면, 나는 자신 있게 '아니야'라고 대답할 수 있다. 셋째가 없었다면 나는 그저 신나게 자유부인을 즐기기만 했을 것이다. 동네 아줌마들과 신상 카페를 찾아다녔을 것이고, 폰 게임에 더욱 집중했으며 밀린 영화만 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그렇게까지 밝은 자유는 허락되지 못했다. 입덧과 가라앉는 체력 때문에, 동네 도서관만 겨우 다닐 수 있었다. 책 읽기 모임이 자연스레 글쓰기 모임이 되면서, 나 역시 일상의 읽는 자리 옆에 쓰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책 읽기에서 글쓰기로 넘어가는 언덕에 함께 하는 이들도 만났다. 지칠 때는 돈가스를 앞에 두고 '그래도 어떡해요, 시작한 건 끝을 봐야죠'라며 함께 했다. 글을 쓰는 건 혼자지만, 글을 완성시키는 건 '함께'라는 기분이 들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선물은 노트북이다. 건강히 태어나 글을 쓰게 해 준 것도 고마운데, 태어났다는 이유로 포인트를 받게 해 줬다. '엄마, 이걸로 편하게 글 써요'라며 건네주었다. 브런치가 기대한다는 소중한 글은 다 이 노트북으로 썼다. 오도독 문집 글과 몇몇 공모전 수상작들 역시 이 노트북이 이루어냈다. 셋째는 '이거 내가 사준 거'라며 노트북에 볼펜으로 과감하게 표시해 두었다. 나는 '그럼 그럼, 네가 사준 거지'라며 굳이 지우지 않고 있다.

  세 번째 선물은, 글 쓰는 이만이 누릴 수 있는 '감정'이다. 우울할 때 글을 쓰면 덜 우울하다. 기쁠 때 글을 쓰면 더 기쁘다. 글쓰기에서 얻는 순수한 감정은, 자체로 수단이자 목적이다. '행복'이 가장 비슷한 단어인 것 같다. 다른 수식어는 지저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그냥, 그렇게 글을 쓴다. 행복하니까, 행복하려고, 행복하게.

  이 글을 보는 이들도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행복해서, 행복하려고, 행복하게 글을 읽고 썼으면 좋겠다. 당신이 읽고 쓰는 그 곁에 순수한 감정이 미소 짓고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두 돌이 채 되지 않은 셋째 아이의 때 묻지 않은 표정처럼, 그렇게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 그러고 보니, 셋째는 내게만 선물을 한 것이 아니다. 신문 필사 모임 첫 시간에 내 앞에 야구모자를 쓴 그녀. 모두가 축하한다고 할 때 그녀는 그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두 글자를 떠올렸다, '난임'. 나 역시 그 그늘에 있어본 적이 있어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다. 경솔한 임밍 아웃을 후회했다.

  그 후 석 달 동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선생님은, 그녀가 건강이 안 좋아져서 쉰다고 말했다. 건강이 안 좋다는 건 두 가지 의미이다. 내가 꼴 보기 싫거나, 희망적인 소식이거나. 4월부터 다시 필사 모임을 천천히 나오게 된 그녀의 배는 조금 나와 있었고, 나는 성별 확인 전 선물 받은 '아들 옷'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의 늦둥이 아들 생일은, 우리 셋째보다 10일이 더 지난날이다.

  가끔 민준 엄마와 연락을 한다. 물론 그 부부의 각별한 사랑과 노력 끝에 온 아이이지만, 간혹 셋째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는 셋째, 너야말로 내 인생에 진정 선물 같은 존재라고.  




0으로 끝나는 날마다 절기의 일기를 써보려 합니다.

입춘과 입하를 지나 입추와 입동에 이르는 찰나의 순간들, 그 틈새에 끼워져 있던 이야기를 펼쳐 보려 합니다. 퀴퀴한 냄새를 털어내고 빛바랜 장면을 손으로 쓸어내다 보면, 무기력을 벗어난 진짜 나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전 16화 처서(處暑), 더위의 끝에 잠들지 못하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