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날:고교졸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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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발행작가: faust(https://brunch.co.kr/@love2060/134)
할머니 분식점, 우린 점방이라 했다. 언덕배기 학교를 향해 오르다 보면 육교 아래 간판 없는 분식점이다. 잡화점이라 해야 맞겠다. 라면, 떡볶이에다 몰래 낱 개피 담배도 파는 곳이었다. 항시 뭉쳐 다녔던 5인방, 우리 스스로 ‘위대한 탄생’이라 정했다. 다섯 명이니 다섯 자 이름의 그룹, 가수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 이름을 땄다. 다른 친구들은 우리를 그냥 ‘찌끄레기들’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탄생은 월요일 방과 후 점방에 모였으니, 거기서 대식이의 짝사랑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대식이! 그는 경상북도 청송군 00면 우체국장 아들로서 마을의 한 소녀를 좋아했었다. 소녀의 이름은 순심.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그는 일주일에 한 번 고향 청송 집에 다녀온다. 월요일이면 점방에 우리를 모아놓고 주말에 있었던 애정의 서사를 펼쳐놓는다. 우체국장 아들 그가 분식 값의 8할을 담당하였으니 더 일러 뭐하겠는가. 친구의 연애 에피소드를 듣는 그 정도 노고야 참을만했다.
다시 월요일, 누군가 외쳤다. 가자, 순심이 분식으로! 그때부터 점방이 순심이 분식이 되었다. 월요일마다 순심이 분식에서 듣는 순심이 이야기, 처음에는 밥값 치른다는 마음이었지만 서서히 청송 소녀 이야기에 빠져 들었다. 짝사랑으로 시작하여 차츰차츰 소녀의 마음을 얻어가는 사랑의 진행 과정이 퍽이나 흥미로웠다. 실로 생 드라마였다. 어설픈 플롯, 더디고 여백 많은 순백의 서사, 그게 오히려 애간장을 타게 했다.
도시에서 청송으로 이사 온 순심은 촌뜨기와는 달랐다고, 군(郡)에서도 보기 드문 도시적 미모였다고, 긴 생머리 하얀 피부에, 흰색 원피스를 주로 입었다고, 말마따나 당시 프랑스 여배우 소피마르소를 닮았다고 했다.
그녀에 대한 대식의 묘사는 족히 판타지 급이었다. 이럴 테면, 다리 저편에서 걸어오는 그녀는, 착하게 산 자신을 위해 신神이 보내신 천사였다는 둥, 하얀 옷을 펄럭이며 논두렁 길을 사뿐사뿐 걷는 소녀는 지금 막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였다는 둥, 처음으로 말을 걸었을 때, 소녀가 드러낸 치아는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는 둥, 묘사가 세밀할수록 오금이 저렸다. 하여간 소피마르소였다고 했으니 더 말해 뭐했겠는가. 지금은 고물상 주인이 된 대식이, 입만 열면 죄다 욕인데, 생각해 보니 당시 그의 말이 그렇게 문학적이었다니 놀랍다. 아마도 사랑이 사람을 문학적 인간으로 만들고, ‘사랑없음’은 사람을 욕 다발적 인간으로 만드나 보다. 특히, 순심이 이야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노트를 꺼낸다. 지도를 그려가며, 공부하듯 줄 긋고, 동그라미를 그리며 이야기를 전개했다. 백지에 하트 모양이 그려질 땐 그의 손이 떨렸고, 그녀를 지칭할 때는 그 위에 별표를 그렸다. 별처럼 빛난다는 거다.
지금껏 들었던 소녀의 종합적 상상은 이렇다. 하얀 얼굴, 새까맣고 큰 눈동자, 도톰한 입술에다가 날렵하게 세워진 이국적인 코, 수시로 매만져 흐트러짐 한 올 없는 어깨 밑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 봄바람에도 흔들릴 정도로 가녀리고 하늘하늘한 걸음걸이. 웃을 때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말할 땐 풀내음, 꽃내음이 났다고 하니 천상 최상부 어느 쯤에서 온 선녀가 분명하다. 이렇게 순심이는 우리의 상상 속에 눈부시게, 고귀하게 살고 있었다.
방학 후, 돌아오면 이야기는 훨씬 다채롭고 풍성했다. 한 번의 방학이 지날 때마다 애정의 역사는 진일보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눈인사를 나눈 장면에서, 땀에 젖은 손으로 쪽지를 건네던 장면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손이 스친 장면으로 단계가 발전해 갈 때 친구들은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상황 속으로 몰입을 했다.
3학년 마지막 방학을 끝내고 온 그는 늠름했다. 그날도 순심이 분식으로 불러 모았다. 중복이, 무달이, 인철이, 나, 그리고 대식이. 그는 승리에 찬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듣거라. 위대한 탄생아, 나 순심이랑 키스했다이~.”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듣고 있던 할머니, 오뎅 국물 한 그릇을 선사하셨다. 우리는 대식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살갗이 닿으면 어떤 기분일까. 소녀는 더 이상 대식의 그녀가 아니었다.
친구에겐 차마 못한 말이 있다. 미안하지만 그녀가 내 꿈속에 찾아왔다. 이게 어찌 나의 잘못인가. 악마를 무찌르는 검이 있다한들 꿈속까지 찾아오는 소녀를 어찌 막겠는가. 하얀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넘실거리며 나에게로 다가오는 천사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는가. 그녀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잡았다. 반달의 은은한 빛에 물든 은행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왈츠를 추었다. 으츠츠 으츠츠 단다르단 단다다. 그녀는 이때까지 이 세상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여자였다.
놀라운 소식, 졸업식에 그녀가 온다고 했다. 그녀를 실제로 본다면, 영화 속에서 흠모했던 배우를 현실에서 만난다면, 하늘로부터 현현하는 여신을 옹위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날이 왔다. 졸업식 날. 아니, 소녀를 만나는 날. ‘위대한 탄생’의 옷매무새들은 이전 같지 않았다. 화려하게 변모했다. 마치 수컷이 짝짓기를 위해 털갈이한 듯, 촌발 날리는 자태로 탈바꿈했다. 무달이는 머리에 기름을 오지게 발랐고, 중헌이는 빨강 마후라로 목을 조였다. 인철이는 패션쇼에서 본 듯 난해한 바지를 입고 왔다. 나는 당시 상위 1% 패셔니스타만 입는다던 최신 스타일 청바지, 쪼다시를 입었다. 궁디 쫙 빼지게 입어야 태가 나는 쪼다시, 그렇게 입었다. 우리가 이 지경으로 쪼다가 된 것은 순심 때문이었다. 졸업식이 진행되고, 졸업가를 부르는 동안, 나의 시선은 줄곧 하객들을 훑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소피 마르소는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약속대로 순심이 분식에서 친구와 함께 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티 하나 없는 청아함으로 상상 안에서 3년을 살아온 그녀, 여인의 표상을 심어주었던 신비의 소녀, 지금 그녀가 오고 있다.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문밖에 두 남녀가 멈춰 섰다. 회색 문 시트지 너머로 소녀의 실루엣이 그려졌다. 몸을 살짝 비틀고 노리개 옥구슬을 만지작거리고 서 있는 미인도의 여인처럼 소녀는 수줍게 서 있었다. 둥둥 가슴이 요동쳤다. 별명이 철딱서니인 인철이는 오두방정을 뜬다. ‘오~오~온다. 드디어, 드디어, 오-온다. 두구두구두구두구.’ 드르르륵, 새시 문이 열렸다. 그녀다...그녀...어... 정적이 흐른다. 터벅터벅 걸어와 우리 앞에 섰다. 음습하는 반전의 기운, 그녀는 걸걸한 결정타를 던졌다.
‘야, 대식아, 야들이가, 야들이 위이-대한 탄생이가?’
난처하면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는 무달이, 아랫입술 잘근잘근 씹고 있다. 위-대한 탄생, 아니 우리 찌끄레기들은 당황스러운 시선만 분주하게 주고받았다.
우리는 그날, 뼈저리게 깨달은 바가 있다. 세상에는 상상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는 것을. 피천득의 수필 [연인]을 아는가. 마지막 문단,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고 찌끄레기의 변辯을 마칠까 한다.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