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물건: 1977눈(雪)>
브런치북 발행 규칙상 '작당모의' 브런치북 발행을 위해 제(진샤) 이름으로 재발행을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 부탁 드립니다. 원문은 아래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거진 발행작가: faust(https://brunch.co.kr/@love2060/138)
소복이 눈 쌓이는 소리로 속내의 언어를 대신하고픈 순간이 있었다. 열 살 소년이 뱉기에는 무거웠던 말, ‘미안해’. 걸어온 발자국들이 세월의 두께에 덧입혀 희미해질 무렵, 내 유년의 골목길은 흘러간 숱한 기억 중에 맴도는 이름 하나를 불러냈다. 순이!
그 아이의 방은 달구지 하나 지나기에도 좁은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 방과 마주 보고 있었다. 불 켜진 소녀의 방은 내 시선 안에서는 신비한 곳이었다. 그 이름 순이는 내 고향과 같은 무게의 그리움으로, 때로는 쓰라리고도 미안한 이름으로 남아있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 말간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천지간 하얗게 눈 내린 배꼽마당에 모여들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제 주먹만 한 크기의 눈 뭉치를 양손에 들고 깔깔거렸고 제법 덩치가 있는 아이들은 그럴싸한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눈덩이를 불려 나갔다. 무엇부터 할까 망설이는 순간, 퍽. 단단한 눈 뭉치 하나가 내 머리통을 때렸다. 순이였다. 실수인 듯 자신도 놀라 그 자리에 얼음처럼 서 있었다. 그 상황을 본 사내애들이 맞고도 멋쩍어하는 나를 놀려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사내 녀석이 쪼다같이 계집아이에게 맞고 가만히 참고 있다며 나를 조롱하고 나섰다. 하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했다. 눈 뭉치 하나를 던졌다. 진짜 아무렇게나. 획. 그게 말도 안 되게 순이의 얼굴 정면에 맞고 말았다. 순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어디라도 정한 법칙은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 세계에도 무언의 규칙이 있다. 주먹질을 마구잡이로 하다가도 둘 중 어느 하나가 코피를 흘리면 그 싸움판은 끝이 난 것이고, 알콩달콩 박자 맞춰 잘 놀다가도 어떤 연유이든 누구 하나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그 놀이판은 멈춘다. 지금 내가 던진 눈 뭉치에 순이가 맞아 울고 있다. 신비의 궁에 사는 순이가 울고 있다.
이 정도 되면 대개 무리 중 의로운 누군가에 의해 이 사실이 부모에게 알려지게 되고, 곧 기차 화통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아이의 엄마가 호령하면서 등장하게 된다. 그것을 짐작이라도 한 듯 아이들은 겁에 질려 순식간에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목소리 쩌렁쩌렁한 그런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들이 다 떠난 하얀 마당 한복판에서 홀로 쪼그리고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아이,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후 순이는 일어섰다. 싸늘한 눈밭 위에서 눈물을 훔치며 나를 응시했다. 순이 등 뒤로 하얀 산등선을 타고 넘어가는 해가 쓸쓸해 보였던 것은 곧 다가올 슬픈 징후 때문이리라. 나는 시선을 땅으로 떨구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년은 알 리가 없었다. 발끝으로 공연히 애꿎은 땅만 툭툭 찍는다.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니 소녀는 서늘한 공기가 맴도는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온종일 잿빛을 머금어 어둑하기만 하던 날, 골목이 어수선했다. 마을에 초상이 났다. 순이 엄마가 돌아가셨다. 순이네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대문 밖에서 머리를 쭉 들이밀고 안을 살폈다.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순이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술주정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주체하지 못하는 몸을 끌고 골목으로 나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온 세상을 평정했다. 하지만 그런 지아비의 행동을 말리는 순이 엄마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날 밤, 나는 그제야 순이 엄마가 궁금해졌다. 어떤 분인지 처음으로 나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순이 엄마는 오래전부터 지병으로 누워 있었고, 순이는 술에 찌든 아버지 대신 엄마의 병시중을 혼자 하며 살림까지 챙겨야 했다고 했다.
그날 이슥한 밤이었다. 엉~엉~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뚫고 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소리는 잠을 깨웠다. 어디서 들리는 누구의 소리인가. 귀를 곤두세웠다. 점점 소리가 선명해졌다. 어~ 어~ 엄마~ 순이의 방이다. 봉창 문을 살짝 열어 건너편 그 방을 확인했다. 순이의 울음소리였다.
“엄마~엄마~엄마~ ”
차가운 달빛 아래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골목을 적시는 울음소리도 깊어 갔다. 차라리 절규에 가까웠다. 지금껏 자리에 눕고 일어남이 수없이 많았을진대 그 겨울밤과 동트는 새벽 사이의 시간이 그렇게 긴 줄 몰랐다. 아무리 슬픈 통곡이라도 이별의 밤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며, 어찌 멈출 수 있을까.
눈 감으면 점점 뚜렷해지는 한 장면, 방어할 보호막 하나 없는 눈밭 위에 쪼그리고 앉아 서럽게 우는 한 아이 모습. 마음이 조여왔다.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열 살 여자아이가 엄마를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그 첫날밤에, 불 꺼진 방에서 들려오는 홀로 세상에 남겨진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새웠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마치 소녀의 애통이 송두리 채 내 잘못인 것만 같아서다.
사는 날 동안 맞이할 수 있는 모든 슬픔 중에 어미를 잃은 열 살짜리 소녀의 슬픔보다 더한 것이 있을까. 밤을 보낸 소녀의 방 지붕에도 여명이 떠올랐다. 세상에 눈부신 것이 다 희망차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생각해 보니 그때 소녀가 맞이한 아침 해가 얼마나 큰 공포였을까 싶다.
다음날, 집을 나서 골목길을 혼자 걸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뿌드득 뿌드득 눈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또렷이 들렸다. 내가 발걸음을 멈추면 뒤따르는 그 발소리도 덩달아 멈췄다. 돌아볼 수 없었다. 맞이할 기쁨보다 마주칠 미안함이 더 컸던 걸까.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고요만이 천천히 천지에 쌓이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골목 끝 모퉁이를 돌자마자 뒤돌아섰다. 순이였다. 마치 이 골목길이 세상과 동떨어져 우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골목 안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는 순이를 바라보며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순이야.., 가슴속에서 둥-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일치시키지 못했다. 앞만 보고 걷는 꼿꼿한 옆모습, 그리고 간밤의 슬픔을 벗어내지 못한 저 뒷모습.
며칠 후, 순이네 집 앞에 파란 용달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대문 삽짝에서 기웃거려 안을 보았다. 그날도 소녀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다. 소녀는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마치 가야 할 곳이 없는 사람처럼, 땅거미가 지는 스산한 마당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순이는 떠났다.
세월 지나도 잊히지 않는 생생한 기억, 미안함의 깊이일까. 이 정지된 한 장면은 내가 필생을 두고 치러야 하는 연민의 제사와 같은 것이리라. 밤새 쓴 편지를 아침이 되어 부치지 못한 것만큼 완벽하게 애절하고 순수한 고백은 없듯이,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설익은 언어 하나가 이렇게 절실해지는 순간이다.
미안해.
골목 안으로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가슴 멍울지는 열살의 연민, 골목길을 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순이네 집 지붕 위에 소복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