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그 사람: 서태지>
브런치북 발행 규칙상 '작당모의' 브런치북 발행을 위해 제(진샤) 이름으로 재발행을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이해 부탁 드립니다. 원문은 아래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매거진 발행작가: faust(https://brunch.co.kr/@love2060/141)
때는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연도입니다. 그해는 실로 그랬지요. 대단했지요. 서태지로 술렁이던 해였습니다. 특히나 전국을 감전시키는 첫 소절, ‘난 알아요♬’ 글자‘알’에서 이렇게 야물고 새침한 발음이 나는지 몰랐어요. 가히,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이름이지요. 충격적이라 하면 그의 등장이 그랬고, 아름답다는 것은 격랑 같은 추억 하나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실은, 천하의 서태지도 나에겐 관심 밖 존재였지요. 내가 취업준비생이었거든요.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은 서태지가 아닙니다. 서태지로 휘몰아쳤던 시대에 조용히 살았던 접니다.
나날이 처연할 시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삼촌입니다.
“니 숙모의 오빠가 부장으로 있는 회사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대, 취직하거라.”
제안을 거부했어요. 이미 준비하고 있던 진로가 있었거든요. 이번엔 숙모에게서 전화 왔어요.
“조카, 일단 한 번만 가봐, 가서 면접만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간다고 하면 돼”
갔습니다. 회사는 퍽 튼실한 중소기업이었습니다. 회사 로비에서 빨강 구두를 신은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부장님(숙모 오빠)실로 들어갔습니다. 회사, 업무, 임금에 대해서 소개를 받았고요. 일할 부서 과장님이 저를 데려가더군요. 긴 복도 두어 번 꺾어 회색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몇몇 직원이 사무실에 앉아있더군요. 조금 전의 빨강 구두 여직원이 그 부서 직원이었습니다. 출근하는 것으로 알고 있겠다고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더군요. 딱 하루 고민하고 숙모 오빠 부장님에게 못 간다고 전화했지요. 부장님도, 과장님도 황당했을 겁니다. 이미 입사가 결정된 것으로 여겼겠지요. 모든 것이 숙모의 일방적 계획이었으니까요. 한 차례 더 숙모의 설득이 있었지만 다시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을까요. 회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엔 빨강 구두 여직원이었습니다. 만나서 얘기하잡니다. 신입 말단 사원 하나 설득하기 위해 이제 여직원까지 동원하다니요. 삼촌, 숙모, 부장님, 빨강 구두 아가씨까지, 아무래도 이 사람들 번지수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
어쩝니까. 나갔습니다. 00 백화점 8층 전통찻집. 부장님도, 담당과장도 없었습니다. 창가에 여성 한 분이 다소곳이 앉아있었어요. 빨강구두였습니다. 회사에서 유니폼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앳되어 보입니다. 쌍꺼풀 없는 왼쪽 눈 위에 작은 점 하나도 보였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지요.
“다른 분은요, 혼자 오셨습니까?”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습니다. 내가 빤히 쳐다보면, 그녀는 8시 시계 방향으로 눈을 내립니다. 낌새가 이상합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왜 나오라고 하셨죠?”
빨강구두는 다음의 12자를 말하는데 3분 걸렸습니다.
“00님이 제. 마. 음. 에. 들. 어. 서. 요.”
앵, 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내가 마음에 든다니... 나중에 들은 얘긴데요. 회사 로비에서 나를 처음 보는 순간, 뇌가 정지했답니다. 재수 없다고요?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뇌 기능을 멈추게 할 능력을 지닌 저라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나는 아무것도 준비 안 된 반백수 취준생입니다. 난 누구를 사귈 정신이 없었습니다. 또 그럴 마음도 없었거든요. 특히 반백수는 스타일이 없답디까. 빨강구두는 제 스타일 아님.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그저 고개만 위아래 위위 아래 몇 십분 째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또 왼쪽 8시 시계 방향으로 눈을 깝니다. 대체 8시 시계 방향에 뭐가 있나 봤지요. 그냥 바닥! 누구에게라도 베풀 마음은 바닥입니다. 그랬어요. 제가 인생 바닥이었기에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었습니다. 숫기가 원초적으로 없어 보이는 그녀의 용기 낸 고백에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미안함보다 제 상태가 더 절박했으니까요. 기약 없이 헤어졌습니다. 며칠 후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아무 말 없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흠—숨소리, 직감했습니다. “혹시 빨강구두?” “네-” “전화를 걸었으면 말을 해야죠. 왜 가만히 있어요.” 계속 가만히 있습니다. 이때 머뭇거리면 안 됩니다. 진심을 말했습니다. ‘난 지금 누구와 사귈 처지가 못 된다. 앞날을 준비해야 할 절체절명의 시기다. 미안하다.’ 수화기 너머 가엾은 숨소리만 들립니다.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 말 없습니다. 나도 아무 말 안 했습니다. 매몰차라, 매몰차라, 매몰차라, 짧은 순간 마음으로 되뇌었던 말입니다. 휴, 살면서 늘 그랬지요. 결정적인 순간에 말이 헛 나옵니다. 운명의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만날까요”
할 말을 생각해서 나갔습니다. 오늘은 단호하자고. 우리는 걸었습니다.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을 했지요. 할 말을요. 이 여자를 끊어낼 말을요. 단호해져라, 단호해져라, 단호해져라. 걷다가 공원 벤치에 앉았지요. 서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할 말이 없었고, 빨강구두는 할 말을 하는 법을 몰라서 할 말을 못 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부조화입니다. 두류공원 하늘에 낮달이 보입니다.
“낮달 보이네요”
“네-”
공원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음악 좋아해요?”
“네-”
“할 수 있는 말이 네- 밖에 없어요?”
“네-”
“그럼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요?”
“네-”
순간, 주체 안 되는 장난기가 발동했지요.
“여기서 한 번 불러 볼래요?”
“네-”
뭐시? 부른다고? 그냥 해 본 소리인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이곳에서? 당황했습니다. 저 정도의 무 센스녀라면 실제 부를 태세인데 어쩌지. 그녀는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섰습니다. 서서 부른단 말인가. 앉아서 불러도 되는데 왜 이러시나. 그리고 두 손을 자신의 명치 쪽으로 모았습니다. 설마, 설마 부르려고? 부르면 안 되는데, 이 부끄러움을 어떻게, 누가 감당하려는가.
그녀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는... 서태지의 [난 알아요]였습니다. 그냥 간단한 노래도 아니고 당시 대한민국에서 제일 야단스러운 세 명이 부르는 그 노래 ‘난 알아요’ 라니. 그녀는 불렀습니다.
‘나-안 알아요’
난 모르겠습니다. 이 상황을요. 근데 이상합니다. ‘알’이 죽었습니다. 대신 ‘난’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아’와 ‘요’가 연기같이 사라집니다. 동요식으로 부릅니다. 그것도 크게, 그것도 랩 파트까지, 그것도 끝까지. 끝까지. 박자는 겨우 겨우 맞는 것 같은데, 음정은 위아래, 아래위 반 음식 비켜갑니다. 표정은 나에게 '네-'라고 말할 때의 그 표정 그대롭니다. 마치 끌려간 회사 회식 자리에서 제 차례가 되어 부르는 노래처럼.
[난 알아요] 노래가 그렇게 긴 노랜 줄 몰랐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우리 주변을 둘러서기 시작했습니다. 구경난 거지요. 남자는 의자에 앉아있고, 여자는 그 앞에서 공연하듯 서서 노래를 부르는 이 낯설고도 해괴망측한 장면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보고들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 부릅니다. 마치 그 자리에 노래를 듣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진공 속이 이런 느낌일까요. 온몸이 물속에 잠긴 것 같았습니다. 귀가 먹먹해지더군요. 사람들의 잡음은 들리지 않고 내 눈에는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파르르 흔들리고 있는 그녀만 보이고, 그녀의 노랫소리만 들립니다.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나를 정말 떠나가나요.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
나는 지금 울잖아요.
그리고 2절을 부르기 시작할 때, 빨강구두 그녀의 눈망울 아래 그렁그렁 물기가 달렸습니다. 노래가 끝났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떨고 있는 두 손을 잡았습니다.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그때 그 사람, 그 노래, 그 이야기, 서태지와 빨강구두를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옛날 두류공원에서 내 앞에 서서 서태지 노래 불렀잖아. 생각나?”
순백의 빛을 잃은 후 비로소 넘치는 자유와 풍요를 누리며, 한낱 거추장스러운 속박을 벗어던진 채 소파에 벌러덩 누워있던 아내, 한 마디 내뱉습니다.
“뭐, 서어태지이~ 확마, 서태지 같은 소리하고 있네, 고마 자자이~”
이상, 작당모의 7월 두 번째 글제
8090 그 시절 그 사람,
서.태.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