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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Jan 05. 2023

이번 생은 여기까지

< 작당모의(作黨謨議) 신년 특집: 토끼 >



  아이는 셋을 낳았지만 아들은 없다. 아들 빼고 다 가졌네,라며 남편은 우리를 놀린다?! 나는 원체 아들 아니 자식 욕심 자체가 없었고(아이 셋은 남편의 로망이었다) 요즘은 어딜 가도 딸 셋이라 하면 칭찬과 부러움을 받고 있어서 '세상이 진짜 변하긴 변했나 보다' 싶기도 하다. 내가 첫째 아이 나이 즈음 '아들과 딸'이란 드라마를 했고 극 중 이름이 귀남이었다는 것, 백일섭 아저씨가 '아글씨'를 외쳤다는 것 정도 기억에 남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요즘은 딸들이 대세라는 것. (원래 쓰려던 건 이게 아닌데) 하여튼 딸이고 아들이고 이미 벌어진 사건을 종합해 보면(종합까지야) 아이 셋의 부모로서 아쉬운 것이 단 하나 있다. 다름아닌 '꿈'이다.





  

  엄마는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데 특출 난 재능이 있었다. 그런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나의 태몽 이야기를 해주었다. 엄청 깨끗한 물에 햇살이 막 반짝반짝 반짝반짝하는데, 이마아아아아아아안하고 비늘이 막 반짝반짝 반짝반짝하는 잉어가 내 품에 퐈악 안기는 거야, 진짜 그런 꿈 다시는 못 꾼다 못 꿔. 엄마의 표정을 보며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결혼은 싫어도 태몽은 한 번 꿔보고 싶다, 란 생각을 자주 했다. 얼마나 생생한 꿈이면 저렇게 이야기할 때마다 살아있는 표정을 하고 처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할 수 있을까. 살면서 한 번만 꿔볼 수 있는 꿈이라 더 그렇겠지. 결혼을 안 하고 태몽을 꾸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다 그건 사회적으로 꽤나 난감한 상황에서 가능한 일임을 알고는 조금 속상해하기도 했었다. 


  논문 스트레스에 지독한 봄 감기, 결혼 준비 스트레스가 적절히 섞여 결혼식 끝나자마자 링거를 맞고 겨우 깨어난 내가 들은 첫 소식은 시동생 부부의 둘째 임신이었다. 어머님은 겹경사의 흥분을 감추지 않으셨다. 뒤늦게 첫째 아들 장가를 무사히 치렀는데 둘째 손주까지. 

  내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아니 얼마 전에 너무너무 신기한 꿈을 꿨었거든. 세상에 세상에, 달이 밝은 밤에 저쪽에서 달보다 더 흰 것이 내 쪽으로 오는 거야. 자세히 보니 털이 북슬북슬하고 너무너무 예쁘고 커다아아란 토끼가 겅중겅중 뛰어서 오더니 어머나 글쎄, 내 품에 폭 안기는 거야. 너무 따뜻하고 느낌이 좋아서 한참을 안고 있었는데, 우리 둘째가 이렇게 좋은 소식을 주네.

  아직 비몽사몽 중인 새댁은 '어머님 축하드려요'라고 말했고 조금 전 공식적으로 큰며느리를 맞이한 시어머님은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실은 너네 꿈일까 싶어 조심했는데 둘째네 꿈이었어, 너네도 얼른 소식 있었으면 좋겠네' 하셨다. 시동생 부부가 일찍이 손녀를 안겨 드렸어서 급하거나 초조하진 않았지만, 아이가 생기면 나도 태몽을 꿀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자 아픈 와중에 배시시 웃음이 났다. 그깟 태몽이 뭐라고. 

  두 번의 유산 동안 태몽은 없었다. 내가 태몽을 꾸지 않아 아이가 가버린 건가, 이런 생각이 더 많이 울게 했다. 첫째가 안정기에 들어서서도 한동안 꿈은 없었다. 엄마, 나는 왜 태몽을 안 꿀까, 나의 말에 친정엄마는 묘한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꿈에 숲 속 어느 멋진 나무로 만든 집을 들어갔어. 공기가 너무 좋고 다 좋았는데 집에 아무것도 없고 집 한가운데에 아주 커다란 나무가, 진짜 어른 몇이 안아도 못 안을 만큼 커다란 나무였어. 그 나무만 집에 있는데 너무 커서 집 천장을 뚫고 올라가 있었어. 너무 멋진 나무라 꿈 깨고도 한참 생각이 나더라니까.

  아놔, 그러니까 엄마 울아기 태몽 꾼 거야?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원래 태몽은 가족 아무나 꾸면 돼. 

  엄마는 내 태몽 엄마가 꿨잖아. 나도 내 아기 태몽 내가 꾸고 싶었거든.

  어쩔 수 없지, 다음에 꿔.

  엄마는 마치 '다음에 편의점 가서 아이스크림 사먹으면 되지'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로 나른하게 말했다. 태몽 인터셉트라니. 분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가 꿔준 태몽이 맘에 들었다. 나무집에 커다란 나무라니. 너무 환상적이고 환타스틱하잖아.(그게 그거구나) 둘째까진 생각이 있으니 둘째 태몽은 꼭 내가 꿔야지, 음, 잉어도 좋고 나무도 좋고... 또 뭐가 좋을까, 궁금해 기대돼 기다려져, 빨리 낳고 둘째 가져야지. 육아의 쓴맛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둘째 태몽을 꿈꾸며 행복한 입덧을 이어갔다.


  첫째 때보단 덜한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옥 같은 둘째 임신의 입덧을 잊기 위해 침대에 누워 도깨비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전화기에 '어무니'가 떴다. 여보세요, 진샤야 잠시 통화되니, 네 말씀하세요 어머니. 

  글쎄 내가 어제 꿈을 꿨는데.. 

  (불길하다)

  아무래도 아기 꿈인 거 같아. 글쎄 있잖니, 광 알지 광, 광 몰라? 그... 옛날 창고 같은 거 있어. 깨끗하고 넓은 광에 들어갔는데 한쪽 벽에 마늘이 마늘이 알이 굵고 싱싱하고 보기 좋은 마늘이 한그득 쌓여 있는 거야. 내가 '어머 이게 다 뭐야' 하면서 한가득 안아 봤다니까. 마늘이 너무 많고 보기 좋아서 계속 생각이 나는데 아무래도 우리 아기 꿈인 것 같구나.

  와, 어머니 멋진 꿈이네요......라고 간신히 말했다. 태몽으로 손색없이 멋진 꿈인데... 제가 꿨어도 될 것 같은데.... 그 꿈은 왜 어머니에게 갔을까요,는 말하지 않았다. 하여간 너는 잘 먹고 잘 쉬고 좋은 생각 하며 지내도록 해, 네 어머니 그럴게요. 도깨비와 저승이가 파 봉지를 들고 안개를 헤쳐나오며 멋짐 뿜뿜하는데 나는 웩웩. 너는 잘 크고 있구나 그럼 됐다, 하면서도 어쩌면 인생에서 마지막 기회?! 일 수 있었던 태몽이 시어머님 잠 속에서 진행된 게 내심 속상했다. 아 왜 친정엄마도 시엄니도 내 태몽 다 가져가시는 거야, 나도 칼라로 꿈 잘 꿀 수 있는데! 생생하게 잘 기억하고 설명할 수 있는데!!! 


  세월은 흐르고 흘러 둘째도 14개월이지만 어쨌든 3살이 되고 첫째도 5살이 되던 2019년 1월 1일, 임테기 두 줄에 나는 7시간을 바쳐 꼬박 울었다. 오로지 아이 둘 다 어린이집 보내고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게 유일한 장래희망이었던 그즈음의 내게 찾아온 새로운 생명, 너에겐 미안하지만 엄마는 한동안 좀 우울할게. 그렇게 대략 보름 정도의 우울 기간을 마무리하던 어느 아침, 남편이 아침부터 골똘한 표정이었다. 

  남편님, 우리 이제 딸린 입이 세 개가 될 예정이에요, 어디 아프거나 주식하거나 그러면 안 돼요.

  아니 그게 아니고.. 어제 꿈을 꿨는데 이상하게 계속 생각이 나요. 엄청 큰 구렁이가,

  아 잠시 이건,

  계속 들어봐요. (싫은데요) 엄청 큰 구렁이가 진짜 엄청 컸어, 색깔도 검은색이랑 회색의 구렁이가 투명한 봉지에 담겨 있는 거예요. 와 진짜 그런 구렁이 처음 봤어. 그런데 그 녀석 꼬리 쪽에 노랗고 작은 물고기... 음... 이름을 모르겠네, 하여튼 그물고기가 따로 봉지 같은 것에 담겨 꼬리를 흔들며 있는 거예요. 구렁이는 굵고 큰데 그 물고기는 작고 귀여워서... 이건 뭐지, 하는 그런 꿈이었어요. 너무 생생하고 계속 생각나.

  아...... 이렇게 마지막 태몽의 기회를 남편에게 고스란히 인터셉트당하는 나란 여자, 넌 진짜, 아이 셋 낳으면서 태몽 안 꾸고 뭐 했니. 멍청하고 한심하도다 김진샤. 또다시 우울과 울적과 적적과 적정 수준의 짜증, 공허, 허무, 난감, 실망 기타 등등 부정적 감정들이 다 밀려왔다. 그 와중에 태몽 검색, 구렁이는 아들 꿈이라는 데 물고기는... 딸? 이 아이의 성별은 제3의 성인가... 일단 건강하게 잘 낳고 보자. 


  이렇게 건강하고 아프게 딸 셋을 낳고 행복하게 잘 지냈습니다,

  로 끝나면 좋겠지만, 현묘한 꿈을 잘 꾸시는 시어머님 덕분에 나는 자주 태몽 수다에 소환된다. 어머님은 남편 태몽과 첫 손녀, 둘째 손녀, 그리고 나의 둘째 딸인 당신의 넷째 손녀까지 태몽을 꾸신 태몽부자시다. (이 정도 되면 태몽은 사람 가리고 찾아가는 것만 같다) 특히 나의 결혼식 때 말씀해 주신 토끼 태몽을 자주 이야기해 주신다. 내가 있잖니 그 꿈은 유독 너무 생생하게 꿨어. 글쎄 이렇게나 크고 북실북실한 토끼가 내 품에.. 어머님 그 얘긴 이제 그만. 아 그러니 하하하하.

  결혼 10년 차에 접어드는 올해까지 대략 78번 정도 들은 것만 같은 토끼 태몽 이야기. 이 정도 되면 그 토끼 이야기를 납작하게 눌러줄 아주 강려크하고 세련되며 호화롭고 정의로우며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의 교훈이 가득한 태몽을 하나 진득하게 꿔서 호기롭고 정정당당하게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번생은 여기까지다.


더 이상의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없다. 

  다섯 살이 되는 막내는 지금도 밤기저귀를 한다.(빨리 컸으면 좋겠는데 올 한 해 네 살을 한 번 더 할 예정이시다.. 눈에서 물이...) 더 이상의 임출육은 불허한다. 태몽은 다음 생에. 가능하면 보름달에서 점프해 내려온 초슈퍼울트라토끼가 주인공인 꿈으로. 


  아, 그러고 보니 나의 다음생 목표는 큰 바위인데... 큰 바위가 되어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한 자리를 지키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래 사는 건데... 그럼 다다음생으로 미뤄지는 건가, 태몽은.... 태몽이 뭐라고 이리도 집착하는가 나여.... 20여 년 후 나의 아이들이 아이를 갖게 되면 희망이 생기는 건가..... 태몽에도 필요한 건 역시나 꺽이지 않는 마음인 건가... 초중고대 마치고 사회 보내고 연애하고 양가 상견례하고... 


  일단 막내 기저귀부터 떼자. 토끼처럼 온 집안을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돼지띠 막내 기저귀부터. 





* 애셋 낳으면서 태몽 한 번 못 꿔봤다고 징징거리는 아줌마의 하소연이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 토끼의 해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희망하시는 일들 이루어져서 많이 웃으시는 한 해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대문사진 출처: 로고요고


사진 출처 urbanbrush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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