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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샤 Mar 14. 2023

징검다리

권대웅, < 이곳 속 저 너머> - 마이쮸



애기 보살, 나와서 감자 좀 깎아.

애기는 아니었지만 '애기'는 꼭 붙었다. 그곳에서는 애기인 편이었다. 처음엔 조는 척하는 거였는데 나는 어느새 진짜로 졸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가지뿐이었다. 조는 척을 하거나 진짜 졸거나. 울력을 피할 방법은 그뿐이었다.

감자를 깎거나 양파껍질을 벗기거나 고추장 담글 고추를 닦거나. 아줌마들과 할머니들 사이에 빙 둘러앉아 노동을 하며 염불을 하느니 그냥 앉아서 염불이 백 번 나았다. 일은 싫었다. 나는 일을 하려고 스테이하는 것이 아니었고 기도를 하려고 머무는 것이었으니까.

눈은 뜨지 않고 중얼중얼거리자 비구니 스님은, 누가 보아도 일하기 싫어하는 젊은 보살의 무릎을 흔들었다.

젊은 보살이 일을 해야 빨리 저녁을 먹지, 일을 하는 것도 기도고 부처님 앞에 공양 올리는 거야, 얼른 엉덩이 떼.

할머니들 사이에 비집고 앉아 비구니 스님들이 오전 내내 캐 온 감자를 깎기 시작했다. 손에 쥐인 건, 감자가 세월 따라 오른쪽 윗부분을 파먹은 숟가락 하나. 이거보다 잘 깎이는 게 없어, 최고의 장인이 세심하게 만들어 낸 도구를 내어주듯 선심 쓰는 비구니 스님의 손에 들린 숟가락도 내 것과 비슷해 보였다. 아유 참한 보살이 기도를 다 오고, 공덕 많이 쌓아요. 어색한 끄덕임이 끝나기도 전에 구수한 트로트 같은 염불이 귓전에 박혔다. 관세음보살, 관셈보살, 관세으음보살. 애기보살도 질세라 슬픈 발라드 같은 염불을 입 밖에 내었다. 간절한 기도가 자연스레 솟아났다. 빨리 시간이 흘러 이곳에서 나가게 해 주세요.

청량한 공기와 맑은 얼굴의 스님들과 정갈한 생활, 그만큼 정갈한 밥. 이것들은 정기적으로 간절해졌다. 여름과 겨울마다 삼박 오일씩 머물렀다. 충남 단양으로 향하는 버스표를 끊고 매번 나의 발은 고속터미널 편의점으로 향했다. 포도맛, 딸기맛, 천 원.

처음 템플스테이를 갔을 때 깨달았다. 그곳에서 단 것이라곤 오이나 사과 정도라는 것, 인공감미료와 문명의 달달함이 포함되는 맛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그다음 스테이 때는 버스 시간이 촉박했다. 바쁜 와중에 잊지 않은 것은 세속의 단 맛이었고 편의점에 들어가 눈에 띄는 작은 것을 챙겼다. 그게 시작이었다.

감자 깎기 울력은 저녁공양 전에야 끝이 났다. 어깨도 손목도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아아,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이리도 고통스럽던가. 손톱 밑이 새카매진 나의 손은 씻지도 않고 가방 깊숙이 어두운 곳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맛이든 상관없다, 한 번에 두 개다. 딸기맛이었다. 두 개를 벗겨 한 입에 털어 넣었다. 우적우적. 네 시간의 고행도 우적우적. 깨달음도 우적우적. 기도고 뭐고 꿀꺽. 아, 살 거 같다.


친구들의 취업 소식은 믿기지가 않았다. 걔가 은행이라고? 공기업? 스튜어디스 진짜 됐구나. 두 번만에 임용 붙었대. 이십 대에는 자고로 하고 싶은 걸 해야지, 남들 가는 길 가다가 정작 가야 할 내 길을 못 가,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대학 졸업과 동시에 중고 신입생이 되었다. 인도불교사와 산스크리트어와 초기불교경전을 공부하며 들려오는 대학동기들의 취업소식에 나는 다시 주특기를 살려 숨어들었다. 절간에 왔지만 진짜 절간으로, 이름도 좋은 템플스테이.

'해주세요' 기도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는 타인을 위한 기도가 힘이 있다고 스님들은 설법했지만, 이십 대 중반의 들끓는 마음속엔 오직 '해주세요' 뿐이었다. 인생 잘 풀리게 해 주세요, 취업 안 될 거면 대학원 길이나 뻥 뚫리게 해 주세요. 남자친구 생기게 해 주세요, 이 모든 알 수 없음(無明)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

어떤 때는 정말 영혼 깊이 기도를 하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선택과 사람에 있어 지혜로운 결정이 있도록 해주세요. 이 역시 해주세요, 로 끝이 났다. 그러다 꼬르륵 잠이 들고, 목탁 소리에 눈도 뜨지 못한 채 새벽예불을 위해 대웅전으로 향했다. 합장을 하며 탑을 돌면 그제야 잠이 깼다. 대부분의 순간이 허탈했다. 이 공기 좋은 곳에서 부글대는 내 마음 하나 제대로 가라앉히지를 못하다니.  

템플이고 스테이고 다 때려치우고 싶어질 때마다 가방 깊은 곳을 뒤적거렸다. 어떤 때는 딸기, 어떤 때는 포도. 하나씩 까서 입에 넣었다. 예외적인 순간을 제외하고는, 씹는 건 금지였다. 달달함은 오래가야 했다. 혀에 올라와 있는 것을 침이 녹이고 목구멍을 넘어가 온몸으로 맛과 향이 퍼지는 것을 감각했다. 모세혈관의 끝에서 끝으로, 뉴런의 전기신호 속에도 포도와 딸기는 잊지 않고 스며들었다. 느리고 섬세했다. 맛에 집중하고(止) 나의 몸에 일어나는 작용을 보았다(觀). 몇 시간의 염불과 기도 명상에도 없던 깨달음이 그 맛의 어느 일순간 번쩍였다. 지금의 나에 집중하기. 지금, 이곳의 나 그 자체로 존재하기, 지나간 시간에 집착하지 말고 앞으로의 시간에 불안하지 않기. 빨간색과 보라색의 껍질을 들여다보았다. 이 세속의 맛이 없었다면 스물다섯의 진짜 나에게 도달하지 못했겠구나. 껍질들을 가방 속으로 밀어 넣고 기도실에 들어가 고쳐 앉았다.

달빛이 초선(初禪)에 들어 명징한 넋을 가진 밤, 나의 작은 해탈, 나의 커다란 마이쮸.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있었던 템플스테이마다 나의 가방엔 염주처럼 똬리를 튼 마이쮸들이 법우(法友)처럼 고요하게 자리했다. 세 가지 맛을 다 가져가는 건 속세를 미련스럽게 챙겨가는 것만 같았다. 오직 두 가지. 한 가지 맛의 부족으로 인해 완성된 결핍은, 무미하고 건조하며 때론 고달픈 템플스테이 생활에 돈오(頓悟)처럼 내 입을 찾아왔다.



인생이 매일 고통의 바다(苦海) 임을 실감한 건 십여 년이 지난 후였다. 내 손에는 '불량육아', '군대육아' 같이 조금은 삐딱한 제목의 육아서들이 쥐어 있었다. 착한 육아서를 따라갈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대충 키워도 잘 크더라 하는, 막된 위로가 필요했다.

'뽀로로와 마이쮸가 없었다면 나는 아이를 키우다 미쳤을지도 모른다.'  

이 한 문장에 책을 덮고 오래 울었다. 첫째에게 매일 유튜브를 틀어주고 불량식품이나 먹인다는 죄책감이 긴 시간을 두고 녹아내렸다. 그제야 찬장을 열어 숨겨둔 연두색 통을 꺼냈다. 사과맛이었다. 한꺼번에 세 개를 우적우적 씹었다. 배 속 둘째도 신이 나서 발길질을 해댔다.



마이쮸 같은 거나 사러 가.

아침에 간 마트에 오후에 또 가면 한심한 아줌마로 보지 않을까, 하는 나의 말에 친구가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의 말은 농담으로 나왔다가 진담으로 내게 들어왔다.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첫째 키울 때나 잠시 먹이고 먹고 내내 잊고 지냈던 걸 샀다.  오셨네요. 덕분에 오전에만 보던 마트 직원의 얼굴을 오후에 도 볼 수 있었다. 오후만큼 농후해진 친절함이어서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오전에는 당근과 양파와 무와 콩나물을 사던 이가 오후에는 마이쮸만 샀다. 자주 가던 카페와 도서관에도 인사를 전하고 오던 참이었다. 다음 주에 이사 가요, 시간 되면 또 올게요, 말을 하고 나오는 내 손에는 포도와 딸기, 사과, 복숭아 맛 별로 들려 있었다. 마이쮸라서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방황에도 육아에도 이별의 말에도 적절하게 필요한 달달함이었다.


포도와 딸기와 사과 맛이 나는,

보라색과 붉은색과 연두색으로 놓인,


때론 네모지고 때론 둥근 징검다리를 밟으며 생의 이곳까지 왔다.

돌아보니 그랬다,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또한 그러하다.

여전히 놓일, 색색의 달콤한 고통의 공간들이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징검다리를 녹여가며

비로소 생의 저 너머까지 안전하게 건너갈 나의 나들이.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복숭아맛만 몇 개가 남았어요 집 앞 마트에는 복숭아맛만 없어요
그대와 나 사이에 녹지 않게 띄엄띄엄 두고 그 너머로 건너가 복숭아맛을 살래요

사과와 포도가 열리고 딸기가 나올 때까지 그리고 다시 사과가 열릴 때까지
윤회가 지칠 때까지 천천히
같이 녹여먹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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