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샤 Jul 04. 2023

이윽고

김기택, < 슬픈 얼굴 >





어떤 가수는 이윽고 내가 한눈에 너를 알아봤을 때,라고 시작하는 노래를 불렀다. 어떤 시인은 이윽고 슬픔은 그의 얼굴을 다 차지했다,라고 시작하는 시를 썼다. 또 다른 시인은 멀어진 후에야 이윽고 사랑이 와서 뒤늦은 엄살을 으깨며 내내 잊고만 사니 나 행복하다, 라며 믿지 못할 말을 했다. 모든 이윽고들은 어느 만큼 의 시간의 무게를 달고 와서 일정한 묵직함을 견딘다.


이윽고,라고 발음을 해본다. 소리로 나오는 이윽고는 시간의 무게와는 달리 꽤나 경박하다. 별생각 없이 이윽고, 하고 한 번 더 소리를 내다가 그만

눈물이 난다. 나의 이윽고, 가 무슨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무얼 하려고 이리도 소란스러운 건지. 사전을 검색해 본다. 얼마 있다가. 또는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에.


시간이 흘렀다. 얼마쯤의 시간이. 한눈에 알아볼만한 혹은 슬픔의 할당량을 채울 또는 사랑이 도달할 어느 정도의 시간. 무엇을 잊기에 무엇을 충분히 그리워하기에 충분한. 잎이 졌다가 눈이 내렸다가 잎이 피었다가 그보다 늦게 핀 꽃이 졌다가 비가 내리기에 충분한. 그러니까 이 모든 시간은 '이윽고'를 데리고 다니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윽고는.


이윽고, 뒤에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 바라본다.

정해져 있는 말이 있지만 자꾸 다른 말들을 생각해 본다.

이윽고 노트북을 열었다. 이윽고 이 나이까지 살아내었다. 이윽고 시를 완성했다. 이윽고 그곳에 도착했다. 이윽고 당신을 만났다.

이렇게까지 쉽게 써도 될 부사인가, 조금 고민하고는 다시 이윽고를 남발한다. 이윽고 영화를 다 보았다. 이윽고 계절이 갔다. 이윽고 눈물이 멈췄다. 이윽고 너를 잊었다.

이와 윽과 고가 만나 이루어진 단어의 틈에 도대체 얼마의 시간이 숨어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누군가의 이윽고는 2500년일 테고 누군가의 이윽고는 고작 6개월도 되지 않을 테고 누군가의 이윽고는 아직 오지 않았을 지도.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나의 이윽고 뒤에는, 정해진 말은 끝까지 하지 않고 대신하고 싶은 말을 붙여보려 한다. 이윽고 만났다. 이윽고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윽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오랜 말에도 있지 않던가.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 인연만 있다면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만난다는 것. 어느 평론가는 오랜 시를 이야기하며 진리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인생에는 막으려는 힘과 일어나려는 힘이 있다는 것. 아무리 막아도, 일어날 어떤 일은 일어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시간이다. 이윽고 부사만 놓치지 않고 쥐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천리도 막으려는 힘도 시간 앞에서는 무너지고 바스러지고 끝내 사라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이기고 마침내 '이윽고'를 불러낸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쓰고자 한다.


이윽고 슬픔을 무릅쓰고 다시 쓰려한다. 시가 우리를 다시 쓰게 할 것이다.


지금부터 '다시'까지의 사이에는 오로지 시간만이 놓여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기다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모를 수가 없다. 그때까지 나는 천리와 막으려는 힘 밑에 가만히 납작해져 있을 것이다. 인연과 일어날 일의 '발생'이 있을 때까지 나는 그리고 너 그대 당신은 이윽고를 잊지 않으면 된다.


그때까지는

얼굴에 묻은 슬픔을 닦지 않고 있으려 한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가장 오래된 인생의 낯익음 - 공무도하가' 부분 중.






진샤와 폴폴이 시에 관한 모든, 뭐든 주고받습니다  


시간과 슬픔 중 어느 쪽이 힘이 더 세냐고 물으신다면
저의 굽은 손은 전자를 택할 것입니다
다른 한 손은 울음을 틀어막고




진샤와 폴폴의 '시에 관한 모든 뭐든'이 '이윽고'를 필요로 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다시 쓰려한다, 를 쓸 때

창 밖 계절은

다정이라는 단 하나의 성격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흐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