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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jay Jan 01. 2021

세상이 허무하지 않다면, 이 여행은 이제 충분하다.

개똥 철학자의 가출 (6)

장맛비 내리던 원주에서의 첫날을 어딘가에서 잤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그곳이 깨끗이 지워져 있다. 아무리 기억 상자 속의 오래된 구석을 뒤져도 원주에서 첫날을 묵었던 곳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가 부러졌던 순간이 너무 강렬했기에 그 날의 다른 기억이 모두 리셋되어 버린 것일지도. 다음 날은 치악산에 오를 수 있게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 생각난다.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아 치악산을 향할 수 있었다. 벌써 여정을 시작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가출 여행이 날을 거듭할수록 갑갑한 마음은 해결되지 않고 더욱 심해져 갔다. 자유를 찾아 떠난 여행인데 별 다른 자유는 없었다. 이 산의 정상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과 풍경이 나의 답답한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겠지. 치악산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멀고 높은 산이었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이리 길고 험하니 분명 정상이 주는 해방감은 더욱 크고 짜릿하리라.  


정상에 도달했다. 사람이 많았다. 날파리도 많았다. 장마가 시작되어 덥고 무척 습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인지 안개인지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도, 탁 트인 시야도 없었다. 배는 고픈데 끈적끈적하게 땀범벅이 된 얼굴에 날파리가 달려들었다. 어디서 이렇게 사람들이 꾸역꾸역 올라왔는지 조용히 앉아 있을 공간 조차 없었다. 짜증이 났다. 이런 걸 기대하고 온 것이 아닌데...


사람들을 피해 한 구석에 주저앉았다. 줄곧 나와 함께 했던 노트를 꺼냈다. 일기장. 내 머릿속의 공상들의 유일한 해방구다. 그곳에 내 생각의 흐름들을 가감 없이 적어 넣었다. 어떤 평가도 교훈도 없는 몽상의 분출구였다. 일기장을 열어 아무것이나 뒤틀린 심사를 생각나는 대로 적기 시작했다. 구들도 생각이 나고, 혼자만 좋아했던 여학생 생각도 났다. 그들은 이렇게 떠나버린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를 그리워할까? 나를 기억해줄까?


세상 근심 다 짊어진 근엄한 표정으로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지난 5일간의 여정을 복기하며 생각에 잠겼다. 차비만으로 가지고 나온 돈은 이미 바닥을 보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별로 굶지도 않고 여기까지 온 것이 신기했다. 배고픔의 순간마다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잘 곳도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때마다 만난 인연들이 특별했다. 그때 문뜩 내 일생일대의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내가 밤을 지새우며 찾아낸 진실이 세상살이가 다 무의미하고 허망하고 쓸모없는 것이라면, 지난 5일간 내가 겪은 세상은 이렇게 따뜻하면 안 된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돕기 위해 따라다니는 것 마냥 배고플 때 먹을 수 있었고, 비를 피해 누울 수 있었다. 생각보다 세상은 허무하지 않았다. 이 세상이 무한한 어떤 사랑의 존재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유의미로 가득할지도 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강타했다. 온갖 짜증을 내며 앉아 있던 치악산 정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대 전환이 일어났다.


해머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 세상이 허망하고 무의미하지 않다면, 이제 이 여행은 충분하다.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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