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공부…
‘100편의 영화에 나오는 100개의 샌드위치’에 대한 독특한 책이 있다는 포스팅을 읽었다. 그 책의 제목은 “영화 속 샌드위치 도감”(저자 주혜린)으로 영화와 샌드위치에 진심인 저자가 영화 속 샌드위치가 등장하는 장면에 얽힌 서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한다. 그 작가는 적어도 몇백 편의 영화를 몇 번씩 반복해서 봤을 것이다.
그 글을 읽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에게도 한 가지 주제로 100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혹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나?’
곧바로 그 주제가 떠올랐다. 그것은 계절별로 지역별로 피고 지는 다양한 색과 모양의 꽃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책을 좋아하니까 다양한 책에 등장한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식물들을 주제로 쓸 수도 있겠다. 물론 전공분야도 아니고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분야도 아니지만 요즘 내가 진심인 주제니까.
오래 전일이지만 또렷한 기억이 있다. 2007년쯤인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직은 신입사원이라고 불릴만한 병아리 시절, 회사 산악회에서 한라산 산행을 다녀왔다. 어쩌다 대표로 기행문을 적게 되었는데 게시판에 올린 나의 글을 보고 자연물에 정통하신 선배 한분께서 내가 ‘관음죽’이라고 적은 식물명이 틀렸고 글에서 묘사하고자 했던 식물은 ‘조릿대’라고 지적하셨다.
한라산에도 몇 번이나 다녀오고 한국의 자생식물에도 관심이 깊어진 지금 생각해 보면 한라산의 생태계에 그토록 중요한 조릿대를 오해한 것은 어이없는 실수였다. 하지만 그때 당시 애써 적은 글에 대한 감상 한마디 없는 까칠하고 뾰족한 선배의 댓글이 마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쓰냐’라는 말로 읽혔고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얼굴이 붉어졌었다.
그 이후 잘 모르는 것을 허투루,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기술사’ 자격 취득에 도전했다. 기술사는 국어사전 정의에 따르면 ‘해당 기술 분야의 고도의 전문지식과 실무 경험에 입각한 응용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법에 의거한 기술 자격 검정 시험에 합격한 사람’으로 즉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에게 부여되는 자격이다.
입사 초기부터 이 자격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지만 둘째 아이를 낳고 나서야 최종적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 아직 30대 이긴 했지만 입사 13년 차였고, 이 연차쯤엔 나도 기술사 자격에 걸맞은 경험과 통찰을 가진 속칭 ‘찐’ 프로페셔널 엔지니어가 되어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나의 소망이.. 최소한 반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기술사 자격수첩을 뒷주머니에 든든히 넣고 나간 현장에서 내가 맞닥뜨린 감정은 운전면허를 갓 취득한 초보 운전자가 된 기분이었다. 현장에는 운전면허시험장에 있는 –자와 s자 도로뿐 아니라 그야말로 면허를 반납하고 싶게 만든다는 부산도로 같기도 하고 갈길이 막막한 추석연휴 경부고속도로 위 같기도 해서 아직도 공부하고 경험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기술사 자격증을 손에 넣었을 때 느꼈던 자부심은 이내 사라지고, 오히려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은가를 절감했다.
물론 사업 현장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마법 같은 솔루션을 제시하시는 ‘갓’술사님들도 분명 많은 곳에 존재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든 그분들에게든 공부는 끝을 셀 수 없는 숫자처럼, 경계를 알 수 없는 우주처럼 지속되고 확장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을 공부하고 그것을 지속확장하는 것이 좋을까.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것과 설레는 것, 그래서 내가 공부를 지속할수 있도록 하는 것들을 공부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진짜 유리한 방법이다. 지금 조금 못 한다 해도, 모른다 해도 좋아하면 계속하고, 계속하면 잘해지고, 잘해지면 더 좋아지는 것이다.
누군가 ‘틀렸다’ 또는 ‘모른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눈물이 쏙 빠지는 옆차기를 날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돕고 싶다면 그가 조금 헤매더라도 자신의 길을 찾아 가게 바라봐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는 많이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혼나면서 배웠던 것은 오래 기억에 남을지는 몰라도 나쁜 기억으로 오래 남는다.
다시 100가지 꽃과 나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왜 그 주제를 생각했나. 그 책을 만들기 위해 100가지 식물을 세심하게 고르고 분류하는, 그림을 직접 그리거나 맘에 드는 이미지를 찾아보고 있을 나를 상상하게 된다. 그 마음은 즐거움과 설렘이다. 많이 알고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성취감과 기쁨이 우리를 더 성장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마음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 잘 간직하고 싶어졌다.
만약 그 책을 진짜로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내 손으로 고른 100가지 식물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인식될까. 나는 식물과 책에 대해 더 진심으로 다가가고, 그로 인해 다시 한 뼘 성장할 수 있을까. 아마 책 한 권을 완성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일 것이고, 돈도 많이 못 벌어다 줄지 모른다. 그렇지만 기쁠 것이다.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이 세상에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운 일을 하면서 성장하는 행운의 사람들은 인구의 몇 퍼센트쯤 될까? 우리 회사에는 몇 퍼센트쯤 있을까? 우리가 조금 헤매더라도 자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게 좋다는 것을 나는 배우며 자라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까? 정말로 네가 설레고 좋아하는 공부를 찾으라고. 어차피 공부는 끝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