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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나비 May 25. 2024

봉이 박나비

이보게들 이 와인 한 번 사봄이 어떠한지?

마트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편이다.

들어가면 와인코너를 휘익 둘러본다.

의미 있게 세일하는 녀석들이 있는지 훑어보다가

눈에 띄는 녀석이 있으면 슬쩍 병을 들어

라벨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


한 달 전쯤이었던 것 같다.


와인 코너를 천천히 둘러보는데

처음 보는 와인이 40프로가량 할인을 하길래

슬쩍 병을 들어 살펴보았다.


포르투갈 와인, 2016년 빈티지.

가격은 2만 원 초반.


빈티지에 비해 나쁘지 않은 가격이다.

게다가 포르투갈 와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다.

도수가 강한 포트와인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먹어본 몇 종의 포르투갈 와인이

다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래. 오늘은 너다.

한 병을 고이 싸서 집으로 데려온다.

코르크 마개를 열고 잔에 조금 따른다.

바로 호로록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잠시 와인을 그대로 둔다.


에어프라이어에 종이포일을 깐다.

함께 먹기 위해 사온 통삼겹구이를 조심스럽게

올려두고 작동 버튼을 누른다.



에어프라이어 타이머가 끝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경쾌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통삼겹을 도마에 올려두고

왼손에 일회용 비닐장갑을 착용하고

오른손에 우리 집 보검, 헹켈 쌍둥이 주방칼을 든다.


이제 보기 좋게, 그리고 먹기 좋게

썰기만 하면 된다.


아.. 뜨겁다.


왜 족발집이나 보쌈집 사장님들이

비닐장갑 안에 두꺼운 목장갑을 끼는지 알겠다.

목장갑을 찾자고 창고를 뒤지기는 귀찮으니

수저통에서 고기 집게를 가져와 통삼겹을 잡는다.  

하지만 고기 집게로는

두꺼운 통삼겹이 온전히 고정이 되질 않아

썬 고기들의 모양과 두께가

가지각색으로 삐뚤빼뚤하다.


‘보기 좋게, 그리고 먹기 좋게’에서

‘보기 좋게’는 포기하기로 한다.

포기도 참 빠르지.


처음엔 분명히 통삼겹이었던,

이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고기 덩어리들을 접시에 소복이 담는다.


자리에 앉아 뿌듯한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제 와인을 한 모금 마실 차례다.


엇?


다시 한 모금을 마셔본다.


어라?


마저 잔을 비운다.


우와!


이 와인.. 맛있다!

이 가격이면 정말 괜찮은데?

두툼하게 썬 고기 한 점을 집어 질겅질겅 씹으면서

와인병을 들어 비어있는 잔을 채운다.


오늘. 마트. 성공적.


며칠 뒤, 다시 마트를 들러 와인코너를 서성인다.

아무리 둘러봐도 며칠 전의 이 녀석만 한 게 없다.

매대의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이탈리아 와인 섹션,

거기서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아래쪽 선반에

비스듬히 누워 잠을 자고 있는 녀석을

슬쩍 집어 올린다.


문득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각난다.

이렇게 맛있는 와인은 함께 나눠야 도리지.


친구들에게 톡을 보낸다.


[이보게들 이 와인 한 번 사봄이 어떠한지]


어떤 와인이냐며 궁금해하는 친구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어보라고

미끼를 톡을 던진다.


[맛있어! 원가로 구매대행 가능!]


나만큼이나 와인을 좋아하는

L과 Y가 걸려든다 답을 보낸다.


[나 한 병만 살게.]

[나는 두병 사다 줘.]


이렇게들 손이 작아서야 어디..


[진짜 강추!! 믿고 세병씩들 사!]


[오키]

[알았어]


역시 고소득 전문직 직장인들 답게

통도 크고 결정도 빠르다.

이래서 내가 너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돈부쳐]


백수가 이럴 땐 좋다.

난 돈이 없으니 너네가 돈을 보내줘야

살 수 있다는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금이 들어온다.


셀러에 8병의 와인을 채워놓으니 든든하다.

6병은 보관용이지만 어쨌든.


이렇게

내 와인 같은,

내 와인 아닌,

L과 Y의 와인 6병은

무겁다는 핑계로 한 번에 전해주지 못하고


L과 만날 때 한 병,

Y와 만날 때 한 병,

L과 Y와 만날 때 두 병..


다람쥐 도토리 꺼내먹듯 한 병씩, 두 병씩

L과 Y가 나오는 모임에 가져가 그 자리에서

야금야금, 홀짝홀짝, 헤롱헤롱, 쪼로로록

참 맛있게 마셨다.


며칠 전 친구 L과 Y가 물어본다.

그때 구매대행으로 맡겨둔

자기네 와인 몇 병 남아있냐고.


얘들아. 마트에 괜찮은 녀석 들어왔던데..


[이보게들 이 와인 한 번 사봄이 어떠한지?]






*사진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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