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잠깐이었지만..
반년 간 길렀던 머리를 잘랐습니다.
아, 타임.
머리를 잘랐으면 지금 이렇게 시원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글을 쓰고 있진 못할테니까,
다시할게요.
반년 간 길렀던 머리카락을 잘랐습니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닳아 없어질까
애지중지 기른…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자르고 보니 살짝..
아니 조금 많이 아쉽고 서운합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를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졌습니다.
머리를 기르기 전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꼭 만났었던
스타일리스트 선생님께 당일 예약을 하고,
예약시간에 늦지 않게 집에서 나와
터덜터덜 미용실로 걸어가는데
불현듯 무서운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내가 누군지 까먹었으면 어떡하지..
먼저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아 그랬는데 모르는 눈치면 진짜 최악인데..
아니다. 그냥 처음 온 사람처럼 행동하자.‘
입장 후 행동강령을 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합니다.
“진짜 오랜만에 오셨네요!”
고민이 무색하게 반갑게 맞아주시는 선생님께
마음으론 하이파이브를 열두 번 넘게 쳤지만
실제론 수줍어 몸을 베베꼬며 겨우 대답했습니다.
“네.. 아하하”
“머리가 많이 기셨어요!”
정해 주신 자리에 앉아 있으니 곧 다가오셔서
네가 장발장이냐는 말을
아주 밝고 활기차게 해 주십니다.
“네… 도저히 거지 같아서 못 기르겠어요..”
어떻게 자를 거냐는 그녀의 말에
나오기 직전 인터넷에서 찾아 캡처한 사진을
수줍게 보여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 합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짧은 머리의 현빈 사진에서
얼굴은 검정색으로 마구 색칠해 지웠으니
누군지 절대 모를 테지요.
“아.. 이렇게 잘라드려요?
전에도 이렇게 한 번 잘라 드렸었는데. “
아니, 미용사 양반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이런 머리를 한 적이 있다니!
“전에 완전 짧게 잘라 달라고 하셨을 때
기억 안 나세요? 그때 이렇게 잘라드렸었는데.”
동공지진을 일으키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확인사살까지 해주시는 걸 보니 맞나 봅니다.
힘없이 핸드폰을 내려두고
말없이 그녀의 손에 머리를 맡깁니다.
‘마음대로 해주세요. 어차피 얼굴이 현빈이 아닌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차마 입밖으로 내뱉진 못한 마음의 소리가
심장에서 간으로, 간에서 신장으로
이리저리 핑퐁을 하며 메아리칩니다.
샥샥샥샥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역시 미용사는 머리 깎을 때가
바리스타는 커피 내릴 때가
드라이버는 운전할 때가
농부는 농사 지을 때가
어부는 고기 잡을 때가
작가는 글 쓸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
저는 아직 이 모양 이 꼴인걸 보면
아직 한참 멀었나 봅니다.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이 아려옵니다.
괜히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렸다간
이 나이에 사연까지 있는 남자가 될까 싶어
급히 눈에 힘을 줍니다.
“왜.. 마음에 안 드세요?”
4시간 같은 40분이 지나는 동안,
저는 요즘 ‘선재업고튀어’라는 드라마가
엄청 핫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우리 미용사 양반이 그 드라마를 절반 정도
몰아봤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사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는 법.
그녀는 제가 딸래미 아이브 포토카드 수집 때문에
고통받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긴 머리를 자르는 이유 중에 하나가 동거인의
협박 부탁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은밀한 일상을 공유하며
짧은 머리 현빈스타일을 만드는데 온 힘을 합쳤지만
그 결과는… 또르르.
머리를 감고 마무리 정리를 위해
다시 자리에 앉아있는 제게 그녀가 물어봅니다.
“여름휴가 계획 정하셨어요?”
백수에겐 매일매일이 휴가라는 말을
마른침과 함께 삼키며,
교양 있는 현대의 서울 사람처럼 예의 바르게 대답.. 하려 했으나.
“휴가.. 가야죠.. 가겠죠.. 갈 거예요 아마. “
다 큰 사십 대 중년 남자의 옹알이를 듣고도
예의 바르게 웃어주는 걸 보면,
그녀야말로 교양 있는 현대의 서울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안 되겠습니다.
“아, 휴가 계획 벌써 잡으셨어요?”
상대의 질문이 당황스럽거나 딱히
할 말이 생각안나거든 그 질문을 그대로 돌려하라!
역시!
질문을 되돌려치자마자
웃으며 말을 꺼내는 그녀입니다.
“아, 저는 베트남으로..@&₩(;:&@-@₩)”
그렇게 그녀가 이번 여름 친구와 함께 호찌민으로
휴가를 간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고,
저는 그에 상응하는 은밀한 정보를 내줄 게 없어
당황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 오늘이 여기 마지막 날이에요.”
“?????????”
아니! 미용사 양반!!
나는 이제 그럼 어디서 머리를 깎으란 말이오!!
“오늘 예약 메시지 보고 깜짝 놀랐어요.
인사드리고 가게 되어서 다행이에요.“
미안한 듯 양 손바닥을 비비며 말을 하는 그녀에게
언제까지 쉬는 건지,
서울을 벗어 날건지,
설마 이제 미용일을 하지 않을 생각인지!
흥분해서 연타로 몰아붙이는 저에게
그녀는 차분히 답을 해줍니다.
잠시 쉴 예정이고,
당연히 미용일은 계속할 거고,
다시 일을 시작해도 서울에서 할 거라고.
카드기기에 카드를 꽂으며 괜히 서운한 마음에
저도 몰래 한마디가 툭 튀어나옵니다.
“어쩐지.. 오늘 오고 싶더라..”
너무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다시 시작하게 되면
꼭 연락 달라고 두 번이나 말을 하고
두 번의 다짐을 받고 미용실을 나옵니다.
내 머리 제대로 만져주는 사람 찾기 힘든데..
에휴..
서운함과 답답함을 뒤로하고 미용실이 있는
건물을 나서기 전 화장실을 들렀습니다.
손을 씻고 고개를 들어보니
현빈이 저를 보고 웃고있습니다.
*선생님, 호치민 여행 잘 다녀오시고
꼭 다시 돌아와서 연락주세요!
*사진출처:내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