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도 한 번..
12살 딸이 가장 좋아하는 건
파자마 파티입니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모두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그저 먹고 놀기만 하면 되는
아주 멋지고 신나는 파티입니다.
이 파자마 파티가 열리게 되면
저에게는 아주 약간의 수고로움이 있습니다.
딸의 방에는 싱글 침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파자마 파티에 참석한 분들이 주무실 방을
별도로 만들어야 하는
아주 약간의 수고로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닥에 메트라도 깔아 어떻게 해서든
딸의 방에 모두의 잠자리를 마련하고 싶지만
싱글 침대와 책상 사이의 공간이 너무 좁아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파자마 파티의 인원이 2명 이상만 되면
(호스트인 딸은 카운팅에 디폴트이기 때문에, 사실
'2명 이상만 되면'이라는 가정도 무의미합니다.
그냥 '파자마 파티가 열리게 되면'과 같은 뜻으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무조건 옷방 겸 책장방을 정리해야 합니다.
옷방 겸 책장방 하나 정리하는 일이
뭐 그렇게 큰 일이라고 수고로움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호들갑이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반론에 대비해서 저는 그냥 '수고로움'이라고
하지 않고 '아주 약간의 수고로움'이라고
살짝 표현의 강성을 줄여놓았지만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시면..
사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그래도 나름 변명이라도 해보자면,
저 옷방 겸 책장방에는 제가 예전에 중고로 사놓은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 정말 여기 내려다 드리면 될까요?
- 네 괜찮습니다.
- 아니, 아휴... 이거 다치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저도 이거 실을 때는 두 명이서 같이 실었어요.
집까지 옮기는 거 좀 도와드릴까요?
- 아닙니다!
여기 저희 동 입구까지 가져다주신 것만 해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옮겨 보겠습니다.
- 아, 네... 그럼 조심히 옮기세요.
- 네네,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두 부분으로 분리해서 대형 SUV에 운동기구를
싣고 오신 판매자분은 매우 친절하셨습니다.
하지만 차마 이 운동기구를 집 안까지 함께
옮겨달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부탁을 들어주는 건 진짜 자신 있는데,
그 반대는 영 소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판매자분은 운전석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근심과 걱정 그리고 의구심이 가득한 얼굴을
저에게 보여주셨고,
저는 그럴 때마다 얼굴 가득 커다란 웃음을 지으며
얼른 들어가시라고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으로 내밀어야만 했습니다.
사실 이때라도 저분을 잡았었어야 했는데...
판매자분이 타고 온 대형 SUV가 떠나자마자
제 얼굴의 미소도 그 차에 몰래 올라탔는지
함께 떠나갑니다.
- 망했다...
그렇게 반나절의 사투 끝에 운동기구는
옷방 겸 책장방에 무사히 설치가 완료되었고,
집에 돌아온 아내는 운동기구의 거대함에 한 번
놀라고 소파에 드러누워 끙끙대고 있는 남편을 보고
또 한 번 놀랍니다.
- 아니 무슨 운동을 얼마나 하려고…
자, 이 정도면 옷방 겸 책장방을 정리하는 일에
'아주 약간의 수고로움'이라는 표현 정도는 써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추가 반론은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파자마 파티는 열고 싶다고
아무 때나 열 수 있는 그런 파티가 아닙니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고정으로 열리는
기간제 파티도 아니고,
어떤 조건을 달성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개최권을
획득할 수 있는 그런 조건제 파티도 아닙니다.
먼저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아내와 딸이 파자마 파티 개최 건을 걸고 딜을 할 때
(이하 '갑'과 '을'이라 하겠습니다.)
주변을 서성이며(설거지를 한다거나 바닥 청소를
하며) 들어본 결과 그 목표는 거의 대부분 학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수학학원 월례평가 성적이라든지,
영어학원 레벨 테스트라든지,
뭐 그런 종류의 것들입니다.
물론 그 목표만 달성한다고 해서 딜이 성사되는 건
아닙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을’의 노력이
'갑'의 눈에 보여야 하며, 그 이외에도 자잘한
몇 가지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켜야 비로소 저 딜은
성립됩니다.
아, 그 이전에 중요한 대전제를 빠뜨렸네요.
'을'이 저 딜을 시도할 때 '갑'의 마음이 지극히
평온한 상태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게 가장 중요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파자마파티가 결정되고 당일 오후가
되면 초대받은 친구들이 한 명씩 초인종을 누릅니다.
네, 그럼 이제 시작입니다.
신나는 파자마 파티가 시작됩니다!
밤새 계속될 것 같던 아이들의 수다 소리가
조금씩 줄어들고, 쌔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밤을 새울 거라 큰 소리를 뻥뻥 치더니,
결국은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했나 봅니다.
다음 날 아침 헤어지기 싫어 다들 몸을 베베꼬며
한 시간만 더, 30분만 더를 외치는 애들을 보니
제 어린 시절 한 토막이 떠오릅니다.
친구 집에서 자는 걸 허락받은 날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또 그다음 날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되면
얼마나 아쉬웠는지.
저를 쏙 빼닮은 어린 꼬맹이 한 명이
제 기억 저장소 한 곳을 비집고 나옵니다.
슬며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저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아쉽지 않을 때란 없다는 것을요.
30분을 더 있어도,
한 시간을 더 있어도,
아니 하루를 더 잔들 이 아쉬움은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다는 걸 어른이 된 저는
이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음에 또 파자마파티를 개최하기로 자기들끼리
굳게 약속을 하고서야 아이들은 데리러 온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되돌아갑니다.
자기네들끼리의 저 굳은 약속은 사실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파티에 온 참석자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
저는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합니다.
접시 하나에 다람쥐가 조잘거리던 장면이 떠오르고
포크 하나에 토끼가 까르르 웃어 넘어가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바닥에 떨어진 공주님들의 긴 머리카락들이
청소기로 빨려 들어가자
공주님들이 두고 간 지난밤의 수다들도
함께 빨려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옷방 겸 책장방을 치우는데
'아주 약간의 수고스러움'이 들긴 하지만
저는 이 파자마 파티가 참 좋습니다.
물론 저는 초대받지 않아 파티를 함께 즐기진
못하지만 참석하신 분들이 행복해하는 모습만 봐도
저는 충분히 즐겁습니다.
이렇게 간 밤의 즐거웠던 파티를 떠올리며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밌는 파티, 나도 한 번 열어볼까.
물론, 이 발칙한 생각은 떠오르자마자
바로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집니다.
'갑'이 요구할 달성하기 쉽지 않은 목표가
두렵기도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저는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딜을 시도하는 날,
'갑'의 마음이 지극히 평온한 때여야 한다는
이 대전제가 너무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 파자마 파티는
딸의 파자마파티를
준비하고, 구경하고, 뒷정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버킷리스트:
- OOO
- XXX
- ㅁㅁㅁ
- 파자마 파티
-.....
*사진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