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름과 유니폼

이번 주말..같이 하실까요?

by 박나비

나는 선택지가 많은 상황이 어렵다.

그래서 웬만하면 선택지가 없는 상황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선택지가 많으면 마음이 갈피를 못 잡는다.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이리저리 재는 것도 싫지만,

그렇다고 그냥 아무거나 막 선택하는 것도 싫기 때문이다. 참 피곤한 인생이다.

마트에서 무를 하나 사더라도 이 의사결정장애는 그 특유의 존재감을 사방팔방으로 뿜어내는데, 전에 이에 관한 글을 한 편 쓴 적이 있다. 재치와 유머와 감동이 한가득이니 시간 되실 때 한 번 읽어 보시길.


https://brunch.co.kr/@parknavi/31


중고등학교 시절엔 교복이 있어 좋았다.

늘 지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등교를 했던 그 전쟁 같은 아침마다 입고 갈 옷을 골라야 했다면 그건 정말 고역이었을 테니까. 특히 고등학교 교복은 아래, 위가 모두 검정이어서 좋았다. 나는 검정이 가장 좋다. 검정이 아니라면 회색도 괜찮다.

예전에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내 옷장을 열어 보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소름 끼치는 새끼.”


이런 까닭에 취업을 한 뒤로는 회사도 학교처럼 유니폼이 있었으면 했지만, 한 번도 유니폼이 있는 회사에 근무하지 못했다.


몇 달 전 전혀 생소한 분야에서 내가 다시 급여꾼 노릇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유니폼을 떠올렸다. 통근 시간도 긴 편이라 매일 아침마다 입을 옷을 고르는 건 아침잠이 많은 나에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저 알람에 눈을 뜨면 씻고 걸려있는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나가는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바지와 상의를 두 벌씩 골랐다. 한 주 동안 매일 이 두 벌의 바지와 상의를 번갈아 입고 금요일 밤엔 이 옷들을 모두 세탁바구니에 던져놓았다. 주말에 깨끗하게 세탁을 한 이 옷들은 그다음 주 내내 또 나의 유니폼이 되어주었다. 이렇게 나의 평화로운 아침은 계속될 거라 생각했는데..


날씨가 점점 따뜻해지더니, 요 며칠은 거의 여름 날씨다. 내 유니폼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저번주까지였었단걸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랴. 매일 아침이면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자동으로 이 가을, 겨울용 유니폼으로 손이 가는 것을. 다행히 오늘 아침은 비가 온다. 그리고 목요일이다. 내일 하루만 더 버티면 주말이다. 이번 주말엔 아무리 귀찮더라도 여름 유니폼을 정해야겠다. 바지는 얇은 걸로 두 벌, 상의는.. 여름이니까 최소 세 벌은 있어야겠구나. 옷장을 잘 뒤져보면 상의 세 장 정도는 구할 수 있겠지.


여러분, 이제 바야흐로 여름입니다. 옷장 정리 한 번 하실까요? 같이 하시죠! 저만 하면 억울하니까요.. :)


그럼 이만, 삼만, 사만.




*사진출처:pixabay

keyword
박나비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