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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현 Nov 22. 2023

다시 우리가 된 원감과 나

원감과 조리사의 격돌 3

급여는 내가 어린이집 문을 나설 때 입금이 되었다.

평소보다 한참은 늦은 시간이었다.

기본급의 10%인 정확히 181,624원이 떼어졌다.

(국공립어린이집 조리사 3호봉 급여는 세전 2,026,000원이고 시에서 주는 처우개선비 165000원이 더해져 실수령액은 200만 원 정도이다.)

내가 3년 동안 받은 6번의 명절 떡값보다 1,624원이 많은 금액이기도 했다.

"진짜 뗐네."


최저임금 수준인 조리사의 급여에 손을 댄다는 것은 치사하고 비겁한 일이다.

원장이 그런 식이 없다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내 입에 재갈을 물릴 의도였을 것이다.

조리사답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다.

어디에 꽂아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 느낌이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나는 원장에게 토로했던 원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건망증이 심해 자꾸 잊어버리는 걸까? 아니면 일에 대한 맵이 없는 건가? 물론 둘 다 해당된다.

워낙 말재주가 뛰어나고, 원장말고는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무능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하지만 무능보다 더 큰 이유는 그녀의 의식이다.

시급 만 원짜리 조리사의 불편은 원운영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매번 같은 얘기를 세네 번씩 하고, 전달받지 못해 헛짓을 하고, 기다리고, 또 얘기하고 그래도 말이다.

그래도 어린이집은 잘 돌아간다.



"조리사님 다음 주에 저랑 차 한잔해요."

월급날 아침 원장은 말을 하고는 한 달이 지나도록 그 일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먼저 꺼낼 얘긴 없었다.

맞다. 원장도 그럴 것이다.

조리사의 불편한 마음은 어린이집 운영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금요일에 발주를 하려고 다음 주 식단을 보니 포도와 론이 있었다. 가격대가 좀 있는 과일은 풀무원보다 조금 저렴한 쿠팡에서 주문을 하곤 했다. 

원감에게 부탁을 하고,  잊어버릴까 봐 그녀의 자리 앞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써 놓았다.

 -수요일 점심 포도, 목요일 오전 멜론-

내가 미리 주문을 해놓으라고 했더니 전날 쿠팡에 하면 로켓배송으로 온다며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의심쩍긴 했지만 조리사한테 그런 말까지 들었으니 정신을 차렸겠지 싶었다.


그런데 수요일 아침 출근을 해보니 포도는 없었다.

"샘, 쿠팡에서 뭐 온 거 없어요?"

오전당직인 주임샘한테 물었다.

"없는데요... 왜요? 뭐가 와야 돼요?"

"네에, 점심에 포도가 나가야 되는데 원감샘이 주문을 안 했나 보네. 어쩌지..."

"원감샘한테 전화해 보세요."

"아니에요, 원감샘은 집에 있을 텐데 지금 어떻게 하겠어요..."

역시 변한 건 없었다.


10시쯤 출근하는 도우미샘한테 복도에서 카드를 주며 부탁했다.

조금 있으니 도우미샘이 포도 3킬로를 샀다고 확인전화가 왔다. 

그때였다. 주임샘이 주방문을 열더니 내게 다급히 말했다.

"포도, 포도 11시까지 온데요. 마트에서 배달 온데요."

"네에?"

"원감샘이 그러셨어요."

"이미 샀는데요."

"혹시 샘이 원감샘한테 전화하셨나요?"

"아 아니요."

거짓말이었다.


나는 원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한 번도 채 울리기 전에 받은 그녀는 '느긋하게'라는 지문을 의식하듯 내게 말했다.

"조리사님, 포도.... 내가 어제 주문해 놨어요... 쿠팡에 들어가 봤더니 괜찮은 게 없고.... 가격도 비싸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어제 마트에 가서 주문했지요."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도우미샘이 이미 사서 오고 있어요."

"이미 샀다고요?"

"네"

"알겠어요."


복도에서 내가 하는 기를 들은 주임샘원감이 곤란한 상황에 놓일까 봐 귀띔해  모양이었다. 원감은 근처 마트에 전화를 걸어 급히 배달주문을 한 듯했다.

이렇게 원감의 구멍을 메워주는 주임샘은 원감의 프락치이다.

전부터 원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사소한 일들을 전해 왔었다. 둘은 개원멤버인데 이전부터 알고 있는 사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주임교사가 원감부재 시 원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은 무이다. 그럼에도 내가 프락치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보고를 몰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안 했다고 한다는데 있다.

특별한 능력 없이 원장의 총애를 받으며 재계약을 보장받은 것도, 원감의 업무폭탄에서 제외되는 것도 별개의 일이 아닐 것이다.

 



"조리사님, 저한테 금요일에 얘기를 했어도 전날 한 번 더 체크해 주셨었야죠."

교사실에서 오후간식인 떡볶이를 오물거리며 원감은 나만 알 수 있는 자신의 거짓말을 실토했다.

"원감샘, 그건 못해요. 거기 화이트보드에까지 적어 드렸잖아요. 까먹지 않을 방법은 자기가 찾아야죠."

내 말에 구를 못하다가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조리사님과 제가 그냥 얘기가 잘 되면 되는 거잖아요."

나는 그녀가 자신의 거짓말을 실토한 것에 만족하며 선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그렇져... 그럼 앞으로 조금 비싸도 그냥 풀무원에서 발주합시다. 되는 것만 내가 전날 나가서 사다 둘게요."

"그러셔요."

"얼마 아끼겠다고 우리가 이렇게까지  필요가 뭐 있겠어요."

"맞아요."

그녀와 내가 또다시 우리가 된 건 감봉이라는 동질감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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