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흑막에게서 나를 다시 가져온 녹색 옷의 사람은 어딘가로 이동했다. 이동한 곳에는 피곤한 듯 보이는 변태 같은 안경 낀 남자가 초조한 듯 서 있었고 그 남자에게 녹색 옷의 사람은 섬뜩할 만큼 날카로운 가위를 전달해 주었다. 가위를 받아 드는 그 남자의 표정은 사이코패스처럼 기쁜 듯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남자는 흥분한 듯 손을 떨며 그 가위를 내 배를 향해 천천히 내밀었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나의 삶은 여기까지인가?' 짧디 짧은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죽어야 하는 상황이 억울했다. '다시 한번만 기회를 준다면 실패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에 슬픔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응애, 응애"
억겁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가고 '싹둑'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실눈으로 내 배를 쳐다봤다. 그 남자가 자른 것은 내 배가 아니라 내 배에 연결된 줄이었다. 난 그때까지 내 배에 줄이 연결된지도 모르고 있었다. '탈출은 무조건 실패했겠구나. 이렇게 2중 3중으로 탈출에 대비해 놓았을 줄이야.' 이 흑막들의 철두철미함에 진저리 쳐졌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긴장이 풀려 늘어지고 말았다.
그 남자는 내가 축 쳐진 모습을 보며 나를 농락한 것이 맘에 들었는지 아주 기뻐하며 나의 지친 모습을 휴대폰에 담기 시작했다. '찐 흑막은 이 남자였구나.' 이 남자는 향후 나를 가장 많이 울리고 괴롭게 하고 그 괴로움에서 즐거움을 얻는 악마같이 사악한 사람이었다.
녹색 옷은 울며 지친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넓은 천으로 꽁꽁 싸 메어 포박했다. 답답할 만큼 꽉 쪼여진 나는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쳐봤지만 얼마나 쌔게 싸매었는지 꼼짝달싹도 못한 채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내가 옮겨진 곳은 넓고 하얀 방이었다. 눈부신 불빛이 천장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이곳도 탈출을 방지하고자 높은 침대에 투명한 벽들이 칸칸이 쳐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엔 나와 상황이 비슷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나와 같이 하얀 천으로 꽁꽁 싸 메여 있었으며 대다수는 지친 듯 잠에 빠져 있었다. '나 혼자 감금된 것이 아니라니 이 조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거대하구나'라고 생각하며 앞날이 더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이 거대한 조직은 투명한 벽, 하얀 천과 같은 물리적 구속에도 부족함을 느꼈는지 그곳에 감시자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으며 다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다른 사람으로 교대하여 그들의 눈을 피해 탈출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감시자들은 아주 거대해 나의 10배는 넘어 보였으며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번쩍번쩍 들만큼 힘도 아주 세었다. '이 감시자들에게는 반항하지 말아야지'
그 방에는 하나의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정한 시각이 되면 커튼이 올라가고 그 커튼 뒤에 숨겨져 있던 유리벽이 나타났다. 그 유리벽 너머에는 소름 돋게도 남흑막이 가장 많이 나타나 나를 주시했으며, 간혹 여흑막, 남흑막과 비슷하지만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남녀가 같이 오기도 했다. 그들이 오면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감시자에게 들려져 그들 앞으로 강제로 끌려가 동물원의 동물처럼 전시되었다.
그들은 나를 자세히 보기 위하여 유리벽에 닿을 듯이 얼굴을 가까이 대며 기뻐하기도 하고 감격스러워하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나를 향해 "귀 없다. 귀 없다." 그렇게 소리쳤다. '내가 귀가 없다고.'라는 깜짝 놀라 귀를 만져보려 손을 들었지만 포박되어 있는 나는 손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귀가 없다는 말에 좌절하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었다. 하지만 이것이 나를 길들이기 위한 사악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포박에서 풀려났을 때 나는 재빨리 귀를 확인했었고 허무하게도 내 귀는 버젓이 있었다. '뭐야. 귀가 있잖아." 나는 흑막들에게 속았다는 생각에 치가 떨렸다. 그 후에도 흑막들은 나의 자존감을 떨어트리기 위하여 '귀 없게 생겼다.'라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의 귀가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비웃듯이 빵긋 웃어줄 뿐이었다.
'내가 예전에 내가 아니야. 더 이상 속지 않는다고. 바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