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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Feb 27. 2023

미완의 다이내믹스

보리스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

“어째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글자를 쓰고, 글자가 모여서 단어가 되고, 단어가 모여서 법이 되는 거죠? 그런 법률을 모으면 도서관도 만들 수 있어요. 살지 말라, 사랑하지 말라, 생각하지 말라. 매일매일 뭔가 금지돼 있죠…… 우습고도 바보 같잖아요…… 어째서 내가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는 거죠? 말해봐요, 어째서죠?”

 

작품의 화자 조지는 테러가 없다면, 투쟁이 없다면, 자신의 인생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한다. 조지에게 테러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죄의식에 괴로워하며 교수형을 기다리는 바냐(이반)의 삶도, 전부 폭탄을 먹여줘야 한다며 총독 암살에 실패한 후 도망치면서까지 총격전을 포기하지 않았던 표도르의 삶도, 살인자이자 처형받을 죄인의 인생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차이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있다. 조지는 이를 비웃는다. (조지가 옆에서 “비웃지 않습니다.”라고 딱딱하게 읊조리는 게 들린다.)

 

도스토옙스키는 고통에 무감하기에 신에 의존하지도 않고, 사후 낙원을 기대하지 않는 무서운 인간을 자신의 소설에서 ‘스메르댜코프’로 설정한다. 조지 역시 복수할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복수심에 집중하며,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투쟁을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그는 그가 짝사랑하는 기혼 여성인 옐레나에게서 자신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고, 투기로 인해 옐레나의 남편을 살해한 후에는 더이상 만나지 못하면서 비탄에 빠진다. 오늘 사랑스러웠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지겨워질지라도 오늘 그녀를 사랑하고 내일은 상관없다면서도 남편과 자신 중 하나만을 택하라고 강요하는 그는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찰나의 사랑을 갈구하려고 하지만 실제로 사랑하는 행위 자체를 사랑하는 인물 앞에서는 오히려 한없이 나약해진다는 점에서 완전한 악인이 되지 못한다.

 

다시, ‘차이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있을 뿐’이며, 법은 글자가 모여 생성된 단어들의 어문 규범하에서의 배열에 지나지 않는다. 정당하지 않은 사회적 상황 속에서의 법과 도덕의 합일 상태는 곧 강요되고 기만적인 윤리성이며, 국가가 추구하는 보편적 목적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이익이 무시된다면 국가 지배력의 타당성은 용납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인물들은 각자의 신념과 방식대로 혁명에 참여하고, 국가에 저항하며, 희생자가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설정한 또다른 인물인 ‘라스콜니코프’ 역시 자신의 윤리적 가치관을 토대로 살해를 감행한다. 라스콜니코프가 제도가 용인하는 틀 속에서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인물(알료나)을 죽이는 행위 역시 사회적 규범을 넘어설 개인적 권리를 긍정하는 일상성으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과성의 불가피성에 빠져 순수이성은 그 자체로 자유가 되지 못했다. 자유는 이성에 기초한 행위이자 법칙에 대해 순응하는 상태이므로, 결국 자유는 법칙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법칙의 개념들은 억압적인 바, 자유에 의한 인과성은 자유에 충동에 대한 제어와 복종 및 체념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결국 자유를 위한 도덕적 법칙과 도덕적 억압은 동일해지며, 이는 얼마든지 해방된 의식에 의한 규범이 인간의 자율성을 속박하고 노예 상태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일상을 구속하는 규범성으로부터 탈피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자유의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탈피가 진정한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가? 충동이 폭력적인 형태로 분출할 필요가 없는, 원한과 증오가 없는 세계로의 전이가 가능한가? 가치 판단도 결국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 이상적인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기에, 구조적 폭력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달라지는 것에 그치고 만다. 이것이 라스콜니코프의 한계이다. 그러나 조지는 끝까지 자신의 행위에 가치 판단을 하지는 않았으며 테러에 가담한 이유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언어의 장난인 법과 허울뿐인 윤리 의식에 대항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사랑을 죽인 후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테러를 원하지 않으며 모두 헛수고라고 말하면서 마지막까지 총잡이로 살기를, 혹은 죽기를 택한다. 인생의 의미는 미완으로 남지만 결정되지 않았기에 끊임없는 부정과 변혁의 가능성에 놓여 있다.

 

재판관은 누구나 참회자가 되기 마련이다. 재판도, 참회도 하지 않지만 끊임없이 묻고 기록하는 그는 역동적이다.



이 글 어딘가..

백종현(2017). 『칸트와 헤겔의 철학』

한상연(2022). 『순간의 존재』

보리스 사빈코프(2022). 『창백한 말』

알베르 카뮈(1989). 『전락』

테오도르 아도르노(1999). 『부정변증법』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2012). 『죄와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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