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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May 21. 2023

정제된 말을 통과할 수 없는 틈새로 읽는 것

신형철, 인생의 역사

‘시론’이 아닌 ‘시화’. 문학적 이론으로 점철되지 않고, 쉬운 단어와 은유가 적재적소에 잘 쓰인, 화려한 웅장함보다는 소박한 중후함이 어울리는 시 이야기. 흔히 떠올리는 비평보다는 감상문에 가까운 이 책에서 그는 문학이라는 한정된 범위가 아닌 ‘인생’의 범위에서 시를 독해하는 행위를 말하고, 시를 빌려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펼친다.


문학 비평이라는 장르적 선입견과 더불어 제목에 쓰인 ‘인생’이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 앞에서 예비 독자들이 느낄 부담을 고려했는지, 저자는 서문의 시작을 인생의 사전적 정의를 제시하면서 연다. 인생이란 사전적 정의로도 보잘 것 없음을 뜻한다며 머뭇거리던 손을 움직이게 한다. 물론 평소에도 삶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의지와 관계없이 수동형의 ‘살아짐’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럽고 생경하게까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과도한 배려로 느껴질 것이다. 나 역시 역설적이게도 인생이라는 단어에 그다지 압도되지 않으니까. 미물들을 둘러싼 세계의 흉포함은 매순간에 녹아 들어있고, 사람들은 짜지 않은 젖은 솜이 되어 피로의 발자국을 철벅철벅 남길 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고, 피와 땀의 이중성과 자기복제성은 어린 시절부터 표현할 어휘가 부족할 뿐 이미 알아가기 시작한다. 인생은 가볍다. 우리가 인생으로 우리를 무겁게 할 뿐이다.


각자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있다. 투병 생활이 길어지면 병의 기생을 공생의 관계로 전환하며 인내를 넘어선 관용의 태도를 취하거나, 혹은 정복되어 시한부 숙주가 되기도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자멸적이고 공멸적인 사랑, 불공정한 계약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랑 역시 견뎌야 하는 무언가이다. 버팀목을 일구는 경험량은 안타깝게도 선형적 시간이라는 노력으로는 이길 수 없는 재능 아닌 재능이 주는 기회의 총량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에 공감에는 한계가 있다. 이해에는 인지적 공감도 필수적인지라, 타인의 이야기를 나의 차원에서 다시 바라보고 이를 활용하여 태도에 변화를 꾀하는 데에는 자연스레 흘러간 시간이 만들어준 내공의 힘도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가 아빠로서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바치는 이 책이,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하는Amo:Volo ut sis’ 그의 절대적인 구애의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너무도 벅차다. 갸륵한 그의 마음이 오롯이 내 것이 되기에는, 나의 부족한 경험이 오해와 오독을 낳고, 그나마도 짧은 맵다 못해 씁쓸한 기억들이 무지근하게 내 독해력의 창자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많은 죽음과 슬픔 속에서도 사랑을 건져내고 노래하는 게 삶이라면, 나는 살아진 적도 없고 그저 사라지고만 있나보다. 풍화되는데 동시에 짐이 되는 것은 흩어진 시간들이 회한과 뭉쳐 되돌아오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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