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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여우 Jun 04. 2023

부서지는 인생 곡선

버지니아 울프, 파도

나는 성장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성인이 된 인물이 유년의 시점으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를 악몽화하거나 낭만화하는 태도가 싫다. 지나간 현실을 귀여운 동화처럼 묘사하고 해석하는 서술들을 읽다 보면 굳이 보고 싶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흉을 강제로 정당화하며 이해해주어야만 하는 형벌을 받은 기분이 든다. 공감 능력이 나쁘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 게으르게 끄덕거리지만 늘 느끼는 인간의 불완전함을(나 또한 그렇듯이) 책에서까지 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성장’이라는 단어의 거부감이 이렇게 반항적인 생각을 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추월, 진전, 성장. 길어지고 넓어지고 커지라는 주문에 깊이는 없어 보인다. 환상적인 단어가 이면의 상처를 가려 버린다. 과거의 고통과 갈등이 삶을 끊임없이 옭아매는데, 왜 더 나빠지는 경우보다 나아지는 경우가 많은지, 왜 빛을 휘둘러 어둠을 빼앗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런데 왜 성장 소설로 볼 수도 있는 <<파도>>는 이렇게 홀린 듯이 읽었을까, 독백조의 장광설이 좋았고, 좁은 자간과 페이지에 꽉 찬 텍스트에 눈이 감기는 것도 좋았다. 결국 뜨고 지는 해와 함께 흘러가는 인물들의 삶과 죽음인데.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강조하지 않은 서술이 좋았을까, 혹은 다양한 타자성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들의 교집합이 나의 부분집합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랬을까. 결점을 잊기 위해 신화 속의 인물이 되었다가, 자연과 일체가 되었다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했다가… 정체성을 빼앗기고, 부여받고, 다시 회수 당하며 자신이 과연 무엇인지, 로우다처럼 나는 아무도 아닌지, 루이스처럼 한 때 찬란했던 어떤 것의 타다 남은 재인지, 혹은 버나드처럼 한 인간이 아닌 많은 사람의 것이라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지, 고민하는 과정에는 분명히 깊이가 있다. 땅굴을 파고 지하 인간이 되어 마조히스트가 되었다가도 수면제의 몽롱함에서 벗어나 어깨에 날개를 달고 다시 날아 오른다. 솟아 올랐다가도 중력에 의해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며 부서지는 파도처럼, 추락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승한다. 망가짐을 불사하며 수직으로 허우적거리면서 죽음에 몸을 던진다. 그 사이에는 셀 수 없는 변곡점이 있고, 이해될 수 없는 불연속점이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불가승수한 페르소나들을 소환한다.



하물며 권태 속에서도 변화는 있다. 몇 년 내내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 갑자기 툭 떨어지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게을러 보이는 단단한 고체도 침묵 속에서 바쁜 분자운동을 하고 있다. 권태감은 뭐랄까, 당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점근선을 기어 가면서 비어있는 좌표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랄까, 나는 아무도 아닌 동시에 여러 사람이라 내가 타자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언젠가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지구에 있어서라도 완전한 멈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뒤틀린 인간들의 총체이면서 아무 것도 아닌 나를 기꺼이 품어내며 늙어간다.



어둠은 어둠은 채로, 빛은 빛인 채로 두고 리스펙토르의 말처럼 죽음으로부터 하루하루를 빼앗으며 미래를 현재로 남용하는 일. 과거를 몽롱하게 미화하기보다는 상흔을 똑바로 직시한 상태에서 이후를 훔치는 일, 포스트(post)는 과거가 그대로 미래로 배달되는 일, 해석의 자유로 언젠가 모시게 될지도 모르는 이전의 나를 구성하던 인물들을 부정하며 모독하는 것은 범죄이다. 가져올 이후의 시간이 짧아지면서 창조적인 힘은 약해지고 어구는 관습화되어 건조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열의 갈라진 틈새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변화라면, 다시 축축해지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일 테다. 도함수는 지금도 바뀌고 있다.



그러고는 내 안에서도 파도가 일어선다. 부풀어오르고 등을 구부린다. 나는 다시 한 번 새로운 욕망을, 기수가 처음에 박차를 가하고는 뒤로 잡아끄는 자존심이 강한 말같이 내 밑에서 용솟음치는 어떤 것을 느낀다 지금 내가 타고 있는 너, 우리가 이 보도를 발길질하며 서 있을 때 어떤 적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느끼는가?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이 적이다. 내가 창을 공격태세로 꼬나잡고 젊은 사람처럼, 인도에서 말을 타고 달렸을 때의 퍼서벌처럼 나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죽음에 맞서서 말을 타고 돌진한다. 말에 박차를 가한다.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너를 향해 내 몸을 던지노라, 오오 죽음이여!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 (311-312. 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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