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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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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Dec 09. 2020

사랑할 수 있는 '무해한' 남주를 찾아서

MBC every1 드라마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

억지로 잡아끌기, 벽에 밀치기, 무턱대고 찾아가기, 동의 없이 관계 공표하기, 강제 기습 키스하기.


국제앰네스티와 아이즈가 2016년에 기획한 #더이상_설레지_않습니다 캠페인에서 정리한 한국 드라마 속 로맨스의 폭력적 클리셰 중 일부이다. 강압적이고 위협적인 남자들이 여자 주인공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슬픈 사연이 있었다는 이유로 쉽게 면죄부를 받고 매력적인 인물로 포장되었다.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를 응원하는 시청자들은 존중되어야 마땅할 여주인공이 왜 안하무인에 폭력적이고 자신을 통제하려 드는 남자들을 한없이 이해해주며 밑지듯 연애해야 하는지에 대해 한탄했다. 현실 세계에서도 여성 연예인의 팬들은 종종 품격이 떨어지는(대체로 젠더 감수성이 부족한) 남성이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교제하거나 결혼하는 것을 보며 씁쓸해한다. ‘대한민국 3대 마요 – 참치마요, 치킨마요, 언니 그 남자 만나지 마요’는 그런 마음으로 한 트위터 유저가 작성한 글에서 시작된 밈이었다.


MBCevery1의 새 드라마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에서 ‘언니를 말리고 싶은’ 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 냉장고 ‘장고’다. ‘장고’는 여자 주인공 서지성(송하윤)이 개발한 인공지능 냉장고로, 원래 기능은 음성을 인식하여 사용자의 식생활 데이터를 입력받아 다음 날 먹을 메뉴를 추천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연한 오류로 ‘장고’에 ‘조상신’ 프로그램이 가동되면서 명령이 지성의 음성일 경우에 사용자의 신상 정보 빅데이터를 요약, 정리하여 냉장고 모니터 화면에 보여주기 시작한다. 지성은 영수증, 카톡 대화 내용, 블랙박스 영상 등의 데이터로 낱낱이 드러나는, 알고 보니 ‘만나선 안 될 남자’였던 사람들의 비밀을 알게 된다.

'장고'의 데이터를 보고 놀라는 주인공 지성




인간 감별 프로그램 ‘조상신’으로 감별되는 남자들

연애 관계에서 두 사람이 헤어질 때는 성별에 상관없이 다양한 배경과 이유가 있겠지만, ‘조상신’은 자신의 개발자인 지성을 돕도록 코딩되어 있는 것처럼 유독 지성과 지성의 친구들 주위 남자들의 실체를 폭로한다. 아직 4화 밖에 진행되지 않았지만 ‘조상신’이 드러낼 인간 군상들을 모은다면 한국 남성과 연애하기 싫게 만드는 모든 경우의 수가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조상신’의 감별로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남자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예슬(지성의 친구)의 남친과 지성의 몰카 사진을 지인 단톡방에 올리고 얼평, 몸평을 하고 있던 지성의 예비 신랑 방정한이다. 온갖 대학교의 단톡방 성희롱 사건부터 ‘웹하드 카르텔’의 불법 촬영물 유통, 그리고 n번방 성착취물 사건까지 최근의 여성혐오 범죄들이 단박에 떠오르는 예비 신랑의 만행에 지성은 충격에 빠지고 바로 결혼을 취소한다.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에서는 지금껏 로맨틱 코미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AI라는 변수가 이용되지만 지성의 성공적인 로맨스를 위한 답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편이다. ‘조상신’의 빅데이터 분석에도 아무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남자. 그래서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그 어떤 드라마의 남주보다도 ‘무해한’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남자 주인공 국희



가장 ‘무해’하지만 매력도 ‘無’

배우 박보검과 정해인으로 대표되는 무해한 남자 캐릭터가 TV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게 된 것은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재점화된 페미니즘과 무관하지 않다. 이전에는 ‘나쁜 남자’로 매력적으로 그려졌지만 여성을 가부장적 제도 안에 가두고 통제하려 드는 폭력적인 남성 캐릭터에 여성 시청자들은 더 이상 호응하지 않는다. <밥 잘 사 주는 누나>, <남자 친구>, <동백꽃 필 무렵>,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등 인기 있던 드라마에서 로맨스의 상대가 되는 남자 캐릭터는 대체로 여성 캐릭터보다 사회적, 경제적 위치가 낮고 여자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나가지 않는 부드러운 모습을 보였다.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의 남자 주인공 정국희는 여성 시청자들이 걱정 없이 좋아할 수 있도록 ‘이 사람은 정말 안전하다’고 증명하는 온갖 설정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소방서 생활안전 구조대 소방관이면서 예의 바르고, LP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리스너이며, 동네에서 유명한 캣맘이고 길고양이 구조를 위해 한 달을 넘게 돌아다닌다. 당연히 지성에게 큰소리를 치거나 동의 없는 스킨십을 하는 경우도 없다. 하지만 어떻게든 무해하게 보이려고 만들어진 정국희 캐릭터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작위적이고 단조로운 느낌이 든다. 일단 전 약혼자와 대조되어야 하니까 범죄는 저지를 일이 없을 소방관을 직업으로 하고, 요새 여자들이 동물 좋아하는 남자도 좋아하니까 ‘길고양이 신경 쓰는’ 설정도 넣자, 하고 끝내 버린 느낌이다. 정국희가 무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청자들이 끌리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기 위해선 소방관이라는 직업으로 거의 설명되는 친절함과 이타심 외에도 그만의 성격과 개성이 다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누가 봐도 ‘쓰레기’인 전 약혼자와의 비교나 어색하게 설정된 우연한 위기에서 소방관이라는 직위로 여주 지성을 돕는 사건들이 아니어도 국희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사건과 이야기가 필요하다. 지금 시청자에게 제시된 국희의 모습은 너무나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다.



AI가 참견할 수 없는 '스몰데이터' 남주

정국희를 더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부분은 그가 SNS도 핸드폰도 사용하지 않는 아날로그 인간이라는 설정이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가장 빠른 길을 찾을 때에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 현금을 애용하며 워크맨 수준으로 오래된 음악 플레이어 기기를 들고 다닌다. 따라서 데이터가 쌓이지 않는 국희에 대해 ‘조상신’은 분석할 수 없다. 이 사람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AI 참견 로맨스’라는 부제와 다르게 메인 로맨스 서사에서 AI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사라지게 되고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의 로맨스는 이전의 뻔한 로코 드라마 공식-낭만적 사랑을 위해 주인공들은 우연한 만남을 반복하며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을 그대로 따라간다. 여주인공은 밝고 당차지만 번번이 위기에 빠지고 남주인공에게 구해진다는 클리셰도 그대로 가져간다. 전 약혼자가 던진 충격으로 만취 상태인 지성이 순찰 중이던 국희와 만나게 된다거나, 우연히 핸드폰이 서로 바뀌고 길고양이를 찾다 갑자기 마주치고, 여주인공은 어색한 내기를 제안하고, 동네에서 또다시 마주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끌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다시 뻔한 로코가 되지 않기 위해선

여주인공이 마음 놓고 연애할 수 있는 무해한 남자 캐릭터는 만들어 놓았지만 국희 덕분에 구원받으며 행복해지는 지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금껏 많은 드라마가 그려온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로맨스를 똑같이 반복하게 된다. 지성과 국희의 별 다를 바 없는 로맨스를 계속 보여주는 것보다는, 프로그램 소개에서 밝혔듯 인공지능을 통해 확실한 오답을 피한다면 삶과 연애가 완벽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방향이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가 흥미롭게 전개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기획의도가 말한 ‘확실한 오답’이 어쩌면 남주 국희가 아니라 전 약혼자 방정한에 더 집중하고 있는 단어일 수 있고, 누가 봐도 범죄에 준하는 행동을 한 ‘오답’ 정한을 피한 지성이 AI를 통해 완벽한 연애를 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게 목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지성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AI가 소용이 없다. AI라는 새로운 소재를 가져왔음에도 그 소재가 완벽히 무의미해지는 아날로그 남주인공을 설정하게 된 이유가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남주인공의 데이터를 모두 알거나/모르더라도 지성이 행복하게 연애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여주인공의 갈등과 고민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끈다면 더욱 흥미로운 드라마가 될 것 같다.




*참고 기사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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