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 일까?
O X로 답한다면 '그렇다'이지만 주관식 답변은 복잡해진다.
70년대 한국 교육과 사회의식은 아직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기울어져 있었기에 남성에게 편중된 기회뿐 아니라 호주제는 여성으로의 정체성을 존중해 주지 않았다.
나는 아들 없는 집에 맏딸로 태어나서 여자로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페미니스트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회가 쌓은 벽에 부딪칠 때, 부부관계에서 여자와 엄마이기 때문에 참아야 할 때, 때로는 스스로 위축될 때 내 속에서는 "이렇게는 못 살아!"라는 울림이 올라오곤 했다.
그러나 이제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나는 성을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정리하고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가 인간으로서의 여성 권리를 지켜주지 못했고
여성들은 "이렇게는 못 살아!"라고 인간의 기본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여성 권리가 사상으로 시작되었고 1900년대 초에 들어서 구체적으로 참정권을 요구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전쟁에 나간 남자를 대신해서 여자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후 전후 세대 여성들은 가부장제를 철폐하고 모든 영역에서 남녀평등을 제도화하는 여성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제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주의에서 탈피해서 성 정체성 평등을 주장하는 데까지 갔다.
이런 페미니즘의 흐름 속에서 나는 어디쯤 있는 걸까?
싱글맘으로 이제 미국에서 성장해서 성인이 된 두 딸과 논쟁할 때가 있다.
두 딸은 여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이 흔들리지는 않지만 남성과 같은 파워를 원하고 다른 사람의 성 정체성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사실 혼란스럽다.
부당한 인권침해를 막기 위해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던 페미니즘 운동의 시작은 여자이기 전에 인간이고 싶었던 여성들의 당연한 목소리 같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삶이 걸려 있어서 남편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지배하려고 한다면 아내는 "이렇게는 못 살아" 하게 될 것이고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딸이 상속권이 없어서 빈털터리가 된다면 상속법을 개정할 정치인을 뽑으려 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성적 학대를 당해도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면 목숨을 걸고 여성인권운동에 뛰어 들것이다. 그런데 이 당연했던 목소리가 지금은 공격적이고 냉소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딸들의 논리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은 동의가 되지 않는다.
성 정체성의 선택이 인권의 차원을 넘어선 개인 권리가 되어서 일까?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느라 사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아닐까?
비단 성 정체성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취향과 선택을 인정해 주려는 의도가 나의 선택을 지키고 싶어서라면 그것은 '외면'이지 '존중'이 아니다. 괜히 힘들어지느니 엮이지 말자는 의도로 보인다.
나도 딸들과 우아하게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생각은 나누지만 마음은 나누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어느 때 보다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고립되고 외로워한다.
그러면 서로 엮여서 친밀해지면서도 개인을 존중해 주는 방법이 있을까?
마치 우리 몸에 서로 다른 두 개의 다른 형질이 섞이지는 않고 각각 제자리를 찾아 엮여 있을 때 팽팽하게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상호협력과 조화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면 어떨까 한다.
칼 융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인간 정신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다고 한다.
남자에게는 남성의 성향이 강하고 여성의 성향이 약한 반면 여자의 경우는 여성의 성향이 강하고 남성의 성향이 약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성향은 섞이지 않고 공존하면서 상호작용 한다.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음양의 조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남성과 여성이 한 사람의 내면에서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면 그 인격은 아름답고 그 사람은 행복하다. 남성이 발휘되어야 할 때 여성이 용기를 주고 여성이 필요할 때 남성이 지지해 준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 서로 협력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신체적으로 남자와 여자로 구분 지어져 있는 상태로 사람들과 친밀해지기 쉽다.
성 정체성의 혼란은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남성과 여성이 섞여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혼돈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남자는 그의 속에 있는 남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그의 여성이 조력하고, 여자는 그녀 속에 있는 여성이 주된 역할을 하고 그녀의 남성이 용기와 확신을 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페미니스트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조화로운 인격으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하고 싶다.
나는 아무래도 이 시대의 페미니스트는 아닌가 보다.
"이렇게는 못 살아"로 시작했지만 "그렇게는 안 살아"로 끝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