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때문에 상한 사랑은 주지도, 받지도 않기로 했어.
이제는 건강한 사랑을 하고 싶구나"
비행기가 연착되고 있었다.
연우는 전광판 보기를 단념하고 출구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사람 구경을 하고 있었다. 연극을 볼 때도 객석에 앉아 배우의 시선을 따라 가며 감정을 공유해도 들키지 않을 안전한 거리가 항상 편했다. 연우는 안내 방송에서 나오는 몇가지 언어들을 들으면서 똑같은 백팩을 하나씩 메고 손을 잡고 걸어가는 젊은 커플 뒤로 비슷한 나이 또래의 부부가 반들거리는 바닥 위에 브레이크 댄서를 추듯이 사지를 흔들어 대면서 울고 있는 아이를 잡으려고 쩔쩔매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갑자기 낮을 간지르는 느낌과 함께 풀냄새가 났다.
" 오늘의 포토제닉상은 김 연우씨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승진은 연회색 리넨 자켓에 막 샤워한 것 같은 말쑥한 얼굴로 안개꽃에 쌓인 데이지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 언제 왔어?"
" 좀 전에. 너 멍 때리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그러니까 내가 배웅할 때는 일찍, 마중 나올때는 늦게 가라고 했잖아"
승진은 오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어제 헤어졌다 오늘 만난 사람처럼 변함없이 솔직하고 한결 같이 자기 확신에 차 있었다. 연우는 승진을 만나면 어떻게 어색하지 않는 인사말을 건낼까 고민했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 나 꽃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화분이면 몰라도... 응?" 승진이 뒷말을 대신하고 왼쪽 손에 들린 쇼핑백을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그럴줄 알고... 니가 좋아하는 호두과자야. 꽃집 옆에 제과점이 나란히 있어서 다행이었어. 안 그러면 꽃다발 이랑 화분을 양손에 들고 올 뻔 했잖아. 환영 꽃다발이면 몰라도 환영 화분은 좀 너무하지 않니? 하긴 인하도 사내새끼가 맨날 꽃이냐고 하겠지만... 니네 둘다 호두과자 좋아하니까 둘 중에 하나는 쓸모 있겠다 싶더라구."
연우는 이런 승진을 미워할 수 없었다. 승진을 생각 할 때마다 올라오는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다 삼키는데 승진이 혼잣말 처럼 내뱉는다.
"너랑 인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
연우는 고른 이를 드러내며 웃는 승진의 얼굴을 보면서 날선 콧날에 걸린 은색 안경테 너머로 쓸쓸함이 배여나는 그의 눈길을 피했다.
그랬다.
고등학교 시절 부터 셋은 늘 붙어 다니면서 연우는 자기 표현이 솔직한 승진 보다 인하를 더 잘 알고 있었다. 연우는 말하기 보다 듣는 쪽에 가까운 인하가 승진의 질문에 짧게 대답하는 말 속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곤 했었다. 연우는 인하의 모든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좋아하는 것을 살피며 몰래 찾아서 배웠다. 그렇게 책을 읽었고 음악을 들었고 인하의 신념을 믿었고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동의했다. 모방은 최고의 학습이 되어서인지 예리한 승진 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연우는 밀려오는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서 버릇처럼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바라보는 승진에게 물었다.
"와이프도 같이 오지 그랬어?"
"몸이 약해서... 어제 베이비 샤워하고 드러 누웠어. 하고 싶은건 다하거든"
승준의 눈에 생기가 도는 걸 보면서 연우는 처음으로 승진의 아내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걸을때 답답하더라도 꼭 손잡고 천천히 걷고 너 먹고 싶은건 밖에서 사먹고 들어가"
"그래... 니가 힘들었다는 거 알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하와 승진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고 연우는 고향에 남아 지방대학에 진학했다.
딱 한번, 승진의 성화에 못이겨서 서울에서 두사람을 만나 신촌, 대학로를 가본 이후로 연우는 방학때나 두사람을 고향에서 만났다. 인하는 연우가 더이상 생각과 관심을 따라 갈 수 없을 만큼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연우는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하루하루 살고 있었다.
그런데 승진은 달랐다. 한결같이 하고 싶은것은 끝이 없고 연우 눈에는 인하가 그런 승진에게서 대리 만족을 얻는 것 같아 보였다.
" 인하야, 우리 사이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내가 연애도 좀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배워야 하지 않겠냐? 연우가 소리내면서 웃는거 본지가 언젠지 모르겠다. 나라도 나서야지"
인하가 시위로 구속되고 강제 징집으로 군에 가는날 새벽 기차에서 머리를 내밀고 연우를 바라보던 인하의 젖은 눈과 마주쳤을 때 연우는 승진이 연신 닦아주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 오늘은 데이지 꽃이 나를 여기로 데리고 오더라"
카추사로 간 승진은 주말이면 연우에게로 왔다.
"내가 집에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전화 좀 하고 와"
" 니가 없으면 이 꽃이 나를 다른데로 데려가 주겠지"
다세대 주택이 들어선 좁은 골목길을 나와서 연우는 승진을 따라 이질적이지만 거절하고 싶지 않은 세상으로 여유있는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인하가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미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날, 연우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첫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 어! 연우야. 혼자 왔어?"
연우는 부엌에서 나오는 인하의 외숙모에게 어색하게 인사하고 문간에 있는 인하방으로 들어갔다.
" 안 가면 안돼? 너는 한번도 내게..."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어본 용기였다. 그런데 기차안에서 몇번이고 연습했던 말 대신 설움이 복받쳐 올라 왔다. 연우가 붙들고 있던 희망은 말이 없이 바라보는 인하의 눈에서 설핏 지나가는 그리움 밖에는 달리 없었다. 인하는 책상 의자를 끌어다 놓고 연우의 어깨를 두 손으로 눌러서 앉히고 자신은 아직 펴 있던 요를 말아서 맞은편에 앉았다. 인하는 깍지 낀 팔을 두 무릎위에 놓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자세로 얼마의 시간을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 연우야, 나는 니가 너로 살았으면 좋겠어"
연우는 귀에서 머리로 올라온 단어들이 응축 되어서 드라이아이스처럼 신경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인하 앞에 있는데 한 길가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방 안의 물체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인하가 택시를 잡고 고속버스표를 사는 동안 연우는 온 몸에 퍼진 서늘한 기운 때문인지 텅비고 맑은 광장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듯이 인하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인하는 안내원에게 버스표를 직접 보여주었다.
"연우야"
연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뒤를 돌아 보았다. '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마'
인하의 눈빛은 한결 같았다.
연우는 일주일을 앓았다.
삼일 동안은 잠만 잤고 승진이 온 걸 알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면접날짜를 지나쳤다.
승진이 노란 장미꽃 다발과 메모를 남기고 갔다.
'니가 가끔 생각나는 사람이 나 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죽도록 미워서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 나 였으면 좋겠다'
연우는 짐을 싸서 승진에게로 갔다.
연우는 승진에게 최선을 다했다. 승진의 고급 취향은 연우에게는 늘 맞지 않는 옷 같았지만 인하에게 그랬던 것 처럼 승진의 것이 자신의 것이 되어야 사랑하는 거라고 믿었다. 솔직한 요구, 받아들여졌을때 거침없이 쏟아 붓는 승진의 애정이 고마웠다. 연우는 아무 매력도 능력도 없는 자신에게 승진의 사랑은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입으면 너 한테 안 어울려. 블랙 드레스를 입을때는 눈화장 없이 빨간 색 루즈를 바르는거야"
거울을 보면 어울렸고 연우는 처음으로 자신이 생겼다.
" 왜 그렇게 천천히 걸어? 실연 당한 여자 같이..."
"니가 빨리 걷는거지. 따라가기 힘들어"
그랬다. 연우는 승진의 사랑을 따라가기에도 벅찼고 승진은 연우의 보폭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승진은 영민했고 그의 판단은 많은 경우 좋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연우는 경쾌하고 망설임 없는 승진의 의견에 딱히 맞설 이유가 없었다. 승진이 독일로 유학 가기로 결정했을 때도 연우는 그 일이 의논 했어야 하는 사안이라고 하는 말을 삼켰다. 함께 갈 형편이 아닌 줄 알면서도 승진이 함께 가자고 하기를 기다렸지만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 너 유학 준비 하는 동안 나 취직 자리 알아봐야겠어"
" 시간 보내기 힘들면 문화센타 등록해 줄게.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
"그런거 아니야. 너 유학가면 내 생활은 내가 해야지. 준비도 필요하고"
"너 나 못 믿는구나. 때가 되면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할까 봐 그러니? 그냥 가만히 있어"
"못 믿는다고?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연우의 속에서 혼자말로 들려왔다. 그것은 인하가 뱉어내었던 단어들이었다. '너는 너 자신으로 살아야 했어'
연우는 승진의 확신에 찬 눈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승진이 사다준 꽃다발을 말려서 열지어 걸어둔 벽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나 꽃 안 좋아해. 화분이면 몰라도...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척 하고 있잖아."
연우는 더 이상 승진에게 그런 척 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짐을 쌌다.
승진이 인하를 먼저 알아보고 달려갔다.
연우는 마음에서 떠난 적 없는 인하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에게 놀라며 그런 것도 무리가 아닐만큼 변한 인하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그을려서 건강해 보이는 피부, 탄탄해 보이는 몸은 그 늦가을 터미날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떨듯이 서 있던 인하가 아니었다. 연우는 꽃다발부터 내밀었다.
" 연우야, 잘 있었어? 고맙다"
"응, 건강해 보이네, 안경을 벗어서 못 알아볼 뻔 했어"
" 응, 라식 했어. 그래선가... 저기서 부터 니가 보였어"
인하는 모습 뿐 아니라 언어도 달라졌다고 생각하며 연우는 눈을 맞추었다. '아! 인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마음을 읽는 듯한 그 눈빛은 같았고 연우는 피하지 않았다.
" 우리 셋이 이렇게 모이니까 그간의 시간은 다 어디로 달아났는지 모르겠다" 승진은 인하의 가방을 잡아 끌며 유쾌하게 말했다.
" 연우 책이 엘에이에서도 인기더라. 어떻게 쓰게 된거야?"
" 그냥 학원에서 아이들을 관찰 하다보니까 재미있고 나한테 자극도 되고 해서 어른들을 위한 그림 동화 이야기를 틈틈히 쓰다보니 그렇게 됐어. 어릴때 내 모습도 있고..."
" 하하, 니가 그렇게 엉뚱한 꼴통 이었니?" 승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웃으면서 캐릭터 흉내를 내었다.
" 난 걔가 좋아. 점점 걔를 닮아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연우는 웃으면서 양쪽 팔로 두 사람에게 팔짱을 꼈다.
" 니네 두 사람 한테 정말 고마워."
그리고 연우는 혼자말을 이었다.
'나 아닌 나를 알게 해줘서, 그리고 나로 살아가도록 격려해줘서'
승진과 헤어진 후 연우는 인하를 의식하며 만들어진 것들이 실은 자신의 것들이었음을 알았다.
인하가 팔을 빼면서 연우의 손을 꼬옥 잡았다.
로비를 지나며 보니 바닥을 뒹굴던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빠 주위를 돌면서 깔깔 거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저 아이가 원하는게 뭔지 알고 해결해 준 걸까? 아니면 아이는 울어봐야 소용 없다는 걸 배웠을까? 더 원하는 걸 찾았는지도 몰라' 연우는 오늘 쓰고 그릴 주제가 떠올랐다.
세 사람이 심은 시간 위로 건강한 오월의 신록이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