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언제나 희망은 있다.

by 김 스텔라

사람마다 각각 "이것 만큼은..." 이라는 마지노선이 있고,

이 생존 경계선은 때로 출발선이 되기도 한다.


수아는 한기가 느껴져서 눈을 떴다.

집 앞에 주차한 차 안에서 깜빡 잠이 들었었다.

마켓 봉지를 식탁에 올려놓고 T.V. 를 끄고 김치볶음밥을 먹은 접시를 테이블 위에서 싱크대로 가져갔다.

"하이 우리 아들, 딸"

"하이, 엄마, 오늘 어땠어?" 아들이 샤워 수건을 두르고 화장실에서 나오며 물었다.

"응, 그럭저럭. 너는?" " 좋았어" 예의 같은 대답을 들으며 하루 일과의 긴장을 내려놓았다.

동시에 평소에는 먼저 노크하면 누워서 절 받기로 인사하던 딸이 왠일로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엄마, 오늘 괜찮았어?" 그리고 대답을 듣기 전에 "나, 주말에 스테파니 집에 생일 파티 갈 거야. 파자마 파티 한대. 그러니까 자고 올 거야" 딸의 통보에 가까운 말에 이완되었던 신경이 다시 촉수를 세웠다.

" 허락받지 않을 만큼 컸다고 생각하는 거야? 18살까지는 네가 싫어도 내 허락이 필요해"

"오 마이 갓."

언제부터인가 딸과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안 가겠다는 건지,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는 건지, 뜻을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딸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수아는 아직 주말까지는 시간이 있고 오늘은 더 이상 남은 에너지가 없다고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고, 마켓 본 것을 대충 정리하고, 내일 인터뷰할 내용을 리뷰하기 위해서 식탁에 앉았다.

갑자기 피로가 엄습해왔다.


수아는 인터뷰 하기로 한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카페의 아치형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눈이 부셨다.

높은 천정에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진 나무 벽면에 아래위 두 개의 넓고 긴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전의 햇살 때문인지 빛의 광장으로 들어선 것 같았다.

수아는 거리가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흰색 식탁보가 씌워진 테이블과 은색 의자들이 놓인 카페의 중앙에 진초록의 소파와 빨간색 벨벳 안락의자가 놓여 있는 자리에 눈길이 갔지만 무난한 것이 편했다.

이 인혜 할머니는 사람이 없는 오전의 카페가 아니더라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히스패닉 중년 여성의 팔에 손을 얹고 꼿꼿이 걸어 들어오는 진분홍색 정장 차림의 동양 할머니는 흰색 바탕에 그려진 진달래 꽃 같았다.

" 처음 뵙겠습니다. 이전에 전화드린 배수아라고 합니다" 할머니는 말없이 웃어 보이고 의지 했던 중년 여인의 팔에서 손을 떼어 수안에게로 옮겨 잡았다.

" 손이 참 작고 곱구려"

자리로 안내하자 할머니는 다가온 종업원에게 명랑한 인사를 하고 소파 자리로 가서 앉겠다고 했다.


수아가 근무하는 신문사에서 '한국인의 미국 이민사' 특별기획 준비로 계획된 인터뷰였다.

이인혜 할머니는 사진결혼으로 하와이로 건너온 이민 1세였다.


진초록 덤불 속에 묻힌 진달래꽃 할머니는 목소리로 짐작한 모습보다는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나는 이 카페가 좋아요. 에스프레소가 특별해요. 전쟁 후에 여기로 와서 줄곧 살았지"

할머니는 시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기억의 씨실과 날실을 엮고 있었다.

"할머니, 어떻게 미국으로 시집 올 생각을 하셨어요?"

"미국으로 시집가면 시집살이 안 해도 된다고 해서 왔지. 우리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수발들고 나 보다 어린 삼촌 키워 가면서 어른이 상 물리고 나면 남은 밥을 우리한테 먹이고 하루 종일 일만 했어. 교회에 쌀 갖다 줬다고 할머니한테 흠신 맞았지. 안 말리는 아버지가 미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설 수 없었을 게야. 우리 동무가 선교사한테 들었는데 미국에서는 여자들도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더래. 돈이 있으면 마을 밖 세상 구경도 할 수 있다고 하길래 우리 동무들이랑 중매쟁이를 찾아갔지. 나는 가난한 것도 지긋지긋했지만 여자라서 할 말도 못 하고 시어머니가 시키는 데로 살다가 늙어 죽기는 더 싫었어."

"근데 무섭지 않으셨어요?"

"무서우면 아무것도 못하고 죽어지내야지. 시키는 데로 시집가서 동네 못 벗어나고 사는 거보다 미국에 있는 모르는 사람한테 시집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왔어. 역마살이 든 건지 해질녘이 되면 언제 저 해가 넘어가는 쪽으로 가 볼 수 있을까... 하면서 밭 너머 산에 걸린 해를 바라보곤 했었지. 나는 시집가려는 게 아니라 딴 세상으로 가고 싶었던 게야"

"그래서 하와이에 도착하셨을 때 좋으셨어요?"

할머니는 감정을 읽을 수 없이 주름진 눈꺼풀에 쌓인 눈으로 물끄러미 수아를 바라보았다.

"사는 건 다 고생 이제." 할머니는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다른 대답을 했다."창고에 불이 났어.아~들 아부지가 온몸에 화상을 입었제. 두어달 병원에서 그 고생을 하고... 그래도 죽기전에 나를 알라보드만"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잡고 마른 입술에 에스프레소를 묻히고 말을 이어갔다. "아~들 아부지는 나보다 열 다섯살 위라 사진보다 훨씬 아저씨 같았어도 글도 아는 도시 출신이었지. 어린 신부가 결혼할 때 입으라고 신식 웨딩드레스도 준비해 놓았더구먼. 그 드레스 때문에 나이 많은 신랑이 좋아졌어. 말 안 통하는 나라에서 일본 사람 취급받으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우리 엄마가 일하는 것 만치 일도 했어. 그래도 나는 내 살림하는 거잖아"

그 순간 수아는 할머니의 얼굴에 당당함이 묻어나는것을 보았다.

"나는 기왕 미국에 왔으면 미국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와이는 섬이고 더 넓은 세상이 있다고 하니 이왕 고생하는 거 똑 같이 벌 수 있으면 내륙으로 가고 싶었지. 아~들 아부지한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큰 내륙으로 들어가자고 졸랐어. 아~들 아부지는 하와이에서 자리도 잡았고 친구들도 있으니 떠나고 싶지 않아해서 나는 기다렸어. 그러다 내륙 엘에이 근처 항구에 일자리가 있다는 정보가 있어서 신청서를 디밀었더니 며칠을 고민하다 가자고 하더라고. 한국 사람이 없는 곳에서 중국 사람들한테 치이면서 고생도 했어. 그래도 동병상련이 있었지."

수아는 인터뷰에 없는 질문을 했다.

"후회하진 않으셨어요?"

할머니는 생경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뭘?"

수아는 대답 대신 종업원이 방금 리필해준 커피잔을 잡으며 이 질문이 실은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수아는 막히는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집으로 내려오면서 차 안에서 녹음기를 틀었다.

모습과는 다른 할머니의 카랑한 목소리 속에 유난히도 많은 "그래도" 라는 소리가 거듭 들려왔다.

초롱한 눈에 서산의 노을빛을 담고 언덕 위에 서 있는 18살 소녀가 보였다.

가난과 시집살이를 견디기 싫어서 인생의 모험을 했던 소녀는 이 땅에서 힘들고 실패해도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았다. " 그래, 그걸로 충분해" 수아는 위에서 잘리지 않을 만큼의 팀웤을 지키고 기사를 쓰던 때와는 다른 의욕이 생겼다.

수아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쇼핑몰에 들러서 딸에게 줄 진분홍색 잠옷 한벌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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