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을 살고싶었던 여자들의 하루
*영화의 결말이 포함된 글입니다*
여자들의 하루가 시작됩니다.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는 여인들. 영화는 그녀들의 순간을 교차하며 펼쳐집니다.
이들에게는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바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이지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하는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있는 1951년의 로라 브라운,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는 2001년의 클라리사 본.
어쩌면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댈러웨이 부인들일지도 모릅니다.
버지니아는 작가로서의 자신을 지지해주는 남편과 함께
영국의 조용한 시골 마을 리치먼드에서 평온해 보이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녀들의 불평은 듣지만 살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자기만의 방에서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운이 좋은 여성이지요.
미국 LA에 살고 있는 로라의 가정은 더 완벽해 보입니다.
그림같은 집에서 자신의 생일이지만 아내를 위해 꽃을 사오는 다정한 남편과
귀여운 아들, 그리고 뱃속의 아기까지 남부러울 것 없는 주부입니다.
미국 뉴욕에서 출판 편집자로 일을 하는 클라리사의 하루는 활기차게 시작됩니다.
옛연인이자 오랜 친구인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 파티를 위해 준비할 것이 많거든요.
하지만 에이즈라는 병마와 싸우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 리처드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도, 파티도 달갑지않습니다. 그저 행복하지 않은 이 삶을 끝내고 싶어합니다.
클라리사를 만족시키는게 유일한 생존 목적인 리처드,
리처드를 위해 자신의 삶도 없이 희생하는 클라리사.
이 관계도 끝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클라리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편, 버지니아는 언니와 조카들을 초대했지만 머릿 속은 소설에 대한 이야기로,
주인공의 죽음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로라는 남편을 위해 아들과 함께 생일 케이크를 굽고 있어요.
표현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자는 노력합니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는 그녀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공허하고 숨막히는 긴장감마저 느껴집니다.
그 순간에 손님들이 방문합니다.
로라의 절친 키티는 자궁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합니다.
당당하고 잘 사는 것 같던 키티가 슬퍼하는 모습에 로라는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가 보는 앞에서 진한 입맞춤을 합니다.
벌떡 일어 선 키티는 냉랭하게 그 자리를 떠나고 로라는 이 관계를 망친 것 같아 혼란에 사로잡힙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버지니아의 언니와 조카들. 반가운 것도 잠시 런던을 그리워하는 버지니아에게
언니는 그녀의 병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때 아이들이 죽어가는 새를 발견해 나뭇잎 무덤을 만들어 주자고 해요.
가만히 누워 죽어가는 새의 눈을 바라보는 그녀.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했던 그녀가 새의 죽음에 평온함을 느꼈을까요?
파티 음식을 준비 하고 있는 클라리사의 집에 루이스가 찾아옵니다.
오랜 시간 리처드의 애인이었던 그를 보자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심란하고 불안한 마음이 터져 나옵니다.
몇 년이나 리처드를 간병하면서 잘 견뎌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버겁고 힘들었다고.
그 때 루이스는 고백합니다.
리처드를 떠나던 날 유럽을 횡단하는 열차 안에서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고 말이죠.
그녀들의 마음이 마구 흔들립니다.
로라는 어떤 결심을 한 듯 약통을 가방에 챙겨넣고 생일 케잌을 다시 구운 후 아이를 이웃 집에 맡긴 채
혼자 호텔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죽는 것도 가능하다"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에게, 현실의 로라에게 죽음은 가까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을 죽이려던 버지니아는 마음을 바꿔먹습니다.
사실 그녀들은 각자의 감옥 속에 갇혀 있습니다.
버지니아는 환청과 정신 착란으로 여러번의 자살 시도를 했고 그 때문에 의사들과 남편의 감시 아래
원하지도 않는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로라는 시대적 통념에 갇혀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남자들이 누려야 할 행복을 위한 전리품으로 존재하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행복했던 과거의 한 순간에 구속되어 현재를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을 함께 한 여자 친구 샐리도, 유일한 딸 줄리아도 클라리사에게는 뒷전이었습니다.
그 감옥에서 먼저 한 발 벗어난 것은 버지니아입니다.
남편 몰래 집 밖으로 달려가는 그녀. 런던행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에 있는 버지니아를 쫓아 온 남편은
제발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화를 냅니다.
하지만 버지니아가 절실하게 원하는 것은 교외의 질식할 듯한 마취제 속이 아닌 런던의 거친 삶입니다.
시골의 정적 속에 있는 것이 안정적일지는 몰라도 그것은 버지니아라는 한 인간의 개성을 사라지게 하는 삶이었던거죠.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버지니아.
현실을 직면하고 받아드리기로 한 남편에게 담담히 말합니다.
"삶을 회피하면 평화를 못 얻어요."
하지만 죽음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댈러웨이 부인 소설 속에서는 시인이 현실에서는 리처드가 죽음을 선택합니다.
삶을 회피하지 않은 또 한명의 여인 로라의 아들. 엄마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평생을 상처 속에서 살았던 아들이 바로 리처드였습니다.
"누가 꼭 죽어야만 하나?"
버지니아는 남편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 죽어야만 남은 이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죠."
아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온 로라.
자신을 이해해 줄 이가 없는 시대적 상황에 외톨이처럼 느껴져 자살충동을 느꼈던 로라는
둘째를 출산하고 캐나다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로라는 금세 후회했지요.
아이들을 버린 것이 큰 잘못인 것을 깨닫고 고통을 감내하며 살았지만.
용서를 받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죽음 속에서 삶을 선택 한 그녀이니까요.
로라의 이야기에 생각이 많아진 클라리사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 코트를 벗고 치렁치렁한 목걸이를 벗고 자신을 구속하던 것을 모두 벗어버립니다.
지금 이 순간 곁에 있는 사람과 삶의 소중함을 깨달은 듯 여자 친구에게 키스를 합니다.
잠옷 차림의 클라리사가 전등을 끄며
댈러웨이 부인들의 하루가, 그녀들의 일생이 온전히 담겨 있던 하루가 막을 내립니다.
아름다운 영상과 배우들의 연기력, 그리고 촘촘한 연출력이 뛰어난 영화 <디 아워스>에서
제가 좋아하는 명장면을 세가지 꼽아보자면
먼저 버지니아가 소설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장면입니다.
산책을 하는 길에서건 다른 가족과 함께 있는 장소이건
자신의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그 몰입감이 좋았습니다.
그게 글쓰기이거나 연극이거나 음악이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저와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어요.
두번째는 로라를 줄리아가 안아주는 장면입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자신만 희생하면 완벽할 수 있었던 가정을 버리고 떠난 로라.
자신을 위한 삶의 선택이었지만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 시대의 규범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세월이 흐르고 진화하여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녀를 이해 할 수 있는 가슴이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한 줄리아의 포옹이 로라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편안한 잠옷 바람으로 불을 끄는 클라리사를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홀가분함을 느꼈습니다.
걸리적거리고 치렁치렁 소리를 내던 악세사리들을 다 벗어던지고
본연의 모습으로 하루를 마무리 하는 클라리사
그녀의 내일이 우리의 미래가 기대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영화 <디 아워스>는
지금 이 순간, 오직 나를 위해 살아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인내와 헌신이 상대에게 꼭 기쁨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의도치않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말지요.
인생의 정답을 찾지말고 그저 나를 위해 사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찬란하게 사는 것이 진리인 것 같습니다.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언제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삶의 진면목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마침내 그것을 깨달으며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그런 후에야 접는거예요.
우리가 영원히 함께한 시간을요
영원히 함께한 시간을요
영원한 그 사랑을요
1941년 버지니아를 집어삼킨 강물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눈부신 빛을 반사하며 흘러갑니다.
우리의 시간들도 유유히 흘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