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료가 전부다.

1-1 사람이나 커피나

by 염동훈

커피에서는 재료가 거의 전부다. 훌륭한 바리스타라도 맛없는 커피를 맛있게 내릴 수 없다. 덜 맛없게 내릴 수 있을 뿐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가끔 어쩔 수 없이 맛없는 커피를 내려야 할 때가 있다. 맛을 안 보고 구매한 생두나 커피가 떨어져서 급하게 산 원두커피가 그렇다. 정보 없이 구매할 때 맛없는 커피가 걸린다. 버리긴 아까우니까 먹긴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맛없는 생두는 최대한 강하게 오래 볶는다. 커피는 약하게 볶였을 때 장점과 단점을 다 보여준다. 강하게 볶였을 때는 장점도 단점도 잘 보이지 않는다. 단점만 가진 커피는 없다. 장점도 있다. 단지 단점이 장점보다 훨씬 많을 뿐이다. 장점이 묻히는 것이 아쉽지만 단점을 가리기 위해 강하게 볶는다. 강하게 볶으면 희미하게 남은 장점과 단점의 흔적만 남는다. 멋진 기술 같지만 잔기술일 뿐이다.


커피는 장점부터 보여주기 시작한다. 꽃향, 과일향 등을 보여주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나쁜 향을 보여준다. 떫은맛, 쓴맛, 흙이나 나무향 등 불쾌한 향은 장점을 다 보여주고 난 후에 드러난다. 좋은 커피는 추출한 후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단점이 잘 보이지 않는 커피다. 커피가 가진 장점까지 훌륭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나 장점이 많은 것보다 단점이 적은 것이 더 낫다. 장점은 티가 잘 안 나지만 단점은 티가 잘 난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것은 단점이다.


맛없는 원두를 샀을 때는 어떻게 내릴까. 맛없는 생두를 샀을 때와 비슷하다. 최대한 단점을 가리는 것. 장점을 희생하더라도 단점을 숨기는 것이다. 원두를 가늘게 분쇄하면 커피가 가진 향미가 다 드러난다. 좋은 향미도 나쁜 향미도 빠르게 물에 녹는다. 요리에 비유하면 통 멸치로 우린 육수와 멸치 가루로 내린 육수와 비슷하다. 멸치 가루로 만든 육수가 더 빨리 만들어진다. 표면적이 넓기 때문이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가늘게 분쇄한 커피가 갖고 있는 향미는 물속에 빨리 녹아든다. 나는 품질이 안 좋은 커피는 굵게 분쇄해서 사용한다. 가늘게 분쇄해서 단점까지 추출하지 않는다. 차라리 굵게 분쇄해서 나쁜 맛을 줄이는 것을 선택한다. 좋은 향미도 덜 나오더라도 나쁜 맛을 줄이는 것이 더 낫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안 좋은 사람은 단점이 있어서 가리기 바쁘고 처음에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아닐 수도 있다. 맛없는 생두를 강하게 로스팅하는 것처럼 사람도 비슷하다. 자신의 단점을 가리기 위해 기술을 부린다. 멋진 옷으로 가릴 수도 있고 유명세로 가릴 수도 있다. SNS에 멋진 사진을 은폐하기도 한다. 이런 잔기술은 언젠가 들통난다. 커피에서 재료가 전부인 것처럼 사람도 사람 자체가 전부다.


좋은 사람은 계속 봐도 좋은 사람이다. 한 순간만 좋은 사람이 아니다. 처음도, 중간도, 지금도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도 과거에는 좋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진다. 어느 순간 단점이 튀어나온다. 커피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다가 시간이 지나서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안 좋은 모습이 남아있던 좋은 모습을 다 삼켜버린다.


커피를 내릴 때 ‘나는 어떤 사람일까’란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인데 아직까지 잘 숨기고 사는 걸까. 잘 모르겠다. 좋은 사람이라면 다행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면 되니까. 나쁜 사람이라면 부지런히 날 감추며 살아야 한다. 멋진 척, 착한 척, 다정한 척. 사람들이 내 안에 숨겨놓은 안 좋은 면을 보지 못하게 말이다. 게으른 나로서 피곤한 일이다. 그럴 바엔 장점도 단점도 드러내지도 않고 숨기지도 않고 살고 싶다. 나쁜 커피도 누군가에게 좋은 커피일지도 모른다. 나란 사람도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친구에게 좋은 사람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