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쿠르 코치 김지호 Oct 22. 2023

꼭 그렇게까지 해야하냐


파쿠르를 하면서 종종 들었던 말이 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


안주해 있는 사람이 모험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진심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면, 스스로 가능성을 낮추거나 잠재우는 선택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손바닥에 물집 잡히거나 피가 철철 흘러도, 양쪽 무릎과 정강이가 시퍼렇게 멍들어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타협할 만한 생각과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매 순간 몰입되어 있다.

비록 어떤 대가와 보상도 없는 무상한 행위일지라도 나는 진심으로 이 순간을 만끽한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 욕망 중에서도 내가 서있는 이 자리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최선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나 자신일 수 있는 '선(올바름)'이며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흔들리지 않고 욕망의 질서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고유한 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내게 명상이란, 자신의 욕망을 거세시키거나 세상의 구조, 주어진 삶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잡다한 욕망들을 과감하게 제거시키고 나의 온전한 모습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욕망을 실천하기 위한 '정중동' - 먼 과녁을 응시하고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기 바로 직전의 멈춤이자 극도의 떨림 -이다. 이러한 최선의 욕망조차 내려놓아야 한다면 나는 차라리 부처의 뺨을 때리겠다.

마찬가지로 '힐링', '욜로', '워라밸', '이불 밖은 위험해'로 대변되는 질서와 안정감, 휴식을 지시하는 세상의 모든 언어와 형상들도 내게는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최선의 욕망을 선택하고 나아가기 위한 일시적인 정거장에 불과하다. 정거장에 속한 것들의 특징은 욕망의 '시녀' 혹은 '설거짓거리'라는 것이다.

이 사실이 불편하게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정거장에 속한 가치들을 제대로 세상에 펼치고 싶다면 더더욱 최선의 욕망을 실천해야 한다. 최선의 욕망은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장 높은 차원의 욕망은 '나'라는 에고(ego) 혹은 파편화된 개인 단위에 머물러있지 않고 구조를 다루는 세계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내가 선택의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삶이 불안과 고통으로 가득할 때, 자신의 존재양식으로서 최선의 욕망을 살피고, 그것을 기준으로 삶을 가꾸어 나가자. 삶의 본질은 무상하기에 또한 무엇이든 상상하고 욕망할 수 있다. 공허한 하늘을 거대한 붕새가 되어 날갯짓 한 번 휘저어보고 살다 가자.

2023.10.20 옥상에서

작가의 이전글 사실 파쿠르는 쓸모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