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통터치는 힘들어
선생님께서는 똘이가 달리기를 하다 보니 흥분도가 점점 올라가서 마지막에 바통을 던져버리는 것 같다고 하셨다.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똘이와 연습하다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똘이야, 바통을 받으면 들고 달리는 거야. 달리다가 바통을 던지지 말고 OO이 손에 갖다 주는 거야. 알겠지?”
“똘이는 던지면 돼? 안 돼?”
“던지면 안 되지. 어떻게 하는 거라고 했지?”
“던지면 OO이가 아파? 똘이는 같이 할 수 없어?”
“아니, 아픈 건 아니지만 던지지 않고 친구 손에 주어야 해. 던지면 똘이 팀 친구들이 모두 속상하게 돼.”
“똘이는 바통 던졌어? 안 던졌어?”
“어제는 똘이가 실수로 던졌지. 이제 안 던지게 엄마랑 연습해 보자.
자, 따라 해 봐. 1번. @@에게 바통을 받는다. 2번. 바통을 들고 달린다. 3번. 바통을 던지지 않고 OO이 손에 준다.”
번호를 붙여 몇 번이고 말로 설명한 후 내가 똘이의 후발주자가 되어 바통을 받는 상황을 연습해 보았다.
결과는 역시나였다. 똘이는 또다시 바통을 던졌다. 던진 후 똘이는 마치 아주 신이 난 사람처럼 깔깔 웃었다. 그것이 똘이 특유의 회피 반응임을 안다. 신이 나서 웃는 것이 아니라 무안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웃는 것이다.
똘이는 바통을 전달하는 그 순간의 상황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어려우니까. 막막하니까.
“똘이야, 바통을 던지면 돼, 안 돼?”
“안 돼.”
“맞아. 던지지 말고 손에다가 주는 거야. 자, 다시 해보자.”
“싫어. 똘이는 자꾸 던져. 똘이는 못하겠어.”
풀이 죽은 똘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구석에 숨어버렸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 속상한 것 같았다.
똘이는 흥분도가 올라가서 자기도 모르게 바통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바통을 제대로 전달할 자신이 없어서 던져버리는 거였다.
바통터치는 똘이에게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과업이었다.
똘이는 인지도 또래보다 낮은 편이고 손발협응도, 운동감각도 더딘 아이다.
손발협응이란 말 그대로 손과 발을 동시에 적절하게 사용하는 능력을 말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손발을 함께 쓰는 과제를 해내기 위해 뇌가 적절한 움직임이 뭔지 판단하여 지시를 내리고 손과 발은 뇌의 명령에 따라 정확한 움직임을 수행하는 능력이다.
예컨대 줄을 잡고 비탈길을 올라가거나 거미줄 그물을 타는 능력 같은 것.
어느 정도 발을 뻗어야 다음 디딤돌에 닿을 수 있는지를 예측한다거나 손과 발 중 어느 부분을 어떻게 써야 할지 판단해야 할 때 똘이는 늘 버퍼링에 걸리고 만다.
놀이터에서 구름사다리에 올라갈 때도 옆에서 엄마가 “자, 다음은 오른쪽 손을 움직여서 저기를 잡아봐. 그다음은 왼손, 그다음은 오른발.”이렇게 꼭 꼭 하나씩 짚어줘야 하는 아이다.
똘이의 인지치료선생님은 똘이를 '자극을 뇌로 들여보내고, 뇌가 내린 명령을 신체로 전달하는 길'이 아직 제대로 트이지 않은 아이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아이에게 전력질주를 하다가 속도를 줄이고 친구의 손의 위치를 파악하여 바통을 건네는 일은 이만저만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다시 연습해 보자고 달래 보았지만 반복된 실패로 자신감을 잃은 똘이는 “릴레이 못 하겠다. 어린이집 안 갈 거다. 배가 아프다(?) 잠이 온다(?) 나는 10 밤 자고 일어날 거다(운동회 끝나고 나면 일어난다는 뜻)”며 자꾸만 상황을 외면하려 했다.
이러다간 아이에게 거부감만 더 심어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작전을 바꿔야지.
이럴려고 ABA를 공부하지 않았던가?
“그래, 똘이가 안 하고 싶으면 하지 말자.”
나는 모른 척, 마치 릴레이를 까맣게 잊은 사람처럼 그 이야기를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몇 시간 후
“똘이야!! 지금 빨리 ‘엄마 손에’ 호비 인형 좀 갖다 줄래? 얼른 뛰어와야 해!!”
라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똘이는 영문도 모르고 두다다다 달려서 호비인형을 엄마 손에 착 얹어 주었다.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똘이가 던지지 않았구나!! 던지지 않고 '엄마 손에' 호비인형을 갖다 주었구나!! 정말 잘했어!! 이렇게 하는 거야. 던지지 않고 손에다가 갖다 주는 거야!! 릴레이도 이렇게 하는 거야. 정말 잘했어!!”
라고 말해주었다.
똘이는 약간 으쓱해진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릴레이 안 할 거야.”라고 말했다.
“그래, 그래. 똘이가 싫으면 안 하지.”
“똘이야!! 엄마한테 칫솔 좀 빨리 갖고 뛰어와. 엄마 손에 칫솔 좀 줘!!”
“똘이야!! 냉장고에서 사과 꺼내서 엄마 손에 좀 갖다 줘! 빨리 와야 해!”
“똘이야!! 양말 벗어서 엄마 손에 빨리 갖다 줘!”
똘이가 심부름을 수행할 때마다 aba수업에서 하듯 아낌없는 칭찬과 소소한 간식을 주며 아이의 행동을 강화해주었다.
“너무 잘했어. 똘이 정말 멋지다. 던지지 않고 엄마 손에 갖다주면 돼. 릴레이도 이렇게 하는 거야. 빨리 뛰어서 친구 손에 바통을 갖다 주면 되는 거야. 어렵지 않아”
똘이는 조금씩 자신감을 얻어 갔다.
“어머님, 똘이가 연습상황에서 처음으로 바통터치에 성공했어요! 성공하고도 똘이 자신도 너무 기뻐했어요. 친구들도 모두 손뼉 쳐 주었어요.”
운동회 연습에서 바통터치에 성공한 영상을 보았을 때 아이가 너무나 기특하고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났다. 남편에게 친정엄마에게 영상을 공유하며 잔뜩 자랑했다. 30번도 넘게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똘이에게 고맙고, 똘이에게 기회를 주신 선생님께 고맙고 똘이를 다그치지 않고 기다려준 친구들에게 고마웠다.
똘이가 해냈구나. 정말 잘했어. 기특하고 또 기특한 내 새끼.
사랑스러운 내 새끼.
.........
......................... 불쌍한 내 새끼.....
행복한데, 기쁜데, 기특한데... 영상을 돌려보면 볼수록 마음이 아팠다.
왜 난 똘이가 새로운 도전에 성공한 기쁜 일에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할까.
다른 아이들에겐 수월하고 당연한 것들이 우리 똘이에겐 하나하나 넘어야 할 높은 문턱이구나.
앞으로도 무수한 문턱이 똘이를 기다리겠구나.
우리가 그때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허덕거리며 낙오되지 않으려 따라가는 생활이, 평범함을 연습하는 삶이 똘이의 운명일까.
잡생각을 쫒으려 찬물로 세수를 하고 손뼉 치듯 뺨을 두어 번 착착 때렸다.
한 번이라도 성공했으니 됐다.
똘이가 성공한 모습을 보았으니 그걸로 다 됐다.
실전에서 성공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지만,
똘이가 바통 터치를 할 수 있는 아이라는 걸 알았으니 내 마음은 그걸로 되었다.
이 성공의 경험은 나에게도 똘이에게도 큰 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이렇게 작은 성공의 경험을 쌓아가다 보면 똘이도 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고 새로운 도전을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며칠 뒤면 실전이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나는 똘이를 번쩍 안아 들고 너무 잘했다고 도전하고 참여한 모습이 너무 멋지다고 칭찬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똘이가 또 바통을 던져버린다면 똘이나 똘이 친구들의 마음이 괜찮지 않을 수 있으니 더더 똘이를 격려하고 열심히 훈련시키는 거다.
할 수 있다.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