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카프카의 삶, 사랑, 문학에 대해
“책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라고 카프카는 말했다. 20세기 문학사에서 카프카의 출현은 그야말로 ‘얼음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 그 자체였다. 불세출의 작가들과 유수의 비평가들이 카프카를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꼽는데 주저 앉는다.
카프카 문학은 ‘Kafkaesk(카프카적이다)’라는 형용사를 낳았다. 이 단어의 층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가장 흔하게는 현대인의 불안, 고뇌, 자괴감, 소외, 고독, 출구의 부재와 같은 불안한 내면의 상징으로 쓰인다. 실존주의 진영에서는 부조리로 인해 주체성의 상실한 인간을, 정신분석학에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는데 쓰이는가 하면, 파시즘, 자본주의, 관료제 등의 폭력성에 희생된 인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나에게 ‘카프카적인 것’이란 ‘고유하고 섬세한 예술적 자아와 이를 억압하는 모든 권위 사이의 갈등’이며, ‘권위적이고 부조리한 세계에 적응하지도 반항하지도 못하고 마모되어 가는 인간의 고뇌와 좌절’이다.
독일의 사상가 아도르노는 카프카의 텍스트를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 보라’고 하면서 어떤 문장도 그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평했다. ‘카프카’만큼 무수한 쟁점과 다양한 해석을 끌어낸 작가가 또 있을까? 심오하고 다층적인 주제, 예측불가능한 전개, 황당한 결말, 등장인물의 모순적인 말과 행동,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구성, 무수한 상징들.... 확실히, 카프카는 읽어내기 쉽지 않은 작가다. 하나 바꾸어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카프카의 텍스트는 역사, 철학, 사회제도, 종교, 인간의 본성 그 어떤 측면에도 대입 가능하고 그 어떤 해석이든 포용될 수 있다. 그를 읽는데 정답은 없다. 카프카는 분석해야 할 작가이기보다 감각하고 조망해야 할 작가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프카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작품 속 모순을 논리로 이해하려 하거나 등장인물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의 상징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카프카를 읽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달리의 시계를 보며 ‘저런 시계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하거나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인물의 눈, 코, 입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를 따지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카프카를 분석하려 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깊은 미궁 속으로 숨어들 것이다.
카프카의 모순적이고 비현실적인 세계관은, ‘어떤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창조해 낸 세계라기보다 그가 실제로 지각한 세계 그 자체다. 카프카는 세계를, 사회를, 체제를, 자신의 삶을 부조리, 모순덩어리, 악몽 따위로 인식했다. 중요한 건, 그 세계관의 근저를 찾는 것. 즉 그가 어떤 시대에 태어나 어떤 유년기를 보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에 대한 의문. 그것이 카프카를 읽는 열쇠다.
우선, 카프카는 태생적으로 이방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체코에서 태어나 독일어로 글을 썼던 유대인이었다. ‘독일어를 쓰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고향인 체코에서도 이방인이었고,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독일사회에도 소속되지 못했으며, ‘시오니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 사회에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카프카의 성격적 결함과 자기 확신의 부재, 삶을 불행으로 이끈 트라우마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양육방식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상인이었고 그의 세계는 ‘권위와 명령, 강압, 법과 규율’이었다. 전형적인 가부장이었던 카프카의 아버지는 어린 카프카를 윽박지르고 체벌했다. 그는 “아버지 앞에만 서면 자신감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지고 끝없는 죄의식이 솟아오른다.”라고 회고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듯 작가 카프카의 재능 또한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자신의 고유성을 부정하는 아버지에게 적응하지도 반항하지도 못했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는 진입할 수 없는 성(성)이자 해석되지 않는 법(소송)이자 가족이라는 이름의 속박(변신)이었다. 카프카가 지각한 ‘악몽 같고 실체를 알 수 없으며 출구조차 없는, 부당하지만 결코 항거할 수 없는 세계’는 그가 평생도록 달아날 수 없었던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카프카에게 유일한 해방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카프카가 삶에서 원하는 것은 오직 글을 쓰는 것뿐이었으나 가족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법학을 전공해야 했고 돈을 벌어오라는 가족들의 압박 때문에 보험회사에서 일했다. 원치 않는 전공을 공부해야 했고 전공과 관계없는 직장생활을 해야 했던 카프카는, 이 경험을 통해 관료제와 자본주의가 인간을 어떻게 소모시키는지, 사법제도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개인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를 체감했다.
카프카는 사랑에서 마저 실패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약혼까지 했으나 그는 결국 파혼을 택한다. 결혼생활과 글쓰기를 병행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는 것이 두려워 아버지가 되는 것도 포기한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 유년기의 트라우마, 자기 환멸 때문이다. 결국 카프카는 자신은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보내고 만다. 이로 인해 그는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린다.(그 시기에 집필한 작품이 <소송>이다.)
그 외에도 질병, 인간관계의 실패, 악몽과 불면증은 그를 끊임없이 불행하게 했다.
이렇듯 불행으로 점철된 그의 생애는 그의 문학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프카의 문학 속에서 나타나는 ‘부조리하고 억압적이며 탈출구가 없는 악몽 같은 현실’은 그 자체로 카프카의 삶이었다.
카프카의 문학들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 ‘사회체제의 모순을 통렬하게 고발’, 심지어는 ‘나치의 학살을 예언(?)’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나는 이러한 것들이 온전히 카프카의 의도였다고 보지는 않는다. 카프카는 지극히 내향적인 작가이며 매우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의 글을 썼으며, 그의 소설에는 상당히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묻어있다. 카프카 문학의 원천은 ‘불행한 삶’이다. 유년 시절의 상처, 그가 받은 억압,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충격적 경험들은 그로 하여금 자아 이외의 세계를 부조리하고 억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러한 인식들이 구축해 낸 그의 세계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시대의 불안과 일치했던 것이다. 카프카의 생애를 거시적으로 확대하여 역사, 체제, 철학, 종교 등에 대입할 때 ‘카프카 : 삶에서 받은 억압과 불행한 경험들 = 인간 : 인간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하는 모든 것’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카프카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억압과 부조리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예민하게 흡수하여 문학에 녹여냈다고도 볼 수 있다. 마치 돌고래가 미세한 진동에서 지진을 감지해 내듯 말이다.
절망뿐인 그의 삶에서 글쓰기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의 절망은 글쓰기의 동력이기도 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자네는 자네의 불행 중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야."
그는 자신에게 짐 지워진 의무들 때문에 글쓰기를 할 수 없게 되자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자살해 버리면 글을 쓸 수 없어서 죽지 못했다. 그의 삶은 죽는 순간까지 부조리 투성이었다. 후두결핵으로 고통 속에서 죽어가며 카프카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전해진다. “나를 죽여줘,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살인자야!”
카프카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결국 카프카의 문학 전반을 조망하는 것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문학을 희극으로 여겼다고 전해지지만, 나는 카프카의 문학을 읽을 때마다 걷잡을 수 없이 슬퍼진다. 카프카를 사랑하기에 그의 삶이 아프고, 그의 삶이 아프기에 그의 문학이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