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내 인생에 켜진 동그란 조명이 탁 소리를 내며 꺼지는 것 같았다. 너는 더 이상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네 인생에서 반짝이는 일은 다신 없다고. 앞으로의 삶에 행복은 없을 거라는 선고가 내려지는 것 같았다.
느린 아이를 키우는 인생은 반짝임이나 보람, 행복이 없냐고? 왜 없겠는가. 경이롭고 놀랍고 아름다운 그 보석 같은 순간들을 내가 어찌 잊을까. 그 찰나의 행복에 비해, 길고 미진하며 지겨운 고통의 시간이 너무나 길고 길어 숨을 턱 막히게 할 뿐이다.
긍정적 사고는 개나 주라지. 시지프스처럼 기약 없는 레이스를 이어가며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마주하는 일이 내게 주어진 삶인가? 애초에 내 몫으로 배당되지 않았는지도 모를 ‘밝은 미래’를 기다리며 끝없는 힘듦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때 나를 붙든 것은 철학자 탁석산의 <행복스트레스>라는 책이었다.
결심했다. 더 이상 ‘행복해지기 위해 살지 않겠다’고. 고통과 불행의 강에서 부유하다 아주 가끔씩 떠내려오는 행복이라는 지푸라기를 붙잡으려 애쓰지 않겠다고. ‘자폐 스펙트럼 아이의 엄마’라는 역할을 짊어진 채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다가는 정말로 불행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살 것이다. 불행 속에서 행복할 순 없지만 그 속에서도 ‘좋은 사람’ 일 수는 있을 테니까. 그래,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구 없는 터널을 헤맬 때도, 잠수종에 묶여 깊은 바다로 끌려들어 갈 때도, 오직 내가 서 있는 자리에만 폭우가 쏟아질 때도 이 순간을 벗어나 행복으로 가기 위해 애쓰기보다 그 자리에서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분투했다. 그것은 내 상황이나 감정과 상관없이 어떤 조건에서든 가능한 일이어서 좋았다. 신기하게도 행복을 포기하자 훨씬 행복해졌다.
좋은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글을 썼다. 그 시간들이 나를 더 단단하고 다정하고 유연한 사람으로 바꿔놓았음을 믿는다.
그러니까 이건, 자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이야기가 아니라, 행복보다 슬픔이 많은 시간을 살았던 한 인간이, ‘그 시간’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