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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딩 Jul 18. 2024

파김치와 오이지의 사랑


 지인들은, 우리 부부가 재력도 있고 체력도 좋고 금실도 좋아서 아이를 셋이나 낳은 거라고 생각한다. 셋 다 틀렸다. 우린 돈도 없고 체력도 개털이고 딱히 금실이 좋은 것도 아니다. 우리 부부는 정신과 체를 통틀어 오직 난자와 정자만 건강한 것 같다. 우린 딱 세 번 방심했고 적중률이 탁월했다. 그리고 이미 생긴 아이를 출산하냐 마냐는 최소한 우리 부부에게 있어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나는 낙태 반대론자가 아니다. 여성이 임신, 출산 문제에 있어 자기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만 나의 선택이 그럴 뿐이다.)



 남편은 다양한 이유로 아프고 나는 이유 없이 비실댄다. 둘 중 뭐가 낫냐고 묻는다면, 최소한 부부사이에서는 ‘정확한 병명을 가진 것’이 나은 것 같다. 현대의학으로 진단명이 나오는 이유로 한 명이 아프면, 이유 없이 비실대는 다른 이는 정확한 ‘진단’을 받은 사람의 몫까지 가사와 육아를 떠맡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편의 고질병은 배탈, 편두통, 술병, 비염, 내성발톱 등이 있지만 그중 그를 제일 힘들게 하는 건 허리디스크다. 터질락 말락 하는 디스크를 가진 그는 허리를 숙이거나 비트는 걸 힘들어한다. 육아와 가사에서 허리를 숙이고 비트는 일을 빼면 대체 뭐가 남을까? 하다못해 막내의 기저귀 하나 갈아주는 것조차 허리가 아프면 할 수가 없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별다른 병명 없이 골골거리기만 하는’ 나는 또 골골대는 몸을 이끌고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첫째의 공부를 봐주고 똘이의 치료 라이딩을 하며 매일 쓰레기장으로 리셋되는 집을 치우고 쓰레기를 버리고 아이들을 재우고 깨우는 무한루프를 반복하는 것이다.  



 남편은 왕복 2시간을 차로 출퇴근하고 회사에서 힘든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동기들과 승진 경쟁을 하며 쏟아지는 민원전화를 받아내면서 짬짬이 기술사 시험을 공부한다. 저녁 7시. 퇴근길 러시아워를 뚫고 절여진 파처럼 축 늘어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온다. 현관문을 연 파김치는 쪼글쪼글하고 시큼해진, 아침에는 아내였던 오이지와 만난다. 파김치와 오이지는 하루의 끝 무렵 만나 아직 둘의 몫으로 남겨진 노동을 서로가 덜어주길 기대한다.


 파김치가 안쓰럽다. 혼자서 다섯 식구를 부양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짠하다. 힘들게 돈을 벌고 온 그의 외투를 받아주고 따뜻한 밥을 차려주고 다정한 위로를 건네고 싶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인 나는 그러고 싶지만 오이지는 그럴 수가 없다. 남편은 나를 사랑한다. 잘 시간이 다 되어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아이들의 장난감을 정리하고 첫째의 밀린 공부를 봐주고 아내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싶지만 파김치는 그럴 수가 없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지만 그뿐이다. 마음은 힘이 없다.


 오이지는 주로 볼멘소리를 쏟아내고 파김치는 힘들게 일하고 온 사람에게 좋은 말 좀 해주면 안 되냐고 한다. 그럼 오이지는 다시 ‘그럼 나는 집에서 노냐?’고 하고 파김치는 ‘네가 집에서 논다는 게 아니라 나도 하루 종일 일하다 이제 집에 왔다는 얘기다’고 말한다.



 저녁 8시 30분. 파김치는 거실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거실에선 아직 숙제를 시작도 안 한 채 야식을 달라고 조르는 첫째, 색연필이 무지개 색 순서대로 안 되어 있어 불안과 강박이 잔뜩 오른 둘째 똘이, 한참 전에 싼 똥을 아직도 기저귀에 달고 다니는 셋째가 있다. ‘이걸 나더러 다 어떻게 해결하란 말이냐, 남편이 왔으면 뭔가 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그를 흔들어 깨우고 싶지만 참는다. 당장에라도 침대에 쓰러지고 싶은 몸을 꾸역꾸역 소파로 접어 넣어 자신의 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더 밉다는 걸 남편은 모르는 모양이다.)


 아빠와 보내는 시간이 짧으니, 당연히도 아이들은 엄마와 잠들고 싶어 한다. 세 아이의 치열한 자리싸움에 오이지는 ㄱ자로 접혔다가 ㄷ자로 접혔다가를 반복한다. 결국 ㄹ자가 되어서야 아이들은 모두 곯아떨어졌다.


 거실로 나오니, 거실의 물건들이 구석에서 차곡차곡 처박혀 쌓여있다. 거실 중앙만 깨끗하고 스탠드 에어컨 주변, 티브이 장 위, 식탁 아래가 제 자리를 잃은 물건들로 수북하다. 단정하면서 무질서한 거실을 만든 장본인은 소파에서 졸던 파김치다. 아이들이 다 자러 가고 나서야 혈당스파이크에서 깨어난 남편은 자기 나름대로의 성의표시를 한 것이다. 그 모습이 밉고 고맙고 짜증 나고 애틋하다.



 안방으로 가니 남편이 침대에 누워 유튜브 쇼츠를 보고 있다. 내가 행여나 먼저 빈정거릴 까봐 남편은 얼른 두 팔을 벌리며 “우리 자기 정말 고생했어. 얼른 내 옆에 누워.”라고 말한다. 싸울 힘도 따질 힘도 없는 나는 그의 옆에 눕는다. 이 순간에는, 미움과 원망보다 고마움, 연민, 사랑을 꺼내어야 한다는 걸 이젠 잘 알고 있다.


 오이지가 “고생 많았어. 가족들을 위해 돈 버느라 수고했어.”라고 말하면, 파김치도 “아이들 돌보고 내 식사까지 챙겨주느라 정말 고생했어. 고마워.”라고 말할 것이다. 오이지가 “나는 이 시간까지 힘들어 죽겠는데 누워있으니 좋냐?”라고 말하면 파김치도 “오늘 하루 종일 일하다 조금 전에 누운 거다. 그게 그렇게 꼴 뵈기 싫냐?”라고 말할 것이다.



 집이 고요를 되찾은 밤 11시. 이제야 단 둘이 남은 우리 부부는 마음속에서 원망이나 섭섭함 대신 고마움과 사랑을 꺼내려고 노력한다. 불과 몇 단락 전에 마음은 힘이 없다고 썼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제일 중요한 건 마음이라는 것을.


 가자미 눈을 해도 오리주둥이를 해도 가시복어처럼 걸핏하면 가시를 세워도 “OO야, 아빠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예쁘다.”라고 말해주는 그 마음, 에어 프라이어에 데운 냉동식품을 저녁으로 내어 놓아도 “맛있는 음식을 차려줘서 고맙다”라고 말하는 마음, 벌떡 벌떡 일어나 아내의 노동을 덜어주지는 못해도 아이들이 자러 들어갈 때까지 거실에서 자리를 지키는 마음. 물건의 제자리를 알지 못해도 최소한 지금은 일거리가 아내 눈에 띄지 않게 어디라도 쑤셔 넣으려는 그 마음 말이다. 어쩌면 아무런 힘도 쓸모도 없는 마음이지만 ‘쓸모’로는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세상엔 분명 존재한다.


 돈 많고 시간 많고 건강한 이들에겐 사랑이 쉽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체력도 없는 오이지나 파김치들의 사랑이 어려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린 그것을 기꺼이 해낸다. 때로는 사랑보다 미움이 쉽지만,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은 미움보다 사랑에서 온다는 걸 알기에.



 가족을 위해서 매일 파김치가 되길 마다하지 않는 당신을, 오이지가 된 나를 여전히 예쁘다고 말해주는 당신을 사랑해. 오이지를 기꺼이 사랑해 주는 당신이기에 나도 파김치를 기꺼이 사랑하는 내가 될 수 있었어. 오이지든 파김치는 당신은 나의 하나뿐인 반쪽이니까, 절여진 오이지라도 괜찮다면 언제나 나의 무릎을 내어줄게. 파김치라도 좋으니 언제나 당신의 어깨를 빌려줘.


 나의 바닥을 보게 하는 당신이 밉지만, 나의 바닥마저 사랑해 주는 당신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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