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사랑 편지 #2.
지아야, 오늘은 엄마와 아빠가 연애했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려고 해.
엄마가 아빠를 만났을 때쯤엔 엄마의 집에서 회사까지 거리가 꽤 멀어서 퇴근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되곤 했지. 샤워를 하고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기대어 책을 펴고 좀 읽다 보면 보통 열 시 가까이 되었어. 거의 열 시 정각. 네 아빠의 전화가 어김없이 걸려왔지. 오늘 하루 잘 보냈나요? 그때는 우리가 아직 공식적으로 사귀는 단계는 아니었을 거야. 요즘 말로 하면 썸을 타고 있다고 해야 하나 뭐 그런 사이였어.
엄마는 말이야, 남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문자나 전화를 한다던가 그런 것을 안 좋아했던 것 같아. 예전엔 온라인 메신저를 많이 사용했었는데 업무 시간에 사적으로 말을 거는 남자들은 더 안 좋아했지.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잖아. 이렇게 말하니까 엄마 콧대가 아주 높았던 것 같네. 하하.
아무튼 네 아빠는 엄마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제일 편안한 상태로 쉬고 있을 때 거의 밤 열 시 정각 즈음에 전화를 거는 거야. 낮에는 문자도 전화도 전혀 없다가. 딱 밤 열 시가 되면 우리는 길지도 않게 십여 분 혹은 이십 분 그 정도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했지. 물론 나중에 진짜 사귀고 사랑에 빠졌을 때는 밤새도록 전화하다가 전화기 붙잡고 잠들고 하긴 했지만. 엄마는 그 열 시의 전화 통화가 좋았어. 엄마를 배려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 무엇보다 하루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시간에 나에게 호감이 있는 사람이 나의 하루를 물어봐 주는 게 참 좋았어. 어는 순간부터는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리추얼」 추천사에서 일상의 반복적인 행동 패턴이 자신을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든다고 했어. 매일 같이 같은 시간에 주고받은 네 아빠와의 전화 통화는 엄마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어. 일종의 리추얼이 되었지. 큰 이벤트나 비싼 선물보다 더 값지게 느껴졌어. 사회생활에 지쳐있던 나에게 기댈 수 있는 일기장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에 네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맑고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어. (일곱 살의 너는 아빠는 웃기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했단다.) 평생 내 곁에서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있어줄 것 같은 사람으로 느껴졌어.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엄마는 네 아빠와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아. 내가 만났던 다른 남자들이 다들 가지고 있었던 우울 한 스푼조차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거든. 맑고 밝은 사람이었어.
너도 아빠처럼 순수하고 배려심이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허세가 많고 음흉한 남자는 걸러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길 바라. 그보다 네가 먼저 그렇게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 되길.
한 가지 반전이 있어. 결혼하고 네 아빠가 엄마에게 해 준 이야기인데, 사실 밤 열 시 전화하기는 책에서 배운 것이었대. 여자친구를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적혀있던 잡지책을 읽었대. 아빠가 거기서 조언해 준 대로 엄마에게 그대로 했는데 그게 다 먹혔다나 뭐라나. 업무시간에 말 걸지 말고 이모티콘 같은 거 보내지 말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짧게 전화하라고 했다나 뭐라나. 내가 제대로 걸려든 거지. 그런데 뭐 결론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어!
오늘 이야기는 어때? 네가 엄마 아빠의 연애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우리 가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처음을 들려주고 싶었단다. 엄마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길 바라며 아빠에게 그 당시 엄마에 대해 물어봐도 재미있을 것 같네. 만약에 물어보게 되면 엄마에게도 알려줘.
오늘 하루 잘 보내고!
22 February 2022 Takapuna beach
아빠의 시선에서 바라본 엄마와 너